이탈리아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인간의 상상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미리 상상하기와 나중에 상상하기입니다. 미리 상상하기는 앞으로의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상상하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전의 개념을 말합니다.
나중에 상상하기는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상상하는 것으로서, 주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혹은 과거에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람은 과거를 실제보다 더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리는 일을 좋아합니다.
반면 믿음의 사람은 기억을 관리하는 방식,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이 남다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경을 통하여 과거를 살피고 이제부터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미래를 향하여 능력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으로 미래를 디자인 하며 살아갑니다.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08:28절 말씀으로 우리의 모습을 진단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 아브라함 자손다운 믿음입니다. 사람은 지식이 없음으로 망합니다(호 04:06).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원을 받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은혜를 받고, 믿음이 무엇이지 알아야 말씀의 능력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말씀을 따라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제목을 나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입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
0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 지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 이라는 호칭을 자주 만납니다.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상황에 따라 조금은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간단히 구분하자면 먼저 히브리인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인은 국가적인 개념을 강조하며, 유대인은 외국인들과 상대되는 민족적 개념으로서의 호칭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특별한 자랑거리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롬 02:17), 율법이 있는 것과(롬 02:2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일입니다(요 08:33). 유대인들은 이 세 가지를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특권적인 존재로 여기고, 상대적으로 이방인들 즉 외국인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하고,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자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율법을 경홀히 여기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인물들 가운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 셋을 꼽겠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을 믿음의 3대 조상이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히 친구라 부르셨고(사 41:08),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는 영육 간에 좋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2:0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0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해 주시는 그 신령한 은혜를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할례파 유대인들과 신학적 논쟁을 하는 가운데서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07절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06절에서 인용하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그 믿음(창 15:06)입니다.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장차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동급이 되고,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상속 받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엡 03:0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2. 아브라함은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
0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 08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이나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천사인 줄 알지 못하고 대접을 한 후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창 18:18)고 하셨고, 또 한 번은 여호와 이레 후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창 22:18).
사도 바울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을 놓고, 지금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복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다 복의 근원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 고 하신 그 복을(창 12:02)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아멘 하여 그대로 받기를 축원합니다.
너로 말미암아. 이 부분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좀 더 깊게 적용을 해 봅시다. 원문의 뜻을 제대로 살리면 네 안에서.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이방인 즉 외국인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할례를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할례 없는 이방인들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안에서(롬 04:16)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벧후 01:01)이라고 규정합니다. 모든 죄까지도 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이 됩니다. 영국 격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복이고, 믿음은 모든 복을 불러 오는 복의 통로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을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고, 감히 대적하거나 맞설 자가 없습니다.
롬 0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혹 온 세상이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믿음 안에서 의롭다고 하시고 백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 08:13, 마 15:28).
마 09: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이 믿음에 우리를 위한 풍성한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에 로그인이 되는 순간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적을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24년이 되어 사람으로서는 가능성이 없지만, 그래도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 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100세 때 이삭을 낳은 일입니다.
3.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복의 근원입니까? |
0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하여 가장 설득력 있고, 가장 쉽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아주 귀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던 것처럼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까? 복의 근원이란 우리의 발걸음이 내 딛는 곳에는 복도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지라 하신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복의 근원이 된 사실을 그의 종 엘리에셀도 증언하였고(창 24:35), 아브라함의 사후에는 복의 근원이 아들 이삭에게 승계되었습니다(창 25:11).
복의 근원이 승계됨으로 인해 이삭이 블레셋 지역 그랄이라는 곳에 거할 때 생명의 위협을 당 할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결과는 그곳 사람들이 오히려 이삭에게 화친을 청하면서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간증까지 해 주었습니다.
창 26: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삭에게로, 그리고 야곱에게로 승계되었는데 야곱이 밧단아람의 외갓집에서 거할 때 장인인 라반이 이렇게 증언을 합니다.
창 30: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구약시대 믿음의 3대 족장, 이들은 다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아시지요. 삼촌 아브라함과 사이에 의리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지라도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창 19:29). 애굽에 팔려간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고(창 39:05),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을 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이 믿음으로 나에게 승계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내가 복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이제 복의 근원이 되어 살아갑시다. 우리 때문에 복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오게 합시다. 반드시 이 말씀을 심령에 새기고 복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창 12장 03절 말씀을 봅시다.
창 12:0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너를, 너로. 여기 2인칭은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우리를, 바로 나를 향한 인칭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실어주시는 이 말씀으로 이웃을 위한 축복의 중보자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히말라야에 사는 고산족들은 산양을 사고팔기 위해 산비탈로 향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산양을 사고, 팔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산양의 가격을 어떻게 정합니까?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합니다.
양의 우리에서는 산양의 성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파른 산비탈에 산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래서 산양이 산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아무리 작고 마른 산양이라도 값이 오릅니다.
반대로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몸이 크고 살이 쪘다 해도 값이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위로 올라가는 산양은 현재는 힘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풀들을 먹으며 건강하게 자랄 미래가 있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협곡 바닥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서 결국은 그곳에 이르러 굶어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온갖 직분과 특권을 누리는데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까? 살아있는 믿음입니까? 살아있는 믿음만이 현실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독수리가 창공을 향하여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미래를 향하여 도전하며 나아 갈 수 있습니다(사 40:31).
반면 죽은 믿음은 영적 힘이 없기 때문에 작은 시련만 와도 무너지고 맙니다. 살아있는 믿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모신 자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되어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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