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9일 새벽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의 한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해 2층 건물 중 1층을 모두 태우고 진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술에 취해 자던 남자 이 모 씨가 연기에 질식해 숨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굴까요?
2층의 주민 김 모(45) 씨에 의하면, 빈집인 1층에서 남성의 주정 소리와 함께 물건 던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갑자기 연기가 올라와 나가 보니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경찰의 조사는 숨진 이 모 씨가 이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이사 한 줄을 모르고 옛 모습으로 옛 집에 들어와 잠을 자다 변을 당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할 자리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든지 불행을 당할 수 있음을 상징해 준 사건이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 구원의 자리에 들어 온 거듭난 사람은 옛 모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변화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밤에 예수님께 나와 상담을 받았던 한 공회원의 이야기,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에 관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후에 어떤 변화의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의 장례식 현장에서 그 변화된 모습을 믿음으로 나타내 보입니다. 이 변화된 니고데모의 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을 면담하러 온 니고데모가 누구입니까? |
0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이스라엘의 선생(10), 밤에 예수님께 찾아 온 니고데모를 놓고 예수님이 붙여주신 명칭입니다. 이 호칭을 따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 따라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이름 뜻은 백성을 정복한 자, 혹은 백성의 승리자라는 의미입니다.
짐작하건데 그의 부모가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로마의 권력을 앞으로 몰아내어 식민지 생활을 해방을 시키라는 의미로 지어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만큼 정열적이고 야망에 찬 이름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니고데모입니다. 이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하였습니다.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공적 기관의 공적 위치에 있는 지도자란 뜻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 선생님이란 칭호에 정관사(호)가 붙어 있는데 아마 중요한 인물, 좀 비중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종파 면에서 니고데모를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01). 바리새파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더불어 3대 종파의 하나입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제사장 그룹의 기득권 세력이고, 에세네파는 주로 세상을 등지고 수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로서 선행과 구제, 기도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01절에서 유대인의 지도자가 아닌 유대인의 관원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공회원이라면 율법학자요,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선생님의 위치입니다.
공회의 구성원은 70~72명으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중에서 지도자급으로 선정을 하되, 공회의 의장은 사두개파의 영향력 있는 제사장 중에서 맡았습니다. 공회원은 조상들의 율법에 대해 정통하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신분입니다.
특별히 종교 의식을 집례 할 수 있는 특권도 있고, 어떤 죄나 형벌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재판관 역할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산헤드린 공회가 모여 예수님을 정죄하고자 할 때, 니고데모가 동료들을 향하여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는 소신 있는 발언을 하였습니다(요 07:50~52).
이 발언으로 동료 공회원들에게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자기의 소신을 따라 믿음으로 행동하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보아 그는 나이도 좀 들었을 것이고, 공회원인 만큼 당연히 학문을 많이 연마하였을 것이며, 재산도 제법 넉넉했을 것입니다(요 19:39). 당연히 사회적인 지위가 보장되는 사회의 정신적 기둥 역할의 지도자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2. 니고데모가 왜 밤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까? |
0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 온 이유를 놓고 여러 갈래로 해석을 합니다. ①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②분주한 낮 시간을 피해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③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입니다.
여러 해석들 중 적절한 해석은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낮에 예수님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신분상 바쁘기도 했을 것이고, 사회적인 지위, 체면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요 주의 인물로 주목하였기에 밤 시간을 택하였습니다.
이런 긴장감이 감도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만나 상담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일 아닐까요? 사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요 주의 인물로 지목되면 산헤드린 공회의 관점에서는 언제 제거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 예로 세례 요한이 제거 당한(마 14:10) 일이 있었고, 시간이 좀 지나 야고보도 제거(행 12:02)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회의 여론 층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정치적인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극심한 걸림돌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니고데모는 공회원 신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니고데모는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여 예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지금 예루살렘에 무엇 하러 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여러 종합적인 상황에서 니고데모가 매우 깊은 생각을 가지고 밤에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운을 뗍니다. 랍비여, 이스라엘 사회에서 랍비라는 서품(敍品)을 받고 율법학자 팀에 가입하려면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전문 연구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전문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미쉬나에 대한 해석 방법을 배웁니다.
마침내 통달하여 시험에 합격하면 40세가 되어서 랍비 서품을 받습니다. 드디어 랍비가 된 니고데모,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첫말에 랍비라고 부른 것은 공회원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로보아 예수님은 이미 여러 계층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랍비로 부른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아 주제가 영생과 거듭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 이상의 존재로 알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혹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가 아닐까? 라는 곳에까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나타내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 0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3.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
0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회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거듭남이라는 말입니다. 사회가 좀 혼란스러우면 정치가들이 나와서 정치가 거듭나야한다고 말합니다. 또 교육계나 군대가 부패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교육가들이나 군인들이 나와서 교육행정, 전반적인 군의 제도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자동차 광고를 할 때도 거듭난 자동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런 단어가 하도 보편화되다 보니 거듭난다는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거듭나다는 말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나다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새로워져야 할 때, 즉 개혁되어야 할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한 밤에 불쑥 찾아온 니고데모를 향해 처음부터 대화의 주제를 거듭남으로 정하시고 거듭남에 관한 말씀을 진지하게 하십니다. 육신의 생활에서 영의 생활로 새롭게 태어나는 삶, 예수님을 모르고 나만을 위해 살던 죄의 모습에서 떠나 새롭게 변화가 일어나는 삶을 소개합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사람은 한 번 태어나는 것이지 어떻게 두 번이나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04).
이어지는 말씀 06절까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반복해서 거듭나야 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니고데모의 말이 맞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두 번 이나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거듭남의 의미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으로서, 새로운 생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분명히 새로운 생명의 세계, 구원의 세계가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계속 거듭나야 한다고 하심은 육신으로 다시 나는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영적 원리를 따라 영으로 다시 태어남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영혼이 성령님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이 진리에 대해 05절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0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님으로 나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물로 태어남과 성령님으로 태어남이라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육신적 태어남과 구별되는 영적 태어남의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령님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으나 물에 관해서는 좀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다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말하며, 그 피는 곧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약 01:18).
벧전 0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늘로부터의 생명, 위에서부터 오는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한 생명을 낳기 위해서 어머니는 해산의 진통을 겪듯이,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이 죽음이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새생명을 싹트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진리를 따라 사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떤 집사님이 앵무새 한 마리를 키웠는데 그 앵무새가 배운 한 마디 말은 뽀뽀합시다. 입니다. 앵무새는 아무리 다른 말을 가르쳐도 집에 사람이 들어오기만 하면 뽀뽀합시다. 뽀뽀합시다. 하며 주인을 민망스럽게 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사님도 앵무새 한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그 앵무새는 항상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앵무새와 집사님의 앵무새가 이렇게 영성 차이(?)가 납니다. 목사님 집의 앵무새 이야기를 들은 집사님은 목사님께 양해를 구한 다음 자기의 앵무새를 목사님의 앵무새 새장에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뽀뽀합시다. 하지 않고 기도합시다. 라고 말하겠지?
두 마리의 앵무새는 한참을 새장 안에서 푸드득거리면서 서로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더니 집사님의 앵무새가 말합니다. 뽀뽀 합시다. 그러자 목사님의 앵무새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기도를 응답해 주심을. 앵무새고, 사람이고 간에 거듭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니고데모, 분명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이제 이후의 니고데모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임시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된 후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본격적으로 치르기 위해 나섭니다.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 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는 당시 장례법을 따라 시체에 바를 기름과 여러 향품을 가져와서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요 19:40). 여기서 주목할 점은 네고데모의 공개적 등장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하면 coming out입니다.
뭔가 감췄던 것을 드러낼 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하는데, 니고데모는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제는 커밍아웃 합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도망을 하였을 때 니고데모는 변화 된 모습, 거듭난 모습으로 위기의 현장에 나와서 주님의 일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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