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속담에 거북이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지 않고 믿음생활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거북이의 두 가지 특징 때문에 생겼습니다. 첫째 특징은 거북이는 오랜 기간을 먹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식음을 전폐할 경우 일주일 정도를 살 수 있고, 몸집이 작은 새는 10일 정도를 살고, 강아지는 20일을 살 수 있는데 거북이는 500일 정도를 산다고 합니다.
둘째 특징은 거북이의 강력한 목 힘입니다. 이 목 힘은 워낙 강해서 한 번 등껍질 사이로 집어넣으면 아무리 힘이 강한 사람도 꺼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 불을 피워 조금만 따뜻하게 해주면 몇 분 되지 않아 금세 목을 빼고 맙니다.
거북이의 이런 특징은 교회에는 다니지만 믿음생활을 교양 정도로 여기는 무늰 신자를 비유한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겨 거의 등지다시피 살아가는 내 모습으로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먹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를 권면하려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경건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강론하려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경건생활, 말씀생활 합시다. 정했습니다.
1. 성전에서는 발을 삼가야 합니다. |
0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 지어다.…
솔로몬이 말하는 하나님의 집이란 성전에 대한 비유입니다. 성전으로 비유 된 하나님의 집을 또 요즈음 용어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01절 말씀을 보아 솔로몬은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경건미와 조심성이 없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집 성전에 나올 때는 절실한 마음, 준비된 마음으로 나와야 함에도 시장에 장보러 가듯이, 놀이터에 놀러 가듯이 준비되지 않는 마음으로 막 드나들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부주의하고 경거망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신중하고 거룩하게 행하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라고 명합니다.
솔로몬이 이 말을 기록할 때는 나름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있어서 기록한 것 같습니다. 01절 마지막 부분이 증명을 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서의 삶과 정신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합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하나님의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하 0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성전에 나와서 기도 할 수 있고, 성도의 신령한 모임을 가질 수 있지만 옛날 그때의 정신이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거룩성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올 때, 그리고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자세로 입합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귀한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요즘 교회들은 너무 편리를 추구한 나머지 신앙생활도 편리 위주로, 예배당 분위기도 편하고 자유롭게, 예배 분위기도 편리 위주로 흘러갑니다. 이런 것들이 꼭 잘못 되었다고 말하기 보다 세상의 편안함을 너무 따르다보면 교회나, 예배를 가볍고 소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나 하나님 앞에 예배로 모일 때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 겸손한 모습으로 임해야 함을 명하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면서도 교회에 올 때 옷차림이나 외모를 좀 경망스럽게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너무 노출이 심한 복장, 너무 편한 복장으로 오기도 하는데 교회에 올 때는 가능하면 최선의 예의를 갖추는 복장으로 합시다. 내 모습에 경건미도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4,50년 전에 비해 지금은 교회에서의 예배생활, 성도의 모임에 있어서 경건미가 확실히 떨어진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예배당을 한 번 볼까요? 옛날에는 신을 다 벗고 들어갔습니다. 강단에 올라갈 때는 당연히 신을 벗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삼가는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거나 발을 씻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런 뜻으로만 좁게 해석하기보다 더 넓게 해석해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는 발뿐 아니라 마음도 삼가고, 자세도 삼가야 하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
01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영혼의 양식이고 우리의 삶의 나침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 것과 비교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매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 즉 제사입니다. 여러분 성전에서의 제사가 무엇입니까? 그 옛날 율법시대 때 짐승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수고로운 행위, 비용이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말씀 듣는 것과 우매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을 왜 비교합니까? 제물이면 다 되는 것이지 또 다른 무엇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까? 제물이라는 외적 형식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영적 의미이고, 이 영적 의미를 몸으로 눈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제사의 제물입니다.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크고 중요한 죄를 지었을 때는 소를 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소를 잡는 일이 보통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잡은 소를 각을 떠서 불에 태우는 일은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 일입니다.
제사란 드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에게 사람의 죄를 전가하는 일입니다. 죄는 결국 죽음이기 때문에 죄를 대신해서 짐승이 죽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드리지만 결국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이야말로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입는 방법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우매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이란 무슨 뜻입니까? 제사는 열심히 드리면서 그 제물 속에 들어 있는 영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드리는 제물을 말합니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0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솔로몬은 제물의 의미도 모르고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합니다. 제물은 많이 드리고, 짐승의 피는 강같이 흐르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도다. 이런 식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대하여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0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이 점점 세속화 되면서 급기야 자신들의 삶이야 어찌되었던 성전에 나가 제물만 드리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치 불교인들이 이름을 절에 올렸으니 가끔 시주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의식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제물만 드리는 자라면 그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매한 자와 같습니다.
이제 01절 말씀의 영적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 드리는 통로가 예배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롬 12:01). 구약시대 제사는 제물 중심이지만 신약시대 예배는 말씀 중심입니다. 제사나 예배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습니다.
말씀 듣는 일을 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리아가 열심히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0:42). 우리 다같이 말씀을 잘 듣기 위한 준비를 합시다. 목회자가 최고의 준비를 하여 전하듯 듣는 분도 설교자의 준비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준비, 몸의 준비를 잘 하여야 합니다.
3. 덕이 되지 않는 말은 가능하면 하지 하십시오. |
0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이 하나님 앞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어느 곳이든지 다 계십니다만 일단 문맥이 흐름으로 보아 성전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성전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는 이 두 가지가 다 충고형의 명령입니다.
결국은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라는 뜻입니다.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만 나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주로 어느 때 말을 많이 합니까? 편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만만하게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만만하고 편하면 당연히 말이 많아지지만 그러나 어려운 분, 나보다 지체가 높다고 여겨지는 분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고 줄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 교회에 오면 어떻습니까? 말을 잘 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믿음의 절제를 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는 편입니까?
믿음의 사람은 입을 잘 간수하여서 말을 해야 할 때는 분명히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말에 대한 신중성을 가지고 덕이 되는 말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내 뱉은 것으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 같이, 사람도 그의 말하는 대로 환경이 조성되어 복된 삶을 살기도 하고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가장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가 사람 아닙니까?
똑똑함이 없는데도 스스로 자가 발전을 하여 자기를 크게 부각을 시킵니다. 중요한 건 교회에서 말을 좀 줄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말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능하면 교회에서는 말을 줄이는 게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웬만하면 참아서 반으로 줄이고, 내 주장도 가능하면 줄이고, 내 고집은 확실히 줄여야 합니다.
또 영양가 없는 말은 더욱 절제하여야 합니다. 말이란 서로 공감대를 이루어야지 상대방은 의미도 모르는데 혼자만의 생각으로 말을 무질서하게 하면 좀 곤란합니다. 특히 직업에 관한 말이나 현재 나의 알바의 말은 상대가 묻지 않으면 일절 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런 말이 중요할지 몰라도 상대방은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전도 이야기, 기도 이야기, 찬양 이야기 등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상대방이 듣지도 않는 말을 스스로 흥이 나서 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인격 수준을 폭로하는 말밖에 더 되겠습니까?
벧전 0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옛 말에 빈 깡통이 더 요란스럽다고 했는데 영적 수준이 떨어질수록 불필요한 말을 더 많이 한다고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적인 이야기, 남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절제합니다.
다윗의 고백이 참 좋습니다.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입에 재갈을 먹인다고(시 39:01) 하였습니다. 악인 앞에서 침묵하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이 하게 되고 또 남을 해치기도 쉽습니다. 성도의 말은 영감으로 하나님을 위해 주신 영적인 칼이라고 생각하시고 말 좀 적게 하고 삽시다.
중국 속담에 복은 입을 따라 들어오고 화는 입을 따라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말을 어떻게 하고 삽니까? 복을 들어오게 합니까? 화를 불러들입니까? 인터넷에서 여러 활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E-mail로 소식을 받아보게 됩니다.
하루에도 필요 없는 메일이 수 없이 날아옵니다. 이런 메일을 스팸(쓰레기)메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짜증나는 쓰레기 메일은 아시겠지만 거의가 읽지도 않고 그냥 지워버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공동체에서 하는 말이 상대에게 이렇게 짜증을 유발하는 말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내려놓음의 끝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포기는 할 수 없다고 멈추는 것이고, 내려놓음은 할 수 있지만 비우는 마음으로 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멈추는 것입니다. 포기는 아쉬운 결정이고, 내려놓음은 깊은 성찰인 것입니다.
경건한 믿음생활을 위해서 이제 세상적인 말을 내려놓고 삽시다. 지금은 경건생활을 위한 절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갈 때입니다.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쓸 돈이 없고, 죽을 때는 결국 다 쓰지 못하고 죽습니다. 우리의 좋은 말도 아끼고 아껴서 남겨 놓으면 뭐합니까? 지금 열심히 해야지 마지막 때는 입이 닫히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도 등한히 여기다 시간이 지나면 듣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 말씀과 동행하지 못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면 어떤지 아십니까? 목사가 심방을 가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영적 대화가 안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려야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려 해도 영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믿음생활, 말씀을 듣는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한번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헌금을 드렸다고 다 됐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성도의 기본인 예배 참석, 헌금 드림, 찬송과 기도 이건 조금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길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삶이 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삶,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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