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좀 시끄러울 때는 가끔 십상시(十常侍)의 횡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중국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 10명을 이르는 말입니다. 장양(張讓), 조충(趙忠),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남(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리(韓悝) 등 10인은 168년 영제가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자 곁에 붙어 온갖 전횡과 농간을 부려 한나라를 멸망하게 하였습니다.
십상시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진 영제는 주색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자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입니다. 영제는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십상시를 모두 열후(列侯)에 봉하였고, 이때부터 더욱 교만해진 십상시는 멋대로 황제의 칙명까지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궁궐에서는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이때 원소와 조조(曺操)가 대궐로 들어가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을 모두 죽여 십상시의 전횡이 끝났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나라가 붕괴되고 조조 등이 각자 나라를 세우고 패권다툼을 하였는데 이처럼 십상시는 나라를 말아먹는 간신의 상징어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 거주하여서는 안 될 한 사람이 거주하면서 권세를 휘두르며 성전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십상시처럼 말입니다. 제사장과 결탁을 한 도비야라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이 도비야를 성전에서 쫒아내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면서 느헤미야가 나서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말씀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신령한 공동체를 위하여 불신앙적 요소를 제거하였습니다. |
01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스라엘의 믿음의 부흥을 주도하는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한 유대인의 후손입니다. 이후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페르시아 제국 아닥사스다 왕의 시대에 술 맡은 관원장의 위치에 오른 사람입니다. 대단한 권세자입니다.
이 느헤미야가 총독의 직책으로 고국 이스라엘에 와서 12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고 기강을 잡은 후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신앙의 혼돈과 타락을 겪으면서 다시 느헤미야를 이스라엘의 번영과 종교개혁을 위하여 초청하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 그는 백성들 앞에서 혼돈과 무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성전 앞에 모여서 말씀의 회복 사역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의 심령대부흥회 강사는 학사 에스라로서 에스라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회개와 자복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몇 가지를 맹세합니다.
①이방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며, ②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킬 것이며, ③철저하게 헌금 생활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결단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행복이 찾아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행복을 회복하고 싶습니까? 진정한 복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돈을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명예도, 인기도, 권력도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잠깐 지나가는 헛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삶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낙심한 영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눅 24:13~33). 그러면 말씀을 회복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선 경건을 해치는 요소들 즉 불신앙적인 요소들부터 제거하는 일입니다. 0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0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섞인 무리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비롯한 일부 잡족들로서, 이스라엘에 머물면서 성전 의식에 참여하여 이스라엘 사람 행세를 하였던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한 채 이방 악습을 끌어들여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 회복운동 앞에서 자신들의 허물을 돌아보고 잘 못된 부분들을 정리하라고 주문하자 실천에 옮겼습니다.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쉽지 않은 일임에도 사사로운 사람의 정을 접어놓고 강제적으로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일을 감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신 23:03)이라 하였음에도 사람의 정 때문에 끌어들인 과오가 있었는데 이제 이 일을 과감히 정리한 것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분리하는 것은 인종적인 편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속적인 영향, 바로 불신앙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쫓아내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면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어도 단호히 내어 보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에 새기고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철따라 열매를 맺는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사는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시 01:01~03).
성도 여러분도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으로 안내할 것이며, 영원토록 그 행복을 지켜주는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2. 신령한 공동체를 위하여 성전 청결작업을 하였습니다. |
0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성전에 있는 방은 아무나 거처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도비야라는 사람이 성전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도대체 이 도비야가 누구입니까? 느 02:10절에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그의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라고 나옵니다.
호론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던 지역으로서 이곳 총독이 산발랏이고,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서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입니다(느 06:17,18). 이들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위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에게 온갖 저주와 방해와 공격과 여론을 악화시킨 암적 존재입니다. 이 도비야에 대해 두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느 04:0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0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암적 존재 같은 사람 몇을 놓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도비야와 산발랏과 나를 두렵게 한 자들의 악행을 기억하옵소서(느 06:14). 이런 사람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결탁하여 성전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부패가 되어도 이 정도의 부패까지 진행되었으니 이게 보통 일입니까? 심각한 일입니다. 마침내 느헤미야가 심형부흥회를 열고 성전 청결작업을 위한 개혁의 강공 드라이브를 펼칩니다.
0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대제사장의 허락 아래서 여러 개의 곳간을 헐어 하나의 큰 방으로 개조하여 도비야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는 뜻입니다. 본래 그 곳간들은 중요한 방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기구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레위인과 노래하는 자들을 위해 양식을 쌓아두는 창고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물건들을 저장했던 곳을 느헤미야를 암살하려 했고,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해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는데 앞장을 선 도비야에게 주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도비야가 아무리 간계를 쓰서 대제사장과 결탁하여 특혜를 요청한다 할지라도 그는 이방인 암몬 족속입니다. 이스라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전 안에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진노를 내릴 만한 사건 아닙니까?
이 모두가 대제사장의 부패와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결과입니다. 뇌물 때문에 들여서는 안 될 도비야를 오히려 전까지 끌어들였고, 이스라엘의 대적 산발랏의 딸과 그의 손자를 혼인까지 시켰습니다(느 13:28). 이런 이스라엘의 신앙 혼탁을 놓고 느헤미야가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면서도 느헤미야가 근심을 합니다. 도비야와 대제사장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축출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덮어두고 갈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 강력한 성전 청결작업을 하였으며, 마지막엔 대제사장까지도 과감하게 축출했습니다(28,29). 예수님도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신 일이 있었습니다(막 11:15~17).
3. 신령한 공동체를 위하여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
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성수 맹세를 불과 일 년 만에 무너뜨렸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 믿음 줄도 여지없이 풀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성일을 훼손하는 일, 성일에 상거래를 하는 일은 오히려 지도층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귀인들을 막 꾸짖습니다(17).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결과로 인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 당한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18).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으로 멸망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렘 17:27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 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단호히 책망을 하였고, 또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면서 우리가 바로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는데 이때부터 믿음은 건강하게 회복되어 갑니다(사 58:14)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의 안식일 제도는 무척 엄격하였고 지키는 방법들도 다양하였습니다. 안식에는 밥도 짓지 말아야 하고, 불도 켜지 말아야 하고, 2키로 미터 이상 걷지도 말아야 하고, 일은 어떤 일이든지 간에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지킵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기본 정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아무 일도 안하면서 가만히 노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원리는 문자적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오락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그 뜻대로 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19절~22절 사이를 보면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한 대책으로 우선 상거래를 하는 어떤 짐이든지 성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명합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식일 지키는 일을 위하여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 세속적인 모습들을 차단시켜 나갑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내 세속적인 마음으로 또 돌아가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성일 지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출 20: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느헤미야가 이렇게 안식일 지키는 일에 올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안일이나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어서 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세상적인 이권을 위한 일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척박한 이스라엘에 올 필요 없이 페르시아의 수산 왕궁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출세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그저 하나님의 일이 하고 싶어서, 조국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서 다 내려놓고 위험한 자리에 찾아 온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느헤미야는 도비야로 인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회복시키면서 본래의 목적을 따라 성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복구하였습니다(09).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습니까? 참 된 성전은 우리의 몸입니다. 바로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03:16, 06:19). 내 속에 도비야와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도비야와 같은 원수에게 성전의 방을 내어줘서는 절대 안 되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도비야와 같은 악한 요소를 허용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을 내어 쫓고 난 이후, 회개를 통하여 정결하게 하고 성령님의 은혜를 심령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혼돈과 영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삶의 원칙, 믿음의 원칙들을 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경건 생활을 위하여 영적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며, 나는 경건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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