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했던 2014년 국내 10대 트렌드 중에 하나가 위로가 필요한 사회이었습니다. 고용이나 주거, 노후에 대한 불안의 증가로 힐링이나 멘토, 상담과 같이 불안을 달래주는 위로 산업이 발달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이런 유행을 반영하듯 길거리에서도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Free Hugs) 라는 행사도 열렸습니다. 외롭고 괴로울 때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것은 당연히 큰 위로가 됩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면 이런 것들이 유행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맞지만 정작 위로를 받을만한 곳은 별로 없습니다. 2015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수없는 절망을 하고도 남을 환경이지만 조금도 절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때그때마다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고,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체험한 은혜가 있었고, 순간순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앞날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위로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옵니다. 저는 바울이 기록해 놓은 그 10번의 위로라는 말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일에 위로자이십니다. |
0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어떤 경우든지 제한이 없이 위로를 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위로를 해 주십니까? 04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라고 나옵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들이 능히 풀릴 때까지 믿음이 안정되도록 위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구원을 전제로 하는 위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즉각 우리의 고난을 완전히 제거해 주시겠다든지, 혹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이런 식의 위로가 아닙니다.
사람은 약한 존재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나가 다 위로를 필요로 하지만 정작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세상 어디에도 참된 위로를 주는 곳과, 참된 위로를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행복한 장소처럼 보이는 곳이라도 참된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위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개입하시면 해결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아픈 문제들을 능히 풀고 위로해 주십니다.
미국 조지아 주의 한 작은 도시에 있는 수리공장 옆에 페인트로 쓰인 커다란 간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간판에, 우리는 상한 마음 외에는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재치 있는 광고 문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상한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가혹한 시련이 우리의 생활을 어둡게 하거나 슬픔이 다가 올 때 누구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친구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의 보살핌이 우리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위로가 일시적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와 마음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입니다. 경력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강사와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냈는데 이분이 저술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고, 가족들로부터 거절함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지는 상처를 받았고, 아버지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받은 상처들로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상처 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유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받은 우리 인생을 이해하십니다.
예, 상한 마음들을 치료 할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마음을 짓누르는 슬픔이 있어서 눈물이 흐른다면 모든 일에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아픈 영혼을 어루만지고 평안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만나야 합니다.
2.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베풀어야 합니다. |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하나님의 위로가 사람에게 전달 될 때 성전을 통하여서 전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말은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성전 즉 교회를 통해서 위로가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성도들에게 전해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위로가 절망에 빠진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를 통해서 옵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이내 죽고 말듯이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떠나면 곧 죽고 말 것입니다(요 15:05).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를 통해서 온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위로가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온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임을 기억하십시오. 꼭 정확하다고 말하기는 좀 곤란하겠지만 성도의 믿음의 깊이는 예배생활에서 나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믿음생활에도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극심한 박해 때문에 예수님 믿는 것을 비밀로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프리카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용되던 암호 인사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그들은 몰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깊은 숲속에 들어가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당신은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숲속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있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당신의 예배생활은 힘들고 어려울 때도, 바쁘고 피곤할 때도, 최선을 다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를 분명히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외에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도 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매어 달리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날마다 풍성한 하나님의 위로와 신선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를 이어가는 사람은, 날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릴 것이며, 이런 은혜는 누리는 자만이 아는 영적 비밀에 속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교회에 왔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또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여러 사람이 붙어서 겨우 붙들어 놓는데 참 힘들지요? 교회에 와서 위로받지 못하고 희망을 얻지 못하면 어디에 가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론 세상의 향락으로 일시적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세상의 좋은 예술품과 공연을 통해서 위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잠깐의 위로입니다. 교회는 분명코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 절망의 상황에 빠진 사람이 와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마음에 치료와 위로와 소망을 받고 나면 그때부터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3. 우리 모두가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
0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요즘 같은 현실에서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누구나 다 위로 받길 원하고 위로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위로를 해 주면서 사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가정에서의 갈등, 사업의 어려움, 육체의 질병, 대인관계로 인한 상처 등 가지가지의 일들로 괴로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위로입니다. 바울은 롬 12:15절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줄 것을 권합니다. 마음으로 공감을 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한 환자가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너무 긴장이 되어 의사 선생님에게 사정합니다. 선생님, 제가 처음 수술을 하는데요, 너무 긴장이 되어서 죽겠어요. 잘 좀 부탁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환자를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입니다. ㅎㅎ. 내용이야 어떠하든지 마음을 열어 주는 것 같은 위로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비난과 공격의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깊게 심어 줄 때가 많습니다. 정말 괴롭지요. 이혼하는 부부들도 칼로 찌르는 말을 주고받고 헤어집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섬기는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를 어떻게 잘 가꾸기를 원합니까?
어떻게 해야만 서로에게 은혜가 되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겠습니까? 나는 의인이기에 상관이 없고, 다 상대에게 결정적인 허물이 있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깁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을 쫓아냅시다. 그 쫓겨 날 사람의 1순위 누구인지 짐작됩니까? 생각해 보니 담임목사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이 오면 쫓아냅시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 17:0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우리는 사랑과 이해와 칭찬과 동정으로 위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랑을 베풀고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위로를 받아야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용기가 생기고, 위로가 뒷받침만 되면 얼마든지 일어 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반대로 누구든지 계속 비난의 공격을 받아 약점이 잡히면 낙심하고 뒤로 넘어져서 일어 날 수가 없습니다. 전 0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면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므로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받아도 될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인정해 주어야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당신은 우리교회의 최고 일꾼입니다. 혹은 상당히 어렵지요. 힘내세요. 이렇게 힘을 실어주는 감동적인 격려와 위로가 피드백 되면 공동체는 더욱 은혜의 탄력을 받을 것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렸다는 말, 혹은 차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죽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것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반면 얼마나 위로를 받을 곳이 없으면 그런 선택을 하겠습니까? 우리들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와 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힘을 실어주어서 일어서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①세상에서 방황 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②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의지 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③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 자욱 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 죄인이 다시 눈물 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살후 0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넉넉하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어서 우리가 섬기는 김해삼일교회가 위로를 베풀어주는 교회로 다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위로하는 가운데 행복한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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