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을 받는 한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총각시절 시골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하루는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하나씩 디디며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발도 바지도 다 흠뻑 젖자 아무리 생각해도 젖은 몸으로는 학교에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때마침 서울에서 잠시 내려오신 어머니가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아들의 젖은 몸을 보고서 딱하다는 듯이 물어보십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물에 빠졌느냐?
아들이 대답하기를 예, 어머니. 제가 징검다리를 디디고 시냇물을 건너다가 그만 잘못 놓인 돌을 밟아서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되묻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 아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얼른 옷 갈아입을 생각만 했지, 미처 돌을 바로 놓아야 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나무랍니다. 이놈아, 그렇게 하고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기는 했지만 백 번 고쳐 생각해도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임함으로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 광야에서 그다지 들어 줄 사람도 별로 없는데 홀로 고독하게 외치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를 가리켜 흔히들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광야에서 이 사람이 외치는 메시지가 어떤 내용일까요? 자기를 들어내는 선전 메시지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의미의 메시지일까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칩니다. |
0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본 절은 사 40:03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한번 볼까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가 선지자가 외친 본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70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 올 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군중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잘 맞이할까를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선지자의 소리가 끊어짐으로 인해 영적 상태가 매우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심령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할까요?
은혜가 메마른 상황 속에서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놓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사 40:03절을 떠 올린 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왕의 행차가 있을 때는 경호 선발대가 사전에 미리 가서 왕의 행차에 지장이 없도록 은밀하게 살피는 일을 합니다.
주로 길이 험하거나 방해물이 있으면 제거하여 평탄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요한도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발대 입장에서 자기의 사역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역을 하는지를 볼까요? 0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0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말씀 그대로 잘 받아들였지만(눅 03:10~14), 정치적 기득권층은 강력히 반발을 합니다(눅 03:19,20).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금년에 양파가 풍년이 들었다고 하죠? 그래서 작년대비 가격도 많이 내렸고요. 여러분은 기회가 되면 내년에 비바람이 많이 친 후에 양파 밭을 가 보십시오. 거의 심하게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세찬 비바람에 의해 쓰러진 것이죠? 어떻게 보면 누군가 일부러 쓰러뜨려 놓은 것처럼 쓰러져 있습니다. 이런 현장을 처음 보면 좀 실망이 올 것이고 마음도 아플 것입니다만 염려 안 해도 됩니다. 양파 스스로 비바람을 통하여 그냥 넘어가 있는 것입니다.
왜 넘어갈까요? 그렇게 되어야만 뿌리가 굵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양파라고 해서 다 쓰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어도 꼿꼿이 서 있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양파 쫑이 올라온 수놈들입니다.
이런 수놈들은 쓰러지지 않아서 뿌리가 굵어지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보면 뿌리가 굵어지기 위해 땅위의 줄기가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쓰러져라, 자신을 부인하라, 너 낮아져라, 요구하실 때가 있는데 이때는 전능자의 음성을 따라 마음을 곧게 하여야 합니다. 물론 쓰러짐에 어찌 아픔이 없고 눈물과 탄식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쓰러짐, 하나님이 정하신 쓰러짐은 넘어뜨림이 목적이 아니라 일으켜 살리고자 함입니다.
2. 어떻게 하는 것이 곧은길을 닦는 것입니까? |
0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진다는 뜻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말씀입니다. 광야와 사막에 실제적인 길을 내는 토목 공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맞이하기 위한 길을 내는 것으로 말입니다. 눅 03:15절을 보면 백성들은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례 요한을 놓고 그들이 혹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자라고 자신의 위치를 밝힙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이 광야와 사막에 실제적인 길을 내기 위한 토목 공사가 아님을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여기 굽은 것이 곧아진다는 말은 비뚤어진 사람의 마음이 발라지는 것이고, 평탄하여진다는 말은 교만한 이들의 마음이 낮아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영적 적용으로는 낮추어야 할 산을 바리새인들의 교만으로, 메워야 될 골짜기들을 사두개인들의 도덕적, 종교적 무관심으로 봅니다. 결국 이런 비유나 적용을 종합해 보면 사람의 죄악 된 심성의 교만과, 거짓과, 불의와, 불신을 고쳐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잠 04:26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다양한 안내와 경고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어떤 곳에는 사망사고 지점이라는 표시를 해 놓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죠. 우리가 먹는 음식이나 약품에도 다양한 경고문이 있습니다.
요즘은 담배 갑에 폐암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이나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인쇄해 넣기도 합니다. 우리 몸도 다양한 경고의 신호를 보냅니다. 수분이 부족하면 입술이 마르고, 입에서 냄새가 납니다. 심장이 좋지 않으면 어지럽거나 쓰러지기도 합니다. 또 계단을 오르면 숨이 많이 찹니까? 이럴 때는 몸에서 보내는 경고를 빨리 알아채고 치료를 해야지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면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경고를 하는 이유는 위험성을 알리고,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경고를 잘 받아들이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만 경고를 무시하면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도 재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도 은혜는 고사하고 거친 사막이나 광야처럼 심령이 황폐하여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마음이 무성한 잡초처럼 거칠어 진 것은 아닙니까? 광야와 같은 마음에 길을 내는 것, 길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게 잡초들로 막혀버린 희미한 길, 바로 그 길을 곧게 하여야 합니다.
꽉 막혀 버린 축복의 통로를 열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에 들어오시려 하지만, 은혜의 통로가 닫혀 있어서 성령님의 감동이 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은 마음이 절망의 골짜기가 되어 피곤하고 무거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거친 마음을 고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곧은길을 닦지 않으면 심판이 옵니다. |
0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우리 인생살이의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는 반드시 고난의 광야가 있습니다. 이 광야는 회개라는 열매를 맺어야만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자기의 마음을 바꾸다,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기다. 는 의미를 가집니다. 단순히 생각으로 혹은 입술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자신의 계획과, 작정 및 행동으로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히 03:0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저자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일, 곧 목을 곧게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경고해 줍니다. 창 19장에도 마음이 완고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농담으로 여겨 멸망을 당한 롯의 사위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번 볼까요?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이 사위들에게 소돔성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만 그들은 농담으로 받고 맙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이죠.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어디 농담을 하겠습니까? 예, 마음이 세상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 수준으로 흘러 넘기는데 그런 사람을 위하여 영원한 고통과 불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상 법정의 판결은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효력도 끝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 효력이 중단됨이 없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한번 천국이면 영원히 천국에서 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것입니다. 눅 16장의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 살았던 부자가 지옥에 있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 심판이 무서움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론 협회 회장까지 한 영국의 프란시스 뉴포트(Francis Newport)의 말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필요가 없다. 이미 내 영혼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 소망이 있다는 말은 집어 치우라.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것을 안다. 라고 부르짖으며 죽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구원받은 천국 백성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음을(요 01:12) 믿는 자입니까? 생명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고 심판의 부활을 받는 사람은 평생 지은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혹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의 수준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고민거리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며 살아갑시다. 목숨 바쳐 충성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의 카터 대통령(Jimmy Carter, 1924~ )은 백악관 생활 중에도 주일 예배에 철저한 믿음생활을 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분에게는 평생 교회학교 교사직을 천직으로 여겨 충성한 일도 회자됩니다, 이 분이 대통령 퇴임 후에 애틀랜타에 카터센터를 설립하여 활동을 하는데 냉전 후 지구상에서 야기되는 중대 사건의 분쟁 해결사로서의 조정 역할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퇴임 후 21년간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또 국제 해비타트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도 진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타임지가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뒤의 카터의 활동을 소개한 문구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카터, 그는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했던 유일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카터에게는 백악관이 그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권력이 목표가 아니고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라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산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목을 맬 만큼 기뻐하는 일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건강한 삶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 세상적인 요소로 인해 내 심령이 굳어지지 않도록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잘 유지하여 은혜 관리를 잘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롬 0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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