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6월 나폴레옹 황제(당시 44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러시아에 진주했을 때의 일입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 장교 한 사람을 생포했는데 그 사람이 워낙 똑똑해 보여서 프랑스군으로 전향하도록 회유를 하였습니다.
이에 러시아 장교는 전향에 대한 회유를 거절하자 프랑스 사령관의 명령으로 병사 하나가 불에 달군 인두를 끄집어내어 러시아 장교의 팔뚝에 영어로 N자를 새깁니다. 러시아 장교가 자기 팔뚝에 새겨지는 글씨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요?
그때 프랑스 사령관이 웃으면서 그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황제에게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은 러시아 장교는 순간적으로 프랑스 병사가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N자가 새겨진 자기의 팔뚝을 잘라 버렸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팔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나는 러시아군 이외에 다른 흔적을 가질 수가 없소. 나는 영원히 러시아 황제에게 속해 있을 뿐이요.
한국 기독교 안에서 유행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노마드(nomad) 교인, 이 노마드는 유목민, 유랑인 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즉 한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유목민처럼 유랑하는 떠돌이 교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노마드 교인으로서 정처 없이 다니다 보니 신천지니 안증회니 구원파니 하는 신흥 이단들의 먹이가 되어 믿음의 파선을 당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한번 등록을 하면 철새교인처럼, 노마드 교인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믿음의 뿌리를 잘 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일입니다.
1. 철새 교인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08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사람이 집을 떠나 방황할 때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이 08절은 공동체를 떠나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공동체의 결속력은 매우 강하여서 만일 공동체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난다면 생존 자체에 심각한 위협을 당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고향을 떠난다는 말을 교회를 떠난다는 말로 적용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영적 적용을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이탈하여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을 노마드 교인이라 했잖습니까? 지금 우리 주변에 보면 이런 방랑자들이 많습니다. 교회생활 하다 조금만 안 맞으면 뛰쳐나가는 사람 말입니다. 계절을 따라, 기후를 따라 적절한 곳을 찾아 찾아다니는 새를 철새라고 하죠?
그런데 이 철새는 자기 일이 끝나면 미련 없이 떠나갑니다. 먹잇감을 따라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철새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철새교인으로 분류합니까?
한 마디로 교회관이 바로 세워지지 않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모두를 피곤하게 합니다. 교회를 떠나 이리저리 유리하는 사람을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고 했는데 떠도는 새, 떠도는 사람 다 같은 의미입니다.
창 04장의 사건이 생각나는 군요.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진 일, 말입니다. 이로 인해 시기를 하는 형 가인은 어느 날 들에 있을 때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는데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가인은 생활 터전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신세가 됩니다.
창 0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가인을 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죄 짐을 지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라고 말하며 방랑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은 신세입니다. 새는 한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알을 낳아서 새끼를 얻을 수 있지 떠돌기만 하는 새라면 그저 떠돌다 죽게 마련 아닐까요?
우리의 주변을 보면 낙심한 이들, 정착하지 못하여 계속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이단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고요? 이런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출발은 좇았지만 비극으로 끝난 데마가 항상 머리에 떠오릅니다.
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미 세상 것들을 던지고 복음의 세계로 들어 온 데마, 그러나 뒤돌아봐서는 안 될 것들을 돌아보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은 바울이 싫어서 떠난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데마가 돌아 간 이 데살로니가는 자신의 고향이요, 항구도시요, 환락의 도시로서 믿음의 차원에서는 죄악의 도시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어느 자리에, 어느 길에 서 있는지 영적 점검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혹 생명의 길에서 이탈하려는 위험에 처하여 있다면 즉각 돌아서야지 그렇지 못하면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처럼 믿음의 파선을 만나고 말 것입니다.
2. 붙박이 교인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시 18: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다윗은 하나님께 오랫동안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특별 기도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 기도 제목이 자기의 생명 끝나는 날까지 이곳저곳을 다니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생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성전에서 숙식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변함없이 믿음으로 영적 교제를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기도제목입니다.
정말 좋은 기도 제목이죠? 이런 기도 제목이라면 오늘의 우리도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즘은 성도들이 이상적인 교회 찾는다고 유랑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상적인 교회를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고요.
죄송하지만 이상적인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 각종 스타일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 더러는 교회의 모든 규칙과 행정도 부담된다고 말합니다.
주일성수도 부담되고, 교회의 각종 모임도 부담되고, 각종 헌금도 부담되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녀보고 싶어 합니다. 혹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한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교회라도 지상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끌어 가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 모두의 욕구를 다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혹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이사도 안 하면서 가까운 교회로 자주 옮겨 다닌다면 이는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 하는 인본주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이 고향인 만큼 머잖아 이 땅의 나그네 생활을 접고 가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때가 되면 옮겨갈 터인데 그때 가서 옮기면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한 번 교회에 등록했으면 노마드교인처럼 이동이나 방랑을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골 02:0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러분은 텃새를 아십니까? 계절 따라, 기후 따라 옮겨 다니지 않고 한 지역에서만 머물며 지내는 참새나 까치, 까마귀, 꿩 같은 새 말입니다. 텃새는 멀리 멀리 나르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계절에 적응하여 살아갑니다.
성도를 지칭 할 때 텃새교인과 철새교인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텃새교인은 올바른 교회관이 정립된 성도로서 함부로 교회를 이동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이 인터넷에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습니다. 저는 올해 학생에서 청년으로 진급해서 20살 성인인 청년입니다. 저희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몇 년 전부터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시고 나이가 많이 드셔서 이제 은퇴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이 은퇴하시게 되어서 이 교회가 나에게 안 맞는다고 생각될 때 저의 마지막 일생까지 섬기게 될 믿음이 좋고 부흥하게 될 것 같은 좋은 교회를 찾아 나서려고 하는데….
좋은 교회를 찾습니다. 알고 계시는 분이나 아니면 자신의 교회가 이런 교회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저에게 추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글들 아주 많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들어서 좋은 교회를 만들려고 않고 그저 잘 갖추어 놓은(?) 곳에 가겠다는 건데 글쎄요? 이런 사람이 들어가면 그 교회는 단번에 시끄러워 질 겁니다.
3. 나는 어떤 스타일로 교회를 섬깁니까? |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교인이 교회를 이곳저곳 자주 옮기는 사람을 영어로 처치하핑(church hopping)이라고 부릅니다. 비신사적인 교인에게 붙이는 명칭인거죠. 사람들은 한 곳에 좀 더 오래 머물러 깊이 몸 담아 볼 생각이나 시도를 미처 해 볼 겨를이 없이 별 영적 유익이 없는 곳으로 쉽게 옮겨 가기를 잘 합니다.
생각보다 몸이 더 빠르다 할까요?
그럴수록 건물이나 목회자나, 회중이 내 욕구를 채워주길 기대하기보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를 가도 실망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일을 놓고는 철새교인인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해 줍니다만 때로는 자신이 그런 대상이 되어 남의 충고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남의 일을 놓고는 비난을 하면서도 자신은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옮긴다고 여깁니다. 환경 따라, 자신의 처지 따라 마음대로 교회를 옮기는 철새교인이 아니라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열심을 품고 충성하는 붙박이 성도가 되십시오.
눅 15장에 나오는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한 날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나아와 정중하게 독립을 요청합니다. 재산 상속분을 미리 해 달라는 건데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사후에나 주게 될 재산을 미리 떼어 줍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멋진 아버지죠? 이제 작은 아들은 받은 돈으로 사업을 벌이기 위해 떠납니다. 아마 세계 최대의 도시 로마로 갔을 것입니다. 집을 떠나면서 야, 자유다, 자유. 하면서 신나게 폼을 잡고 떠났을 거고요.
이런 작은 아들의 판단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서 자기의 기준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 아닙니까? 방탕한 생활의 출발점이요, 자신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한 청년의 몰락해 가는 삶의 서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행복한 곳이었는지, 작은 아들 신분을 가지고 있을 그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곧 깨닫게 됩니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 때문에, 마음대로 해 보고 싶은 매력 때문에 아버지의 품을 떠났으나 막상 그 길은 고통과 절망의 길이었고 눈물과 한숨의 현장이었습니다.
딤후 04:0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0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 1970)이 부른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란 노래가 있습니다. 팬 플랫 연주로도 되어 있고요. 제가 가끔씩 듣는 곡인데 철새는 결국 날아가고 맙니다.
철새교인도 결국은 날아가고 맙니다. 그러면 나는 철새교인이 아니라고 여깁니까? 철새교인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내 믿음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덕스럽지 못한 철새교인이 되어 휑하니 날아가고 맙니다.
주를 섬기라. 여러 사본들을 종합해 보면 매우 급박성을 가지고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섬길 것을 권합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담금질을 하면서 주인의식으로 교회를 섬깁시다.
하나님, 우리 김해삼일교회를 내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이런 기도로 내 믿음을 뒷받침해야 해야 합니다. 환경 따라, 자신의 처지 따라 마음대로 교회를 옮기는 철새교인과 같이 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김연숙씨가 쓴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 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장로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상적인 교회라고 판단되어 등록을 하면 그날로부터 은혜 받으려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단점을 찾는 생활부터 먼저 합니다. 우선 목사의 허물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교회주보, 찬양대, 주방의 봉사자들, 성도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사람이 병으로 죽게 되자 장례식이 문제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죽기 전 108번째 교회의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집례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때가 바벨론 포로 70년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다 민족들은 한없이, 한없이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짓습니다. 또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서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며 수없이 울기도 했습니다(시 137:01). 왜 울었습니까?
육신의 고난 때문에 그렇게도 목 놓아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리워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하던 그 때가 그리워서 울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몸은 와 있어도 마음이 오지 않았다면 이 시간 돌아와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가 권하는 말씀을 듣고 돌아와야 합니다.
욜 0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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