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이름보다 별명으로 산 바나바(행 11:19~2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5. 2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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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에서 복음의 흔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바나바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저자 누가가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역사의 현장에서 좀 밀려 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의 활동을 보면 요소요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볍게 평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 비중 있는 인물로 일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사람의 본명은 요셉입니다(04:36).

이 요셉이 사람들을 잘 위로하고 권면을 한다는 의미에서 사도들이 바나바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름보다 별명에 걸맞은 복음의 활동을 한 일꾼입니다. 바울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 때문에 더욱 역사의 현장에서 감추어져 살았던 인물이지만 어느 사도 못지않게 일을 한 바나바에 대해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바나바의 인적사항과 초기의 믿음생활을 보겠습니다.

 

0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바나바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본명이 요셉이고, 레위족 출신입니다. 그의 부모가 레위족이기 때문에 레위지파에서 출세를 한 모세나 아론 등의 이름을 딸 수 있음에도 굳이 타 지파의 이름인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왜 그리 한 것 같습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처럼, 어쩌면 요셉의 부모도 아들을 통하여 대리 만족을 누리려는 심정에서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이 구브로임을 볼 때 흩어져 살아가는 헬라파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족이면서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닌 그저 평범한 레위인 바나바입니다.

 

그런데 이 바나바가 밭을 즉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가 어느 날 사도들에게 구제헌금으로 쓰라고 조건 없이 갔다 바칩니다(04:37). 바나바라고 해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겠습니까? 당장은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또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장래를 위한 준비도 하고 싶겠지만 바나바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나바를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위로와 권면을 할 수 있었고, 이웃을 섬기기 위한 구제 헌금도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를 섬기려 하면 오히려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 본보기가 행 5장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헌금 에누리 사건인데 결과는 부부가 저주를 받아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들 부부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은, 헌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감동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충동적으로 하면 시험을 만나기가 쉽습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으나 가정은 살 수는 없습니다. 책은 살 수 있지만 지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지위는 살 수 있지만 존경을 살 수는 없습니다.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바나바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위로하는 역할이 성령님의 어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는 성령님의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한두 번 그렇게 권면과 위로를 하였다고 이런 별명을 붙여주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일상생활이 이웃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는 일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즉흥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서 그런 별명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나바라는 별명이 이웃을 향해 믿음의 용기를 심어주려 한 결과물이고 보면, 김삼일 공동체에도 바나바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절대 필요합니다. 김삼일의 구성원들을 보면 모두가 남이지 않습니까?

살아 온 환경이 다르고, 생활 스타일과 개성이 다르고, 삶의 지향점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알고 보면 교회는 자칫 작은 일 하나 가지고도 시험에 잘 들고, 상처 잘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같은 일꾼이 더욱 필요합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나바의 모습은 기독교 상담사 역할을 잘 하였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2. 바나바는 일꾼을 보는 믿음의 안목이 있었습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먼저 안디옥교회의 형편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한 후 환난이 일자 믿는 자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의 핵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안디옥에 와서 유대인에게 전도를 한 결과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고, 또 성장을 하자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로 파송을 하였습니다(11:22).

당시 안디옥교회가 위치한 수리아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지중해에 위치한 세 번째 큰 도시로서 인구가 약 50만 쯤 되었고 그 중의 7만 명 정도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바나바로 인해 어느 교회보다도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났고, 특별히 세계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바나바가 사울(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25절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음이 기독교의 부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09장을 보면 기독교의 박해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는 현장이 나오고, 변화가 된 후의 바울의 모습은 이제 기독교의 박해자가 아니라 전도자로 세워집니다.

그리고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 다메섹의 각 회당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당혹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갖은 계략을 동원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바울은 믿음의 폭을 더 넓히고자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모두가 바울의 변화 된 모습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워낙 기독교에 대하여 포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나바가 등장을 하여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0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 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가 바울은 이러이러 해서 변화가 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바울은 열정을 품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즉각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바울은 고향인 다소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거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때쯤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거리가 13Km 정도 되는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간 목적은 안디옥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끄는 일이 힘에 부쳤을 것이고, 또 이방인 사역에서는 바울의 재능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에 같이 일하자는 것입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울이 바나바를 따라 안디옥교회에 왔지만 바울의 과거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앞장을 서서 사람들에게 바울의 됨됨이를 소개하여 경계심을 풀 수 있도록 여러 모습으로 수고를 하였습니다. 바나바의 이런 결단으로 인해 초야에 묻혀 있던 바울이 나오게 되었고, 바나바의 이런 사랑의 인내심이 후일에 이탈자 마가도 다시 회복을 시켜 좋은 일꾼이 되게 하였습니다.

김삼일 믿음의 공동체에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절대 필요합니다. 섬기는 사람, 이웃을 위로하는 사람, 실수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낙심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3. 바나바는 더 좋은 일꾼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나바가 바울보다 믿음의 차원에서는 훨씬 앞서 있는 선배입니다. 연륜으로나 믿음으로 볼 때 더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고 있을 때 데려온 사람이 바나바이고 보면,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스승과도 같은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을 때에도 바나바와 바울 순으로 서열이 정하여졌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전도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맙니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전도 이후 선교 여행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조차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문구 속에 파묻히고 말았으며, 회당에서 설교를 할 때도 계속 바울이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보면 첫 선교지인 구브로에서는 바나바가 선교 일정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뀌고 난 이후 다음 선교지를 향할 때부터는 바나바의 선교 지휘권이 바울에게 넘어갔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음도 지휘권의 전환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왜 바나바의 지휘권이 바울에게 넘어 갔습니까? 바나바는 자신보다 바울이 앞장을 서서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그 위치를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도 이탈되지 않고 여전히 함께 일을 잘 협력하였습니다.

아주 폭넓은 믿음의 마음 아닙니까? 바나바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복음이 더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느냐? 누가 일함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이 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전파되느냐를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 신분을 사람들이 어떻게 인정하느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도와주고, 일을 정리해 주는 사람으로 족하였다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를 논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와 은사대로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이 싹터서 든든히 서 갑니다. 구약시대에 이런 비슷한 관계가 있는데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모세 밑에서 각 자 자기 지파를 대신하여 38년 간 일했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앞두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택하여 그의 지도력을 승계시킬 때 갈렙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갈렙에게도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갈등이 없잖아 있었을 것입니다. 전날에 모세를 섬길 때는 갈등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제는 자기의 상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같은 동료이며, 같이 일을 하던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나갈 때 자기의 위치를 여호수아 아래로 정하였습니다. 이후부터 갈렙의 이름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갈렙이 항상 숨어있는 자리를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언제나 여호수아가 지휘를 하였지만 실제는 뒤에 갈렙이 바치고 있었고, 그 갈렙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잘 치러 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 때문에 가나안 정착이 잘 이루어 진 것처럼, 우리의 공동체도 좋은 믿음의 벗으로 인해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폭 넓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남아프리카 잠비아 북부 고지에 인구 15만 명 정도의 바벰바(Babemba)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회에는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바벰바족에서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가운데 마침내 놀라운 이유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들 마을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나오면 그를 광장 한복판에 세웁니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둘러쌉니다. 그리고 돌아가며 각 자 한마디 씩 합니다. 비난이나 돌을 던지는 말이 아닌 그가 과거에 했던 미담, 감사, 선행, 장점의 말을 하는 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넌 원래 착한 사람이었어, 작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우리 집 지붕을 고쳐줬잖아 고마워, 너는 항상 친절하잖아, 이렇게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면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껴 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사람씩 다가가서 안아주고 진심으로 위로하며 용서해줍니다. 그렇게 칭찬이 끝나면 그가 새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는 축제를 벌이고 끝을 맺습니다.

 

교회에서는 더욱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앞세워 주는 양보의 미덕이 필요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 즉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배탈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각 버리고 병원으로 가면 됩니다.

, 유통기한 지난 사고력, 20세기 때의 지식은 오늘부터 내어 버리고, 21세기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즘은 컴퓨터 저장장치나 web에서는 3.0이 대세입니다. 그만큼 변화가 일어나고 빨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도 3.0 정부를 목표로 합니다. 정치도 3.0 시대에 진입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국회는 1.0 시대처럼 계속 시끄럽게 떠들고 있습니다. 국회가 원내 3당 체제로 이루어진 후 저마다 좋은 자리다툼만 하지 2인자가 되어 섬기겠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니 별 기대할 게 있습니까? 암울합니다.

 

성도들도 3.0 시대에 반응을 해야 합니다. 배탈은 나면 병원이나 약국에서 해결해 주지만 사고력에 탈이 나면 병원도 고치지 못합니다. 이 치료는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고에 이상이 와도 치료할 생각은 않고 세상 탓만 합니다.

시대는 계속 변하는데 나의 사고력은 계속 1.0에 멈추어져 있는 한 공동체는 무기력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믿음의 인품과 덕목으로 남을 인정하고 앞세워 주는 마음이 바로 3.0의 사고이며, 이 정신을 따라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