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스(미국 115분 1982.02.27)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의 1편으로 성경의 법궤(法櫃)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 군대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궤를 고고학자들의 정보에 의해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독일 군대가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 전쟁을 하면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고, 이 법궤를 주인공과 독일군이 서로 찾는 과정인데 인터넷을 검색하여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를 따라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힘의 상징으로서 이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십계명 두 돌비가 들어 있습니다(히 09:04).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후 언약궤, 증거궤로도 불리는 법궤를 실로의 성소에 모셔두었는데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 법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법궤가 블레셋에서 7개월 간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법궤로 인하여 블레셋 전역이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재앙을 견디다 못한 블레셋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되었고, 결국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 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은 사무엘이 최초로 이스라엘에게 공개적으로 회개를 촉구한 때까지의 기간일 뿐(삼상 07:03), 실제로 머문 기간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때까지 무려 70년간 입니다. 이에 다윗 왕은 나라가 안정(대상 11장)이 되자 우선 법궤를 모셔오는 일을 추진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복을 받는 사람, 화를 당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래서 『법궤를 모시고 복을 받은 오벧에돔』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다윗 왕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각 지파 별로 3만 명을(삼하 06:01) 선발하여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을 추진합니다. 3만 명의 수행원들을 동원한 것은 기럇여아림이 블레셋 영토와 거의 경계지역이었기 때문에 혹 있을지 모르는 적들의 기습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그만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07).
새 수레에 실었다. 는 말은 다윗이 법궤의 거룩성을 인식하고 행한 일로 보입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위반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에는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이 궤를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정하였기 때문입니다(민 07:09).
그럼에도 다윗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신상 옮기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동시에 이 잘못된 사실을 아비나답의 손자(삼하 06:03,04) 웃사와 아효는 왕의 명령을 따라 법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 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를 합니다. 엄숙하고 화려하고 기쁨이 넘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재앙, 파괴(기돈)라는 의미가 있는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들이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수레에 실은 법궤가 떨어지려합니다(09). 불길한 징조입니다.
이에 즉각 웃사가 손을 펴서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웃사의 행동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입니까?
법궤를 싣고 가는 소들이 날뛰므로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 할 때 법궤 운반 책임자 웃사가 손으로 잡은 행동이 잘못입니까? 상황적으로 볼 때 거룩한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것은 오히려 잘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웃사의 이런 행동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 됩니다. 왜냐하면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어떤 사람이라도 만지지 말고, 들여다보지 말 것을 엄히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민 04:15,20; 삼상 06:19). 따라서 웃사의 행동은 율법을 경시한 죄에 해당합니다. 또한 법궤는 고핫 자손 중 12명이 어깨에 메고 가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 간 것도 말씀을 무시하여 자기 생각에 맞춘 일입니다.
웃사의 행동과 하나님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신 일로 인해 더 이상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중단합니다(11). 그러자 다윗이 노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합니다. 여기 다윗의 노함은 웃사에게 징벌을 내리신 하나님께 대한 노함이 아닙니다.
12절에서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노함은 자신의 율법에 대한 무지, 웃사의 경거망동한 행동, 그리고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자각함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웃사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에 있어서 법궤를 싣기 위하여 새 수레를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의 앞이다 보니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스러운 일에 대한 책임 회피의 결과입니다.
2. 오벧에돔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법궤를 모셨습니다. |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 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니라.
법궤를 자기 집으로 옮겨 간 오벧에돔이 누구입니까? 레위의 둘째아들 고핫(출 06:16) 자손이고, 그 가운데 고라 자손에 속한 자로서 단 지파의 경계 가드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오벧에돔은 성소의 문지기로 뽑혀 성전의 일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수금을 잘 타서(대상 15:21) 찬양대를 도우는 사람입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께 봉사하며 살아온 집안에다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봉사하는 가문입니다(대상 26:04~08).
하나님을 노래와 악기로서 찬양하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하나님은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고 섬기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요 04:23). 앞서 웃사가 법궤를 만져 죽은 곳이 기돈 즉 파괴라는 타작마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타작마당은 법궤 출발지에서 동쪽으로 13Km 거리로 예루살렘 인근 목적지에 거의 근접한 곳입니다.
13절을 보면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고 나옵니다. 가드는 위치 면에서 보면 법궤 출발지 기럇여아림에서 서남쪽으로 20Km 거리입니다. 웃사가 죽은 타작마당과는 무려 33Km나 떨어진 곳으로서, 법궤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보다 더 먼 반대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사람들 그 누구도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법궤를 운반하다 웃사가 죽었을 때 다윗 왕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라며 부르짖었습니다.
12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그러자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오벧에돔이 죽을 각오로 법궤를 모시겠다고 나섰습니다. 자기의 집으로 법궤를 매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왜 이런 일을 합니까? 레위인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법궤 모시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스스로 나선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오벧에돔의 자원하는 그 믿음을 보고 기쁨으로 법궤 모셔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조금 전 웃사의 죽음의 현장을 보고도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나섰다면 이 오벧에돔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을만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의 시름을 들어주는 시원한 생수 같은 사람입니다. 현재 위기의 상황에서 다윗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오벧에돔을 믿고 법궤 모시기를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현장에서 궤를 집으로 모시고 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로 법궤를 이동하는 책임자 웃사가 현장에서 죽는 일을 본 후에 법궤를 모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평안할 때는 모실 수 있어도 위기의 상황에서는 모셔 오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자원하여 다윗 왕의 허락을 받고 하나님의 법궤를 집으로 메어 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 꺼려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이들의 인격은 돋보이고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진 후 3개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여러 갈레로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법궤가 하나님의 재앙을 불러 오는 것으로 보였지만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법궤로 인해 집안에 속한 모든 것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웃사는 죽음을 맞았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은 것입니까?
비록 본문에서 세세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사건의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져 주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소홀히 하여 어긴 웃사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10,11)가 이제 풀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법대로 법궤를 이동하지 못하여 웃사가 죽음을 당한 후에 오벧에돔은 자기의 집으로 법궤를 옮기면서 수레가 아닌 레위인의 어깨에 메어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진행하였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벧에돔은 법궤를 자기 집으로 옮겨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내려놓은 오벧에돔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습니다. 계속 말씀 드리지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신 것은, 이를 영적으로 적용을 한다면 하나님 자신을 모신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셨다면 당연히 복을 받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법궤로 인해 이미 많은 재앙이 일어났고, 웃사의 죽음까지도 가져 온 현장에서 법궤를 모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웃사의 죽음을 놓고 오벧에돔 자신도 잘못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벧에돔은 법궤를 모시기 위해 선뜻 자신의 집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으로 인해 그의 집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다양한 복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잘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에게 여덟 명의 아들을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대상 26:04 오벧에돔의 아들들은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셋째 요아와 넷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05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이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또한 오벧에돔의 직계 손들이 62명으로 번성하였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는 가문이 되었습니다(대상 26:04~08). 복 중의 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법궤를 모심으로 복 받는 일이 확실하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오벧에돔처럼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시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를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무조건 법궤가 있다고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법궤로 인해 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 반면, 법궤를 모신 것이 오히려 재앙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04장을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앞세웠다가 그만 법궤를 빼앗기고 죽음까지 당했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오벧에돔의 모든 소유에도 임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물질적인 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것입니다.
3개월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 그 복의 목록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당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그의 모든 소유물에서 확인되는 복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약시대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성도들 가정에 3개월 씩 돌려가면서 보관하여 복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법궤를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각 사람의 심령에 성령님의 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고전 06:19). 법궤 위의 속죄소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인격의 지성소에 법궤를 안치 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바로 성령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면 우리 역시 오벧에돔처럼 모든 것이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같은 법궤를 놓고 웃사는 저주의 죽음을 당했고, 오벧에돔은 엄청난 복을 받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70년이 넘도록 법궤를 모시고 있었음에도 마지막엔 그 아들 웃사가 복이 아닌 화를 입었습니다. 반면 오벧에돔은 불과 3개월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법궤를 놓고 모두 피하고 꺼릴 때 오벧에돔은 자원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 일에 자원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모두가 피하고 꺼려할 때 자원하는 사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법궤 안에 있는 내용물입니다. 십계명이 적힌 두 돌 판과, 하늘로서 내려진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언약의 두 돌 판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법궤는 신약 시대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구원이 있고, 예수님을 영접한 가정은 복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축복의 현장을 목격하고 다시 그 법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옮기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이 후에 큰 복을 받고 누리게 되었습니다(대상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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