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5년 말씀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십시오.(유 01:20~2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5. 10. 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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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48일 오전 640분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 지상 5, 15개동 규모로 지어진 와우아파트의 한 동이 폭삭 내려앉았습니다. 서울시가 전시 효과를 위해 야심차게 지은 아파트로서 19691226일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준공 3개월을 겨우 넘기고는 대형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이 사고로 집 안에 머무르던 15가구 주민 70여 명 중 33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다쳤으며, 또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경사진 아래 판자촌을 덮쳐 주민 1명도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고가 피해 규모도 컸지만 아파트 준공 3개월을 겨우 넘긴 후 일어난 사고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건축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 사고는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6개월 만에 준공 된 부실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전문가들이 세밀하게 살펴 본 결과 먼저 건설업자가 무면허 자 이었습니다. 거기다 아파트가 70도 경사의 산비탈에 세워지는데도 철근을 거의 줄였습니다이 아파트는 기둥 하나에 19철근이 70개씩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규정에 훨씬 미달하는 5개 정도만 넣었습니다. 이 정도면 무너지라고 하는 공사 아닙니까? 또 콘크리트 배합비율도 시멘트를 업자들이 이리 저리 다 떼어먹고 넣는 시늉만 내면서 공사비용을 줄였습니다.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45월에는 북한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에서 93세대가 거주하는 23층 아파트가 붕괴되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대형 참사의 원인도 부실공사 때문입니다간부들이 부분별로 중간 중간 물품을 떼어 먹다 보니 철근을 제대로 넣을 수가 없었고, 콘크리트 품질도 형편없이 낮게 되어서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초가 튼튼할 수 없는 의도적인 부실공사였다는 결론입니다.

 

우리 인생의 집, 믿음의 집도 말씀의 설계도대로 따르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여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지에 대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십시오.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견고한 건축물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설계, 시공, 관리입니다. 특히 기초 설계가 잘되어야 좋은 건축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영적 기초가 든든하지 않고서는 영적 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조건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영적 기초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의 설계도를 따라 자기를 세우는 일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꾼의 기본 조건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거룩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까?

 

세상의 것들과는 구분이 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위에 세워진 믿음(17)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집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거처하는 육신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도 먼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기초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믿음의 영향을 끼치려면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려면 특별한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표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매 주일 예배 때 고백하는 사도신경입니다.

 

우리가 오전예배 때는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경건한 지도자들이 성경을 세밀하게 살펴서 사도들의 전하였던 내용들을 압축하여(5세기경) 신조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은 사도신경으로 자기를 점검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사도신경의 지도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원리를 반석 위에 세운 집의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0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이렇게 반석 위에 세운 건축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건축을 할 때 든든하게 세우기를 원하지, 부실 공사를 하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자칫 안일한 생각으로 공사를 하면 부실 공사가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질구조 즉 토질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토질이 거의 모래로 되어 있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석층이 형성되어 단단한 바위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좀 든든해 보인다고 기초를 대강대강 하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단단한 바위려니 여기고 기초를 소홀히 하였다가 무너지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면 기초부분이 물에 다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떠내려 갈 것이고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런 일들을 염두에 둔 예수님은 미련한 사람은 모래 위에 건축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인생의 기초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야 합니다. 좀 힘들어도 반드시 그렇게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너지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믿음 위에, 말씀 위에 자기를 건축한다면 주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지시고, 말씀의 나침반으로 인도 해 주실 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줄 믿고 자기를 믿음 위에 세우는 일을 잘 하여야 합니다.

 

 

 

 2. 믿음 위에 세웠으면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말씀의 바탕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이와 함께 믿음으로 지은 집을 잘 지키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21절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서 저자가 자신을 지키며 라는 말씀을 하게 된 배경과 본서가 기록 될 당시의 영적 상황들이 어떠한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열 두 제자들이 거의 세상을 뜰 무렵쯤에 교회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 악한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세속주의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세상 방법을 따라 믿고, 세상의 향락이나 유혹에 빠져서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갈 곳 다 가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세속주의는 국가도 무너뜨리고, 교회도 무너뜨립니다. 거기 빠지면 헤어날 장사가 없고, 누구라도 침몰을 합니다. 어떤 집안이라도 붕괴됩니다.

 

둘째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란 영은 선하고 육(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 사상입니다. 그들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도 부인하였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육체는 아무렇게 향락에 던져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니 믿음이 없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편하고 즐겁겠습니까? 결국은 성도들은 방종한 생활에 빠져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사상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물든 자들과는 가까이 하지 말 것, 교류하지 말 것, 집안에 들이지 말 것을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다고 사탄의 사상들이 활동을 중단하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이단의 사상들이 교회에 숨어 들어와서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고 교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18절을 보면 당시 일부 성도들이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면서 세상과 구분 없이 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 두 가지 사상, 즉 세속주의와 영지주의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하였습니다. 본서의 저자 유다는 유다서라는 성경 한 장을 기록하였습니다. 한 장이면 너무 짧지 않습니까? 그러나 짧은 한 장일지라도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 주제를 보면 이 사람들은(10, 16, 19) 어떠어떠하니 조심해라 가까이 가지 마라. 등 이단에 대한 특별 경계문입니다. 21절을 다시 봅시다. 자신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었고, 그 사랑으로 죄 사함을 얻었고, 그 사랑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았으니 그 사랑의 울타리를 잘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판단하고, 행하라는 경계문입니다. 나아가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나가면 결국은 승리할 수 있다는 용기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0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성도,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 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잘 관리하고 지켜 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세속주의와 이단의 세력들로부터 자신을 잘 지켜 나가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잘 가꾸고 지키는 것은 사명입니다.

 

 

 

 3. 믿음 위에 세워진 자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본서가 기록 될 당시는 각 교회들마다 세속주의와 영지주의가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때라고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만이 바로 믿고 바로 전하는 진리의 파수꾼이라고 외치면서 선량한 성도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심하는 사람도, 실족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다 지도자를 잘 못 만남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에 유다는 교회 측에다 특별한 요청을 합니다. 도덕 폐기론에 미혹되어 믿음 위에 굳게 서지 못한 사람들, 믿음의 혼란을 겪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말입니다. 그들도 다 거짓 교사들이 흔들어서 믿음이 약해졌고, 의심이 생겼기 때문에 적대시 할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긍휼(矜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인간관계를 가장 잘 풀어가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상대방의 눈높이로 다가가는 긍휼입니다. 이 긍휼로 상대방을 얻을 수 있고, 생명도 구원 할 수 있습니다. 성도 간에 이 긍휼의 마음으로 맺어질 때 교회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05: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도 여러분, 각자 거룩한 믿음의 집을 지었습니까? 영적 기초가 든든한 믿음의 집을 지었습니까? 믿음으로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내 믿음도 중요하지만 약한 자를 돌아보고 챙기는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긍휼의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에 따뜻하게 전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도 내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품지 못하고서야 어찌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외식하는 자 일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지 못함으로 늘 정죄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화 있을 진저, 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혹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긍휼을 가진 것은 아닙니까?

 

한 장소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꿋꿋이 붕어빵 장사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붕어빵 장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분의 가게 앞에 이런 가격표를 붙여 놓았습니다. 붕어빵 3개에 1000, 1개에 300, 가격이 좀 이상하지요. 31000원이면 1개당 333, 일반적으로 한 개 사면 400원 정도 해야 하는데 300원이라니 이상한 계산법 아닙니까? 많이 사는 사람에게 덤으로 얹어주던지, 아니면 가격을 낮게 매기는 것이 통상적인 계산법입니다.

알고 보니 여기에는 작은 긍휼이 마음이 있어서 입니다. 붕어빵을 여유 있게 천 원에 3개 사서 먹는 사람보다는 돈이 없어 한 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을 위해 한 개의 가격을 조금 더 낮게 잡은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이런 작은 배려지만 이것이 진정한 긍휼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이런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까?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믿음의 집을 잘 지은 사람이 가져야 할 긍휼의 행동반경입니다. 내 믿음의 집을 다 지었다고 두 손을 놓고 편히 쉴 때가 아닙니다. 교회 안의 약한 자들, 한 자리에 앉기도 싫은 사람들이라도 마귀의 영역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다면 그때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서 이끌어 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잘 안 되어 있어서 믿음의 집을 잘 못 세웠으면 외적으로는 근엄한 성도처럼 보여도 이내 낙심의 걸림돌을 만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집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서를 기록한 사람은 성경의 이름을 딴 유다입니다.

여기서 유다가 누구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명이인이 많습니다. 유다도 여럿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열두 제자 중의 유다, 가룟유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로 받아들입니다.

이 유다가 예수님의 승천 후에 형 야고보와 함께 믿게 되었습니다. 좀 늦게 믿었고, 좀 늦게 믿음의 집을 지었지만 그 믿음의 집을 잘 관리를 함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성경까지 기록을 하는 복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 위에 믿음의 집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지금부터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면 됩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의 상급을 잘 준비하면서 믿음생활을 하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새 출발을 합시다. 믿음 위에 자기를 잘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전 0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