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유머 가운데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합니다. 이 두 마리의 이름을 편견(犬)과 선입견(犬)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두 마리 개를 쫓아버릴 수 있는 또 다른 개도 있다고 합니다.
이름이 조금 긴데 백문이 불여일견(犬)이라고 하죠. 애칭으로 줄여서 일견이라고도 부른답니다. 편견이란 한 쪽으로 치우친 공정성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고, 선입견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장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에 정한 견해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남방 유대 베들레헴이지만 성장한 곳은 나사렛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나설 약 30세까지 목수로 일하며 지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갈릴리를 중심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갈릴리 일대에서 예수님의 인기가 크게 오르는 현장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여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열렬히 환영 해 주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 했습니다(눅 4:16~29).
이런 일이 있고 난 지 약 1년의 기간이 흐른 후 예수님은 다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는데 이번에도 전과 같이 크게 배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크게 배척을 당했음에도 다시 나사렛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고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향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을 하였을까요? 이에 대한 몇 가지의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은 사람의 영안을 어둡게 합니다. |
0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01절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중심의 전도를 마무리 하고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고향 나사렛을 찾으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예배를 드리러 가셨는데 전통적으로 회당장은 회당을 방문한 랍비 급 선생님들에게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회당에서 어릴 때부터 회당장이 주관하는 예배, 외부의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저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왜 은혜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옛날 모습, 즉 과거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말씀이 자기들의 심령에 은혜로 다가오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 알고 있다는 그런 사람의 편견과 선입견이 영안을 어둡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놓고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한 번 볼까요?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라는 표현을 보아 설교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 놀라며,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한 2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어울려 지냈기 때문입니다.
또 목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이웃집에 가서 일도 해 주었을 것이고, 혹은 일 삯을 받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분명 우리가 잘 아는 청년인데 어떻게 저런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이지? 옛날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할 수 있지?
이런 생각들이 나사렛 주민들의 머리에 선입견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 회당 예배에서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을 은혜로 전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교 내용이면 당연히 아멘이 나와야 함에도 아멘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란 좋은 쪽으로 이해를 하면 문제를 풀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면 은혜 받는 일에 지장도 됩니다.
사람관계에서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편견입니다. 편견이란 한 방향으로만 생각이 모아지는 것으로서 사고의 다양성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열리지 않고 과거 속에 머무르려 하는 고착된 사고가 편견입니다.
그래서 편견이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 변화를 거부합니다. 앞뒤가 꽉 막혔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의 폐쇄적 사고로 흐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눅 0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결국은 고향 나사렛 주민들의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귀한 말씀을 은혜의 말씀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영안을 계속 어둡게 하는 무서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2.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은 은혜를 가로 막습니다. |
02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면서 했던 두 번째 말입니다.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은 지금까지 나사렛 주민들이 알아왔던 옛날의 그런 분이 아닙니다.
반면 저들이 알고 있는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전하는 지혜의 사람이 아니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수 있는 능력자도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나사렛 사람들은 지난 30년 동안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성장과정을 다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변한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교육이라고 해 봐야 회당에서 가르치는 초등교육이 전부이며 당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고향을 떠나신 일이 없으므로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님의 교육수준이 어떠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정도의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회당에서 랍비들이나 할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시니 놀라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회당에서 들어본 그 어떤 랍비들이나 성경의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가 있는 말씀 앞에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나사렛 주민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학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도 권세가 있는 말씀이라 하면서도 그 말씀을 생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처음 나사렛을 방문하였을 때만큼 이번에는 악하게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또 산비탈 낭떠러지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죽이려 들지도 않았고요. 대신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님을 대 놓고 아주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03절 이 사람이, 이렇게 세 번이나 이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무시를 합니다. 거기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메시지를 놓고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며 형편없이 비하하는 말까지도 하고요.
한 마디로 이 사람에게 이런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정말 그들의 말처럼 예수님이 그런 능력자가 되었고 놀랍도록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되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만한 일에 해당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니, 그런 것이니 하면서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박수를 쳐 줄 것은 쳐 주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관계도 풀립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배척을 합니다. 메시아를 배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말씀, 은혜의 말씀이 귀로 들려서 뇌에까지는 전달되었으나 심령에 은혜로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이처럼 은혜를 막는 걸림돌입니다. 고질적인 편견과 선입견은 받아야 할 은혜를 가로막는 무서운 영적 장애 요소입니다.
롬 10: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
0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실 나사렛 주민들이 지금 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목수 정도가 할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이 아닙니다. 랍비나 대학자들 수준에서나 할 수 있는 말씀인 것이죠. 예수님은 일찍이 호적상의 아버지 요셉이 죽으므로 인해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렇게 넉넉한 생활을 하며 성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아들에다 별 내세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인 만큼 나사렛 주민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저런 수준의 말씀을 하는 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02,03절에 보면 나사렛 주민들이 다섯 번에 걸친 비아냥거림의 질문 속에서 마리아의 아들 목수를 깔보는 그런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02 ①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②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03 ③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④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⑤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지혜를 들었고, 또 소문으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일들을 들었습니다. 언제 들었느냐고요? 나사렛과 갈릴리 까지가 그렇게 먼 곳이 아니라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는 일들은 그때그때마다 잘 들려왔습니다. 일 년 전에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다녀갔고 오늘이 두 번째로서 예수님의 행하신 여러 일들, 특히 죽었다 살아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사건은 이미 온 이스라엘에 다 펴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고 보면 다른 지역은 몰라도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님이 고향을 찾았을 때 아주 정중하고 깍듯이 예우를 하여야 할 입장입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도 올리고, 각 교회들마다 연락을 할 것이고, 카톡 방에도 올렸을 것이며, 현수막도 아주 거창하게 내 걸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사렛 주민들은 자기들을 위해 일부러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적 배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03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이 나눈 대화인데 한마디로 잘 안다는 것입니다. 이 안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아는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며, 선생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믿을 때 비로소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만 만일 독선과 교만으로 아는 것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막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배척하였고, 나사렛 주민들은 예수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자기들의 섣부른 고정 관념의 편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어서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한 일 중의 불행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지 못하면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04절을 보십시오.
0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당시 헬라와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격언으로서 예수님이 나사렛 주민들이 자신을 배척한 사실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1년 전에도 꼭 같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뒤로 한 체 떠나셨습니다.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등지고 만 결과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저마다 편견과 선입견이 깊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판단을 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영향을 미칩니다. 때로는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으로 큰 혼란을 만나기도 하여 고난을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편견과 선입견을 고치는 또 하나의 견 바로 일견으로 인생살이를 잘 진단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3.31.~1650.2.11.)의 이야기를 혹 들어 보셨습니까? 이 데카르트가 하루는 산책을 하고 있는데 저 만치 풀숲에 뱀 한 마리가 있는 것입니다. 겁이 나기도 하고 해서 얼른 도망하다 시피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이 철인이 같은 길을 산책하는데 같은 장소에 뱀이 또 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위협해 보았지만 뱀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 뱀이 계속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데카르트는 어, 요놈 봐라. 오늘은 아예 결판을 내자. 하고 지팡이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까딱도 하지 않자 화가 난 데카르트는 큰 돌로 힘껏 내리치고 나서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줄이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자기가 속은 것입니다. 당연히 뱀이라고 여긴 선입견과 편견에 사흘 동안이나 속은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며 큰 충격을 받고 나중에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0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주님은 치유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만 은총을 얻습니다. 나사렛 주민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나사렛에는 풍성한 은총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무서운 영적 질병의 요소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많은 이들은 죄가 심각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물론 죄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문제 삼은 적이 없습니다. 죄는 용서받으면 되니까요. 믿음만 있으면 죄는 해결되나 그 믿음이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용서와 복을 받기 위해 먼저 왜곡된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 출발의 길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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