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5년 말씀

나도 신령한 일에 동참합니다.(마 04:18~2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5. 1. 17. 18:24
728x90

어느 주일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날따라 처음으로 안내를 맡은 집사님이 친절하게 어디에 앉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맨 앞줄에 앉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이 할머니, 맨 앞줄은 별로 안 좋으실 걸요. 목사님이 설교도 잘 못하고 말씀이 좀 지루하거든요. 아마 금방 졸릴 텐데 차라리 뒷자리에 앉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내가 이 교회 목사의 어머니입니다. 그 말에 안내를 하던 집사님이 너무 창피했습니다. 어머니 앞에 자식 흉을 봤으니 창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 그럼 천만 다행입니다. 하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신령한 것을 모르고, 또 신령한 세계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한 일을 맡아 하다보면 이런 실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신령한 꿈을 꾼다고 해서, 바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꿈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믿음의 성도 여러분, 꿈이 있습니까? 어떤 꿈입니까? 가슴을 설레게 하는 크고 아름다운 꿈입니까? 아니면 지금 현실에 만족하며 이 대로에 안주하는 꿈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신령한 꿈을 품으시고, 그 꿈대로 펼쳐나가기를 축원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 먹고 살기 위해 돈 버는 일, 이거 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하는 일을 신령한 곳으로 자리 이동을 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세상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고기잡이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어서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왜 따르라 하십니까? 이들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는 건전한 가치관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치관(價値觀)이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의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성도가 가져야할 가치관, 좀 고상한 차원으로 말한다면 영적 가치관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가치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이란 옳고 그름을 잘 헤아리고 행동하는 능력으로서 이 올바른 분별력이 올바른 삶을 창출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에게 가장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꼭 같이 공평하게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누구는 더 주어졌고, 누구는 덜 주어졌고 가 아니라 꼭 같이 주어졌으며 이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필연적인 사실을 피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영적 가치관을 펼치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영적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거듭난 성도, 믿음의 꿈을 가진 성도가 구원사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흐름들을 성경의 빛으로 조명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는 열정과 행동들을 영적인 가치관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가치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주변을 보아도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육신적인 일에만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 말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 형제의 고기잡이 하는 일을 유심히 보십니다.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하는 일도 보십니다. 주님께서 그저 심심해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었고, 지금 젊은 어부들의 그물질 하는 것을 그냥 멍하게 바라보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바라보시는 겁니다주님은 지금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도 세밀하게 보십니다. 소망이 없는 그저 세상적인 일인지, 아니면 영적인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살펴보십니다. 만일 내 하는 일들이 소망이 없는 일이라면, 지극히 세상적인 목적의 일이라면 뭐라고 하실까요? 왜 일을 하지 않고 놀고만 있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20:0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라 걸쳤지만 영적 가치관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 내가 하는 일들이 그런 일들과 같은 것은 아닌지 자세하게 점검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적 쾌락만이 전부인양 거기에 목숨을 거는 일에 내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찬송가 597<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같이 부르겠습니다.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

나 받은 달란트 얼마런가? 나 힘써 그것을 남기어서 갑절로 주님께 바치 오면 충성된 종이라 상주시리.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나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 뵈어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2. 예수님은 나를 신령한 일에 초청하십니다.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다니시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고기 잡는 일 하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라. 주님의 부르심은 매우 간략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명령, 무게 있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초의 제자를 부르시면서 좀 유식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좀 무식하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해변에서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고기를 잡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거기다 사람을 낚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사람을 구원하는 영적 어부의 일은 더욱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이 말은 고기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어부와 같이 사람들을 복음으로써 포획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제자 후보들 네 명이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계획을 따라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 것을 명하십니다.

외형적인 직업, 재산, 가족, 자신까지도 버리는 자기 부정의 삶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형제, 야고보 형제 등 네 명을 부르심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목적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한 번만 삽니다. 어느 누구도 두 번의 삶을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혹 나만은 시간이 충분히 있을 거라 여깁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마치고 당장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며 볼 품 없음을 알 것입니다. 이미 폭삭 늙어서 나에게 머무를 시간이 별로 없음을 자각하십시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우리가 아멘으로 받는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신령하고 영적 가치가 있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는다면, 그런 일에 동참을 한다면 이보다 복 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길, 죽어가는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의 일에 내가 참여한다면 나야말로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마지막 그 날에 주님께서 나를 모르신다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0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더 이상의 시간이 없이 다 끝나 버렸는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 할 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다행인 것은 아직은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그날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오늘 밤이라도 그 날이 찾아 올 수 있음을 명심하시고 지금 신령한 길로 오십시오. 마귀는 우리에게 세속적인 야망을 주지만 하나님은 신령한 비전을 주십니다. 야망과 비전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목적이 다릅니다.

야망은 자신의 욕심이 목적인데 비해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나를 따라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도전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꿈을 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는 꿈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존귀하게 쓰임을 받는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가치관,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리로 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 물고기를 조금 많이 잡으면 기분이 좋고, 못 잡으면 침울해지는 그런 삶을 정리하고 신령한 세계로 오라 하십니다.

 

 

 3. 나는 신령한 일에 동참하기를 결단하였습니까?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곧 그물을 버려두고. 22절 까지를 보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신속하게 반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갈릴리의 젊은 어부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르느라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생업을 포기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물을 따르는 일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바꾼 것이요, 이제부터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신령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젊은 어부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당시 돈도 명예도 배경도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지위나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고기 잡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현장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약속받지 못하였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만난 사람은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 예수님만 바라보며 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 왔으면 변덕을 부리지 마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2015년부터 더 새롭게 믿기로 작정을 하였습니까? 갈릴리의 젊은 어부들이 버렸던 그런 그물 같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진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내가 도무지 내려놓기 싫은 것을 내려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더 귀한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부가 아니기에 버릴 그물이 없다지만 또 다른 형태의 그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내려놓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네 명의 젊은 어부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다른 일을 구실로 핑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결단은 지극히 모험적인 것이고 매우 어려운 결단임에도 주저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버릴 것이라면 즉각 버려야 합니다. 주저주저하다가, 시간을 질질 끌다가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 것을 마음먹었습니까?

그러면 핑계도 대지 말고, 변명도 하지 마십시오. 망설이는 것은 마귀의 전략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려면 포기할 것이 많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북부 갈릴리 지역의 부흥은 예수님의 부르심 받은 제자들의 열정과 헌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의 불씨를 지펴나갔습니다.

가끔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합니다. 교회 표어도 그렇게 정하기도 하고요. , 돌아갈 수 있으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모습,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아십니까?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것을 이웃과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02:44~46). 이런 정신을 실천하자는 말은 하면서도 자기를 비워 희생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이것이 외식하는 신앙 아닙니까? 외식을 깨뜨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생활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크고 놀라운 꿈을 품고 삽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꿈을 품고 삽시다.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는 꿈으로 삽시다. 허영된 것을 폼 잡고 누리다 사라지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꿈,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의 신령한 꿈으로 삽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꿈, 우리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꿈, 나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돌아오는 꿈으로 살아야 할 때 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영적 가치가 있는 꿈을 품었습니까? 이 가치관이 성취되기 위해서 철저히 주님을 따라야 하며, 주님은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하나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0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황무지가 백합화같이. 2015년 이 꿈을 품고 기도를 할 때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새 힘이 솟는지 모릅니다. 비전대로 되고, 믿음대로 되고, 믿은 대로 되고, 소원대로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꿈의 확산입니다. 꿈을 붙들고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의 심령으로 꿈이 전이 되어야 합니다.

꿈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서 김해삼일교회가 든든해지고 건강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신령한 꿈을 꾸게 하고, 비전을 가진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도록 피드백을 해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