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브루너(Emil Brunner,1889~1966, 스위스의 변증법 신학자)가 친구와 신학적 의견의 차이로 관계가 멀어지다 나중에는 원수처럼 되었습니다. 1년 이상을 말을 않고 왕래도 없이 지내던 중, 설교말씀 가운데 은혜를 받고 친구에게 화해의 편지를 썼습니다. 다섯 통을 보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친구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다렸지만 그 친구로부터는 계속 답변이 없었습니다.
브루너는 큰 결단을 하고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 어느 추운 겨울 날 집을 나섰습니다. 친구는 눈보라 속에서 자기 집 문 앞에 서있는 브루너를 보는 순간 얼음장 같았던 마음은 녹아지고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브루너 자신이 편지가 되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 할 때는 말과 글로서의 의사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활로, 나를 보내신 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당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며, 성도들이 손에 성경을 들고 걸어가면 그것은 교회가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즉 예수님의 편지가 움직인다고 표현해도 될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편지가 되어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는 말의 배경을 봅시다. |
0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초대교회 시절에는 각 교회들마다 지도자를 모시는 일에서 추천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바울의 뒤를 이어 오게 된 지도자들이 교회의 센터 역할을 하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신임장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말라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고린도교회에 목회 지망자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왔는데 온갖 좋은 말로 가득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위에 그들은 자천서를 내어놓았습니다.
자천서를 다른 말로 설명하면 이력서를 겸한 자기 소개서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출신, 학벌, 경력 등이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추천서를 보고 지도자로 모셨는데 나중에 보니 유대주의 거짓 교사로서 이단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고린도교회 지도자로 들어온 그들은 전임자이며 교회를 세워 사역한 바울을 서서히 흠집을 내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신학 사상과 자기들의 신학 사상이 달랐기 때문인데 정통 신학에서 보면 자기들은 이단적 사상을 가진 다른 복음주의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흠집 내어 신학 사상이 잘 못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사람들 추천서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유력한 사람들의 추천서가 없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폄하하고요.
바울 그 사람은 변변치 못한 자이니 그 말을 듣지 말라는 식인데, 바울이 누구입니까?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여 1년 6개월을 목회하였고, 그곳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방문도 하고, 때로는 편지를 써서 문제 해결을 해 주었던 분입니다.
이런 분을 놓고 거짓 지도자들의 부추김에 일부는 바울을 놓고 별 것 아닌 사람으로 여기고 입방아를 찧으면서 좀 무시를 합니다. 앞으로 관계도 끊자고. 이렇게 하면 안 되죠? 이런 식의 말들이 바울의 귀에 안 들어갑니까?
결국은 다 들어갑니다. 이에 이 말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추천서와 소개서를 보내야겠느냐고? 바울은 여기서 추천서의 유익한 점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추천서나 자기 소개서는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 잘 모를 때 차선책으로서 참고하는 것으로 지금 고린도교회에 새삼 바울의 추천서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사도의 자격으로 선교지를 다니면서 사역하는 가운데 복음의 기초를 놓는 일을 하다 보니 그런 추천서가 자기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추천서의 유무를 논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적 요소라고 주장하는 유대주의 이단으로서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그들의 술책입니다.
마침내 바울은 거짓 지도자들의 부추김으로 추천서와 자천서가 없다는 것을 문제 삼아서야 되겠느냐고 정중히 책망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합니다. 나는 예루살렘교회의 어느 권위 있는 지도자로부터 위임이나 추천서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사명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고전 01:0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갈 01:01).
학교에 입학허가를 받기 위해서, 또 졸업한 다음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추천서가 요구되는 때가 있습니다. 당사자를 잘 아는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여 쓴다면 지원자의 인물 됨됨이나 내적 품성을 몰라도 이력서만으로 채용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가 추천서는 요식(要式) 행위인 것 같습니다.
추천서를 부탁할 때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해 줄 사람에게 누가 써 달라고 하겠습니까? 요청을 안 합니다. 저도 가끔 추천서 부탁을 받는데, 어떤 추천서는 써 주고 나도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냉정한 추천서를 쓰면 그 사람에게 손해가 될 같아 눈 딱 감고 좋은 문구를 써 줍니다.
2. 나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까? |
0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바울은 02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우리의 편지라고 부른 후 0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따로 추천서가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자체가 바울의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문서적인 추천서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현재의 모습을 추천서로 해석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온 그 거짓 교사들이 내 세우는 인간의 권위와는 달리 거듭난 성도들로 인해 나타난 추천서, 바로 성령님의 추천서를 바울은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고린도전서, 후서를 읽어보면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는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잘 이해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율법 준수나 할례 같은 것들을 구원의 조건에 포함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를 대조시키면서 설명을 하는데 03절을 잘 보십시오.
0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거짓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잉크로 쓰여 진 것이나, 바울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음 판에 쓰여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 진 것이므로 제한 된 사람에게만 보이나, 바울의 추천서는 사람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이므로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바울의 추천서는 사람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어서 영원한 것입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 훌륭한 선생은 그의 교훈을 희미해질 잉크로 쓰거나 글자로 쓰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는 제자를 찾아 그 마음에 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여야 합니다. 그것도 먹으로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영혼에 새겨 놓은 편지 말입니다. 편지의 목적은 보내는 사람의 뜻을 받는 사람이 읽고 이해를 잘 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편지가 읽혀지지 않거나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다면 편지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교회를 나타내기 위한 편지요 광고판으로 택한 것입니다.
또 편지를 육의 마음 판에 썼다고 말합니다. 한 번 쓴 후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쓴 것이기에 생각날 때마다 읽고 기도하게 합니다. 김삼일 가족들 한 분 한 분이 그리스도의 편지의 내용물이며, 이 편지의 내용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짐작합니다. 바울은 고후 02:15절에서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0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냄새와 혼합되는 악취(惡臭)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 나오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 편지의 내용물로 인정하십니다. 동시에 사랑의 편지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히 나타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편지의 내용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대체적으로 그 물건의 상표를 보고 결정합니다. 믿을만한 회사의 상표가 붙어 있으면 일단 신뢰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브랜드 가치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다 하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일본의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도요타(1937년 설립) 차종 렉서스 ES350을 운전하던 중 가속페달이 매트에 걸려 급가속 상태로 이어지는 바람에 일가족 4명이 죽었습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도요타 회사는 2010년부터 무려 1,100만 대 정도가 리콜을 당하였습니다.
리콜이 되면 재정 피해도 엄청나고 명성도 크게 잃습니다. 한 순간에 브랜드 가치가 추락하여 회사 경영에 위기가 왔으며, 아직까지 회사 정상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리콜을 당하는 재앙이 발생하였을까요? 정밀 조사 결과 이렇게 된 데는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 위에 안일과 교만과 방심이 덧 씌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들은 걸어 다니는 예수님의 광고판이요 상표입니다.
교회의 명예와 예수님의 명예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가치도 올라가고 있습니까? 김삼일의 브랜드 가치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올라가지 않고, 오직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현실에서 실천할 때 올라 갑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3세기 경 로마에 밸런타인(Valentine)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밸런타인은 매일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밸런타인이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특출한 재주를 한 가지 씩은 가졌는데 내게는 그런 특기가 없습니다. 그것이 슬픈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밸런타인에게 문득 한 가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자, 이런 각오를 하고 매일 사랑의 편지를 써서 직접 사람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나뭇잎에 사랑의 편지를 쓰면 비둘기가 그의 편지를 배달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감동과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지 5년 후 밸런타인은 사랑의 전령사로 큰 명성을 얻었고, 순교한 후에는 성자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그가 순교한 날에 그의 뜻을 기려 서로 사랑과 격려의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 날이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입니다. 지금은 초콜릿을 보내고, 먹는 날로 변질되었지만 원래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로 인간의 영혼과 삶을 구원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지를 보내고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편지를 주고받아 보았습니까? 일반적으로는 종이에 글을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보내겠죠? 그런데 요즘은 통신 산업의 발달로 편지를 주고받는 방법도 다양하고 신속합니다. 팩스나 컴퓨터를 통한 이 메일, 휴대폰을 통해서도 편지를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무료로 주고받습니다. 어떤 매체에서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정말 편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에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의 편지를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전해주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병고로 힘들어 하는 자에게는 능력의 편지로 가야하며, 실패한 자에게는 승리를 약속하는 편지로 가야하며, 가정불화로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화목의 편지로 다가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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