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오픈도어 선교회는 2015년 1월 7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기독교 박해 순위를 발표하였습니다. 정밀 조사를 통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얼마만큼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지를 조사한 순위입니다. 북한이 13년째 1위로 선정되었습니다.
기독교 박해 순위 상위 10개 국가를 보면 북한 다음으로 2위부터 10위까지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들인 소말리아,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수단, 이란, 파키스탄,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순입니다. 이중 수단,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는 작년에 비교해 새롭게 10위권에 포함됐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가장 심한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집회로 모일 때마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예수님의 전사들 수칙이라는 고백을 한다고 합니다.
①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대받게 되어있다.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겪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②칭찬받는 것보다 욕먹는 것을 먼저 배워라. ③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인민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서로 눈물을 닦아 주며, 주위의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④사랑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예수님의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 ⑤성경이라는 잣대로 자기가 먼저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에 관한 팔 복 중에서 이 마지막 말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팔 복을 보면 앞서 일곱 가지 말씀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할 것임이요. 라는 삼인칭 형식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팔 복을 말씀하시고는 곧 이인칭 형식으로 바꾸어 보다 길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팔 복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렇게 마음 다스림의 문제에서 시작한 팔 복이 이제 외적 육신의 문제에 고통을 받는 데까지 왔습니다.
육신이 박해받는 일도 복을 받습니까? 예, 받습니다. 이 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딱 한 가지 조건의 박해를 받은 자로 제한하십니다. 의를 위해서입니다.
의를 위한 박해를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는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받은 박해를 말합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의라는 말을 나라는 예수님 자신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받는 박해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면 의를 위한 박해, 교회를 위한 박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으로 살려 하고, 말씀대로 살려 하고, 특별히 계명을 잘 지키며 살려는 일에 대한 모든 고난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박해(διώκω)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고난도 이에 해당합니다. 주일 성수를 위해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절함으로 오는 고통이 이에 해당합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를 당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사회에서 경제의 제재를 받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 주님을 위한 진정한 고난은 강제이기보다 자원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피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일부러 고난 앞으로 나가는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전하실 때의 상황이나 승천하신 후의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이 말씀을 적용해 봅시다. 심히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1세기 때 로마제국의 정치 상황에서 이 말씀을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성도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당장 우상의 제물과 우상 앞에 머리 숙이는 일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공적인 축하 행사들과 성전에서 행하는 행사들이 거의 이교도 신들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진실한 성도들은 식사 모임을 일체 거절해야 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직업도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도들은 노예들을 그들의 형제로 여기고 대우한 데 비해 로마제국은 노예제도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때문에, 노예들을 무자비하게 부렸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은 성도들에 대하여 로마의 노예제도를 허무는 항의로 인식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사회라는 거대 세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약자의 위치에 놓였습니다.
고난도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반면 로마제국 권력자들은 국가의 정치 소요가 일어날 때마다 성도들을 표적으로 희생양을 삼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큰 가뭄이 와도 성도들이 신들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큰 화재가 발생해도 성도들이 국가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구실로 삼은 것 중의 하나가 성찬식에 관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공적 집회 때 행하는 떡과 잔을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문자 그대로 왜곡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죽여 버려라. 이런 식입니다.
이런 큰 박해를 내다보신 주님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하셨습니다.
성도는 비본질 요소 때문에 박해받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일에 연루되어 믿음의 손실을 당하지 않도록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2.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입니까? |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기의 욕망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왜 남으로부터 박해받습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받는 박해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박해입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은 성경이 말하는 박해가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처벌입니다. 박해와 처벌을 이렇게 구분하면 어떨까요?
박해는 좋은 일을 한 일에 대하여 나쁜 사람으로부터 받는 고난입니다.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해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제재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성경이 말하는 박해가 아닙니다. 성도가 법을 어기거나 불의를 행해서 고난받을 때 의를 위해 받는 박해라고 포장하면 안 됩니다.
또 성도가 지나친 믿음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과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빙자하여 책임을 등한히 해서 비난받을 때 이를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 흔히들 자기를 위해 이런 성경을 가져다 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03:12).
중요한 것은 의를 위하여 미움과 고난과 박해를 받는다면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표시입니다. 동시에 내가 받아야 할 박해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예언적 차원에서 들려주셨습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살수록 고난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를 지도하기 위하여 편지를 쓰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을 볼까요?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03:13)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런 일은 아름다운 것이라고(벧전 02:19)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으로 오는 고난이나 혹은 박해, 직장에서 일을 감당하지 못해 당하는 욕은 박해가 아니라 그냥 무능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의 경건한 성도들은 이중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으로 몰려 박해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는 황제숭배를 거부한다고 박해당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반면 그에 따른 박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감당 못 할 고난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고전 10:13).
믿음의 가족 여러분, 나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입니까? 경건한 성도로 살면 여전히 박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시대에도 박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단순히 교도소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박해가 사회주의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 믿음 때문에 잡혀 재산을 탈취당하거나 교도소에 갇히거나 순교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함으로 받는 모든 제약도 포함됩니다.
3.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는 천국의 상급이 있습니다. |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팔 복 마지막은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역설적인 논리입니다. 박해를 당하는 것은 불행한 일인데도 예수님은 박해를 큰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우리 중에 남에게 박해당하신 분, 또 공격을 계속 당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가 받는 공격이 복된 일인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박해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12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은 원치 않지만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그것은 복된 일로 선언하십니다.
이슬람권에서는 혹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을 선고하는 때도 있습니다. 2010년 이란에서는 33살의 유세프 나다르카니(Yousuf Nadarkhani)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라쉬트 지역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 판결은 2011년 9월 이란 최고법원에서 뒤집혀 사형은 면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박해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 속에서 누구나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불교나 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교도소에 가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되어 직장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주님의 은혜 안에 살려고 하는데 상은 고사하고 중상모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 고민과 의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는 주님의 말씀을 큰 위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저런 상을 많이 받습니까? 만일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면 그것은 복된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상급도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박해당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 박해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
지금도 박해를 받는 분이 있습니까? 제가 즐거워하십시오. 하면 화가 나겠지요? 아니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니? 지금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예, 박해 자체는 절대 기쁜 일이 아닙니다.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입니다. 그런데도 박해를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박해받으면 세상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도 물리쳐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거기다 주님께서 의를 위한 고난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상은 분명히 축복이요 즐거운 일입니다. 즉 지금의 현실의 문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결과를 내다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①천국이 그런 사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0).
②주님 때문에 받은 고난은 영광이기 때문입니다(11). ③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④앞서간 믿음의 선배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 때문입니다(12).
롬 08:18 생각하건 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사도들 행적과 그에 준하는 일꾼들의 순교자 같은 삶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끌려다니다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하였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로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재앙과 어려움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만 듣고 내 뜻대로 모든 일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믿은 자에게 이 모든 일이 물러간다고 여기면 어쩌면 그것은 미신 같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에 적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주변 환경을 잘 보십시오.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쉽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고 고통과 아픔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이 만남에서 잘 만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불편한 관계로 만나면 악연이라고 합니다.
인연과 악연 속에서 일이 계획대로 잘될 때가 있는가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일이 잘 안될 때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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