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에 이윤호 목사라는 분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는 책을 시중에 내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조상과 후손 사이에 연대성이 강한 사회에서 당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라는 주장은 상당한 호응을 보였습니다.
한 때는 기독교계 서점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급부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윤호 목사는 이 가계저주론이 성경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알고 예장 합신 교단지(기독교개혁신보, 2013년 8월 29일 자)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책이 시중에 나온 이상 그 여파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직도 일부 성도들 마음 한 편에는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혹시 우리 부모나 혹은 조상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가정 안에 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상 탓으로 돌리는 것은 기독교의 참 신앙이 아니며, 분명히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라는 속담을 오늘 말씀에서 인용을 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면 아버지의 이가 시어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신 포도는 아버지가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합니까? 이런 일이 바로 자신의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행위로서, 잘 못 된 일을 만나면 조상 탓 하는 속담 격입니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책임을 떠넘기려 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이 남 탓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왜 이런 속담까지 생겨났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가계저주론과 이스라엘 속담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아버지가 신 포도를….속담이 생겨난 배경. |
0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에스겔 18장 전체 말씀을 한 절, 한 절 읽어 보십시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이라도 죄악에서 돌아서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구원의 복, 회복의 복을 받으라는 메시지임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길로 갔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1,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들은 그발강 유역에 이주되어 유프라테스 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에 동원되었습니다.
노예의 생활, 그것도 외국에 포로로 잡혀가서 공사판에 동원되었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겠습니까? 절망과 탄식 소리가 절로 나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며 원망을 계속 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왜 아들의 이가 시냐? 는 속담을 인용하며 이 고통은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 라고 탓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회개(悔改)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넋두리를 합니다. 속담 자체를 분석해 보면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범하지도 않은 아들이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왜 이런 속담이 민간에 나왔을까요? 이 속담의 근거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우상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입니다(출 20:05).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말씀하신 그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조상들이 저지른 죄의 책임을 그의 후손들이 물려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부모의 죄가 그만큼 그 후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의도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런 속담 같은 소리 하지 말라. 당신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해서 당하는 일 아닌가? 속담 인용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에게 당신들에게 임한 심판은 각 개인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니 조상 탓 하지 말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때는 고난이 해결된다. 이렇게 전합니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스겔 선지자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반응만 보이면 됩니다. 그렇게 복잡한 처방전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마음을 새롭게 바꾸기만 하면 회복할 수 있다는 처방전을 약속합니다. 그 처방전의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볼까요?
30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 지어다. 31 ….너희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지어다 32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 복을 받는 일, 또 화를 당하는 일 이 모두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듯 각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부모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식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그 자녀가 예수님을 믿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면 그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조상들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원리가 신 24:16절에 나옵니다.
신 24: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2. 이런 속담원리는 배척해야 합니다. |
0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고난을 조상 탓, 남 탓으로 돌리려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다시는 이런 속담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04절 말씀은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했다. 아버지의 영혼도 아들의 영혼도 다 내게 속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그 영혼만이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말씀 서두에서 말씀드린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는 가계 저주론과 원리가 거의 비슷한 의식을 지금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속담을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들을 이원론적 논리, 흑백논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고난과 고통에 관한 일들을 죄의 결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믿음 훈련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고난이 성경에 얼마든지 나오기 때문입니다.
벧전 0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래서 성경에는 두 종류의 고난(시험)을 말합니다. 마귀의 미혹에 이끌려 당하는 고난과, 하나님이 성도들을 연단하시는 교육적인 고난입니다. 성도에게는, 신학적인 용어를 적용하자면 예정론 안에서 고난도 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 고난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옵니다(롬 08:28). 그러나 죄로 인해 가계(가문의 혈통)에 저주가 흐른다고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저주로 보기 때문에 그저 눈에 좋게 보이는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온갖 불행과 재난 길흉화복이 조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과응보적이고, 과거 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지요. 믿음의 사람일수록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생로병사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기 때문에 무엇을 얻었다고 해서 너무 교만하지 말고, 또 무엇을 잃었다고 해서 너무 실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 01:21).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중에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임을 믿으십시오.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함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이고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최초의 저주는 하나님이 뱀에게 하신 저주였고, 이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혈통을 타고 이어지는 저주로 만들지 않으셨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 일입니다.
롬 08:0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잘 못된 길에서 돌아서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오늘 말씀에는 죽는다, 산다, 이런 의미의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이유는 사는 길이 무엇이고 죽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스스로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죽고 싶으면 그대로 있고, 살고 싶으면 속히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신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정치가 혼란과 경제의 불안정을 다 남 탓으로만 돌립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 너무 싫어합니다. 한 마디로 다 쓰레기들 수준들이니까요? 이거 다 우리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손으로 투표를 해서 뽑았기 때문입니다. 저질스러운 정치인들 좀 판단도 해 보고 찍어야지 그저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막 찍어주기 때문에 결국은 강도의 면허증을 들려 준 격이 되었습니다.
31절은 우리에게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것을 권합니다. 모여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놓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라고 말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조상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게서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고 돌아가야지 머뭇거리거나 우유부단하면 생명 길이 막힙니다.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임마누엘 칸트(1724,4,22~1804,2,12)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쓴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칸트의 젊을 때의 이야기로서 그가 아리따운 여자 한 분을 만났는데 이 여자가 사랑의 고백과 함께 결혼 청원을 해 왔습니다. 프러포즈를 받은 칸트는 제가 연구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철학자답게 가서 자기 선조들과 자기 선배들이 써 놓은 결혼관을 놓고 내가 결혼을 해야 좋은지? 안 해야 좋은지? 에 관한 장단점을 다 연구를 해 보니 결론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그래 하는 게 좋다. 그러면 해야지 이런 결론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전부 다 써서 프러포즈한 여성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노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아버지가 나왔는데 결혼을 하면 장인 될 분 아닙니까? 제가 연구한 결과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합리적으로 판단이 되어서 지금 실천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여자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너무 오래 연구를 하셨군요. 그게 3년 전인데 우리 딸은 벌써 결혼해서 손자, 손녀가 하나씩 있답니다. 칸트는 돌아와서 합리적으로는 결혼하기로 했는데, 몸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결혼 못했습니다. 결단을 할 때는 실천적 결단이 더 중요합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결단에 적용됩니다.
사 55:0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현실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현실을 실천으로 옮기는 능력의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진정한 복음에는 믿습니다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책임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회개를 하였습니까? 마음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도 변화가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어 육의 이끌림을 거절하고 영의 이끌림을 따라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연연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될 때 복을 받아 누리고 의롭게 되어 집니다. 인생길의 한 모퉁이에서 혹 우리 앞에 저주처럼 보이는 징계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조상들, 부모님, 이웃들이 범한 죄 때문에 닥친 환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의 원인은 모두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놓고 하나님께 엎드립시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복 된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의 순종에 우선순위를 놓고 삽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지금도 우리가 곁길에 나가 있으면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욜 0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올 지어다….
'은혜의 강단 > 2015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합니다.(고후 01:03~07) (0) | 2015.02.14 |
---|---|
다시 태어난 니고데모.(요 03:01~08) (0) | 2015.02.07 |
예수님의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고전 01:18~25) (0) | 2015.01.24 |
나도 신령한 일에 동참합니다.(마 04:18~22) (0) | 2015.01.17 |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세웁시다.(렘 35:16~19) (0) | 2015.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