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신령한 동거가 최고입니다(시 133:01~0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2. 2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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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노래를 살펴볼 때 몇 편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120편부터 134편까지 15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132(18)을 제외하면 대부분 짧은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03절에서 08절 사이입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이니 이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16:16) 때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133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를 지은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난 후부터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 함으로 10여 년의 세월을 도망자요 방랑자로 살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심으로 인해 길보아산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죽었습니다(삼상 31:06).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이 그만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민심을 업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권을 장악한 실세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세웠습니다(삼하 02:08~09). 이에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는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웠습니다(삼하 02:04).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보셋을 섬기던 신하 가운데 군권 실세 아브넬이 역심을 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2년 만에 이스보셋은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후부터 왕이 없는 군인 체제로 56개월쯤 지내다 남쪽 왕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바칩니다. 다윗이 이를 수락하므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76개월 동안 반목과 갈등으로 나누어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하는 과제를 안았습니다. 이에 다윗은 분열된 백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11 지파의 중심지는 북쪽 지방 마하나임이고, 유다 지파의 중심지는 남쪽 지방 헤브론입니다.

이 두 지역 중에 어느 한 곳을 수도로 정하면 수도와 거리가 먼 쪽에서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3의 지역 예루살렘을 지목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고 옮기니 서로를 향한 갈등과 미움이 사라졌습니다. 웃음과 화목이 왔습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오늘 제목을 신령한 동거가 최고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신령한 연합과 동거가 최고입니다.

 

0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01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형제의 연합을 놓고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감탄합니다. 여기 형제가 누구입니까? 133편 표제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보아 같은 믿음으로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이때 성전에서 만난 사람들, 각기 다른 곳에서 왔을지라도 그들은 일주일 정도의 교제 속에서 찬양과 말씀을 나누고 배움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믿음의 형제가 함께하는 모임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연합과 동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비슷한 말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יַחַד 야하드)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공통분모 하나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형제가 동거(יָשַׁב 야샤브)함이. 무엇입니까? 부부처럼 특수한 관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믿음 안에서 더욱 밀착되어 지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 올리러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무리가 질서를 이루고 성전에서 친밀하게 교제함을 최고의 일로 여겼습니다.

이때는 그 화려한 성전이 지어져 있는 때가 아닙니다. 아들 솔로몬 시대에 가서 화려한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령한 관점으로 이 일을 내다봅니다. 지금 자기의 눈에 보이는 장막이 훗날 아름답게 지어질 화려한 성전으로 보이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외적으로 초라해 보여도(삼하 07:02) 성도가 함께 모여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내다보니 신령한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김삼일 가족도 사회에서 여러 모임을 합니다. 교회에서의 여러 형태의 신령한 모임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일과 교회의 일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의 일과 신령한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하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일을 만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힘들고, 바쁘고, 피곤해도 그 모임이 성도의 모임이고, 예배의 모임이고, 신령한 모임이라면 사모하십시오. 복 중의 복입니다.

 

신령한 세계에 관한 일을 우선으로 삼자는 말입니다. 나는 교회 생활에서 과연 연합과 동거가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집니까?

나 때문에 신령한 모임이 잘 유지가 됩니까? 모였다 하면 나 때문에 다음 모임의 균열이 예측되고 그다음 모임이 되면 해체되는 일의 주인공은 아닙니까?

왜 행복한 모임이 잘되지 않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성전 중심으로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투 때문입니다. 나만을 챙기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거 하나 잘 기억하십시오. 연합이란 머리로 동의하고 감정이 하나임을 느끼는 일입니다. 동거는 실제로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성도가 상대를 배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야말로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복중의 복입니다. 이 일에 내가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엡 0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 신령한 연합과 동거는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0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01절에서 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하는 신령한 모임을 제사장의 임직식에 사용하는 감람유에 비유합니다. 국어문법으로는 이런 형태를 직유법(直喩法)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연결어로 결합하여 직접 비유하는 수사법 말입니다.

머리에 부어져 있는 기름은 어떤 기름을 말합니까? 기름의 본래 성분은 감람유입니다. 주로 성전의 불을 밝히기 위해 사용합니다(24:02).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임직할 때 머리에 붓는 기름입니다. 이를 거룩한 기름이라 합니다그러면 이 기름을 제사장의 임직식에 사용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제사장에게 어떤 식으로 부었습니까? 이를 제사장의 정결 몇 규례(30:23~25, 21:05, 06)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출 29:07 관유[灌油]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

 

고대 애굽의 제사장들은 가까운 친척이 상()을 당하면 애통의 표현으로 머리를 삭발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의 풍속이 이스라엘에 무분별하게 도입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손상을 가져오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러자 율법은 이스라엘의 법도와 사회 규범(19:27)과 제사장의 정결 규례를(21:07) 제정하였습니다. 함부로 머리카락이나 수염 깎는 일을 하지 않는 법규를 정하였습니다. 일반인의 머리카락 깎는 법, 수염 깎는 법도 나옵니다(19~21).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종교문화를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기 위한 법입니다. 종교의 혼합주의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막기 위한 법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깎는 일을 금지하였습니다(21:05). 따라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생활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제사장은 평생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깎지 않는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칼을 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기르다 보니 보기 흉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때는 가볍게 다듬는 정도는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머리카락이나 수염은 일반인보다 더 길었고 이런 모습을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이런 제사장에게는 특별한 의식을 행할 때 감람유를 머리에 듬뿍 부어줍니다. 그러면 머리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까지 흐르고 옷깃을 적십니다.

제사장의 수염을 아론의 수염이라고 합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인 형님입니다. 광야 시절 모세와 동행한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가 몇백 년이 된 인물인데 다윗이 그의 이름을 등장시킵니까? 아론이 살아서 왔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아론은 제사장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흉배(胸背)가 있습니다그 위로 향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는 상태를 모든 백성에게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복이 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까?

이 거룩한 은혜와 복이 여러 곳으로 가득히 전파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의 연합과 동거로 인한 믿음의 향기가 가득히 흘러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이 기름 부음의 복이 부모님에게서 자녀들과 후손들의 가정에 가득히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이 기름 부음의 복이 여러분의 사업장이나 생업의 터전 위에 가득히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대제사장의 머리에서부터 수염을 거쳐 옷깃까지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크나큰 기쁨입니다. 순례자들은 대제사장의 그런 모습만 보아도 은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3. 신령한 연합과 동거의 일은 나의 몫입니다.

 

0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은 이스라엘 북쪽에서 바라보는 레바논산맥 최고봉(2,814m)입니다.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3개국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산 아래의 눈이 조금 녹으면 이내 다시 눈이 옵니다. 그래서 영원히 눈이 덮여 있어서 만년설이라 부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기후가 특이한 것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6개월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이고 6개월은 비가 오는 우기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곳이구나. 하고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초목들이 건기 동안 말라 죽지 않고 잘 견디어 냅니다.

이유는 만년설에서 녹아내린 물과 지중해의 습한 바람 때문입니다. 이 물과 습한 바람이 헐몬산의 찬 공기와 부딪혀 이슬이 생기면서 땅속으로 흘러내려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갈릴리 호수에서는 민물고기를 길러냅니다. 어부들의 생계 터전이 됩니다. 거기서 잡힌 고기들은 이스라엘 국민의 식탁을 기름지게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은 요단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그 물에서 사람들이 물놀이하고 유일한 농업용수와 식수의 근원이 형성됩니다. 이 생명의 젖줄 요단강 줄기는 이스라엘 국토의 중앙으로 흐르다가 마지막에는 사해 바다로 들어갑니다.

 

헐몬산에서 시작한 이슬의 양이 넘칠 만큼 풍성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내리면 모든 생물은 이슬을 머금고 자랍니다. 풀이 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물이 있는 헐몬산을 바라만 보아도 시원함을 느낍니다.

만일 헐몬산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광야는 생명이 보존될 수 없는 사막이 되고 맙니다. 헐몬산이야말로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젖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라는 말은 헐몬산의 눈이 녹아내려서 온 땅을 적셔주는 일종의 시적(詩的) 표현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거기가 어디입니까?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라고 하였으니 거기는 시온을 말합니다.

또한 133편의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아닙니까? 성전에서 신령한 연합과 동거를 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02, 03절입니다. 그러므로 본편의 저자 다윗이 깨달은 거기는 바로 성전이요 오늘날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연합과 동거를 이루어 주님을 섬기는 김해삼일교회에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모든 복과 모든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5, 10년 정도 가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영생에까지 이르는 복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가정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사업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직장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2016년은 여러분에게 크게 은혜가 되고 성전에서 넘치는 복을 누리는 간증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일을 이루는 일을 나에게 맡겨 주셨음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에 흉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가니까 임금님이 대신들에게 어떻게 벌을 주어야 백성들이 무서워 죄를 덜 짓게 될 것인지 연구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는데 그중에 제일 훌륭한 결정이 나왔습니다.

죄인을 사람이 없는 곳에 보내서 혼자 살다가 죽게 하라. 그래서 생긴 제도가 귀양살이입니다. 사람에게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가야 합니다. 일반 사람과는 못 만나도록 격리되어 살아야 합니다그 중에도 공범자나 중죄인은 독방에 가둡니다. 연합과 동거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는 고독, 소외 이것이 제일 두렵고 무섭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사랑할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도 성도를 무조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 있는 성도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상대를,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하는 것은 조건적 사랑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조건이 달라지면 그 순간에 미움으로 바뀝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령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내 마음에는 맞지 않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옆에 분들에게 진심으로 인사합시다.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 이 사랑으로, 이 연합으로, 이 동거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