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벗어야 할 것, 입어야 할 것(골 03:05~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8. 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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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의 기본이 되는 생활을 의식주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먹고 자는 것보다 입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의복을 갈아입는 생활을 통하여 패션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특히 의상을 갈아입고 벗는 패션쇼 같은 일은 상당히 시선을 끄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벗으라는 말과 입으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패션쇼의 의미가 아니라 기본 의식주의 관점에서 입으라, 벗으라는 말입니다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나 성경이 명하는 벗어라, 입으라는 행위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상 착용에 관한 교훈이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에 관한 일로서 죄악에 물든 영혼의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옷 입듯 입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입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1.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0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05절에 나와 있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다섯 가지를 한 단어로 압축해서 지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지체는 옛사람의 요소로서 죄로 인해 하나님을 잃어버린 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중생 이전의 행실, 성격, 태도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좀 더 다른 표현으로서 옛 생활을 되풀이하는 육체적인 본성이라 할까요?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아래서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런 스타일의 모습을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 벗어버리라고 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 옷처럼 입고 살던 악한 행위들의 등급을 좀 완화 한다든지, 아니면 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환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여는 첫 말씀을 보십시오.

옛사람과 그 행위에 관한 지체를 완전히 죽이라고 명하지 않습니까? 조건 달지 말고 완전히 제거하라는 명령입니다. 또 엡 04:22절은 옛사람의 요소를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함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이든 썩어져 가는 것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됩니까?

파멸이요 죽음이요, 버리는 것 밖에 달리 다른 방책이 있겠습니까? 만일 사람이 어떤 병이 들어서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합시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과감하게 도려내어야 합니다. 아파도 참으면 후에 상처가 아물면서 새 살이 돋아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론 랠스톤(Aron Lee Ralston 1975,10,27)이 지은 6일간의 깨달음(2007,8,25, 한언출판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발간한 내용입니다. 아론이 미국 유타 주의 말발굽처럼 생긴 한 협곡을 등반하고 암벽을 따라 내려가다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갑자기 위쪽에서 떨어지는 무게 360kg 정도 바위에 오른팔이 끼었습니다. 어깨로 바위를 밀어보고 로프와 등산용 도르래를 써서 들어 올리려 해 보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닷새를 지냈는데 구조대는 오지 않고, 점점 추위가 몰려와 죽을 지경이 되면서 음식과 물까지도 떨어졌습니다. 이 순간 아론은 이대로 죽을 것이라는 공포 앞에서 중대한 결단을 합니다.

자신의 오른팔을 절단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마취도 없는 가운데 먼저 아래 팔 바깥쪽의 뼈를 꺾었습니다. 이어 몇 분 후에 팔의 아랫마디 안쪽 뼈도 부러뜨렸습니다. 다음은 다용도 칼로 살을 도려내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털끝 하나도 자를 수 없을 만큼 무딘 칼입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고통을 참아가면서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자르는 가운데 마침내 살점이 잘려나가면서 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목숨을 얻은 것입니다. 후에 기자들이 어떻게 생살을 잘라내었느냐? 고통스럽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가만히 누워 죽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아론 랠스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심령이 썩어가는 일에는 그다지 심각히 여기지 않습니다. 영적 감지기가 무디어진 탓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영적 센서가 무디어진 자들에게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 곧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힘들고 아파도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버리고, 죽이라 명합니다.

 

 

 2. 우리가 입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옛 사람의 길은 죽는 길입니다. 반면 새 사람의 길은 사는 길입니다. 옛 사람의 모습,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려야 새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옛사람의 스타일을 벗어 던지고 새 사람을 입기 전에 먼저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04:23). 옛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야 심령이 새로워질 수 있으며, 그때부터 새사람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 같은 마음, 같은 정신을 가지고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면 생각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면 행동이 변화되고, 마침내 인격이 변화됩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지어주신 신령한 옷을 입는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세상 욕심에 끌리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이런 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함에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옛사람의 수준에 머무는 사람을 놓고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였습니다(49:20).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의 옷, 신령한 옷을 입었다면 다시 세상의 옷, 옛사람의 옷을 입으려고 찾아 나서면 안 됩니다.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좋은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훈련해야 경건의 자리에 이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근본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화의 과정을 밟으면서도 때로는 믿음에서 이탈 된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의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신분을 늘 기억하면서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다면 옛 사람의 습관들이 감히 나를 흔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었으니 ~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내 힘과 내 의지로 새롭게 된 것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어떤 다른 힘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는 뜻으로,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후 0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해 봅시다. 옷을 벗는다, 입는다. 는 능동태 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내가 옛 사람의 습관들을 바꾸는 수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욕심과 욕구를 중심으로 몸에 배어 있는 언어와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하는 거룩한 습관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좋은 영적인 습관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3. 지금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습니까?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러분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옛사람의 나쁜 감정들을 내쳐버렸습니까? 아니면 그것들이 계속 자신을 둘러싸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옛 사람의 옷입니까? 새 사람의 옷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무척 적은 것 같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지내면서 여러분의 감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감동함을 받으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잘 안 되었습니까?

은혜의 생활을 하고는 쉽지만 지금까지의 익숙해진 옛사람의 습관 때문에 또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까? 새사람을 입고 살아도 우리의 심령은 죽는 그날까지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사람을 설명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예로 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표현이 있고(04:22~24), 또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고후 04:16). 새사람이나 속사람의 표현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영으로 예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만일 내가 새사람의 신분을 던져버린 체 옛사람, 겉사람의 신분으로 산다면 세상의 옷을 벗을 기회를 미루다 제 곳으로 간 가룟 유다의 길을 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누더기와 같은 세상의 악한 요소, 영혼을 온통 썩게 만드는 옛사람의 것들을 즉각 벗어 던져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한 때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주제로서 웰빙이란 단어를 넣은 각종 문구들이 유행처럼 쓸고 지나갔습니다. 과연 어떤 것을 먹고 어떻게 지내야 진정한 웰빙이 됩니까?

다음으로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사람이 잘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한 만큼 죽음의 순간을 행복하게 맞이하자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웰빙, 웰다잉을 지나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대세입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은 온갖 상처를 치유하자는 말입니다.

가는 곳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부쩍 눈에 들어오는데 음악 치유, 미술 치유, 댄스 치유, 향기 치유, 내적 치유 등 모든 것 뒤에 치유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사회의 프로그램들도 힐링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면서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들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거 다 예수님 만나 새사람으로 태어나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힘입고 살아가는 신앙인은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기도도, 숨은 봉사도, 교회활동도 다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옷 입으면 나는 감춰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게 됩니다. 더럽고 추한 내 모습은 예수님의 의로 감싸지고 오직 예수님만 나타납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입은 바 된 예수님의 옷을 벗어 던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을 때 찾아오는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영원하여서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은혜의 평강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찍부터 욕을 잘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 부부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욕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싸울 때마다 남편은 이년이 하고, 아내는 이놈이 하는 것입니다. 한 날은 싸움을 지켜보던 아이가 아빠, 년이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아빠는, , 그게 어른들이 여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란다 하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놈은 무슨 말이야? 하고 묻자 엄마도 당황해 하면서 그게 어른들이 남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란다. 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가서 욕을 잘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아빠 엄마가 이년이, 이놈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가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 역시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 응, 그게 말이지 잘했다고 박수 친다는 소리야. 라고 답을 해 주었습니다. 옹색함을 면하자는 뜻이겠죠?

유치원에 들어간 이 아이가 학부모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롱 잔치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재롱 잔치가 끝난 후 단상에 올라와 꾸벅 절을 한 다음 이렇게 외칩니다. 이 자리 오신 모든 연, 놈들 다 함께 지랄하고 자빠집시다.

 

한 마디로 교회생활은 하면서도 거듭나지 못하여 옛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 대한 비유라 할까요? 한 주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는 가운데 옛사람의 모습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지키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