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나는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까?(습 02:01~0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7. 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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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밤, 가족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손자와 할머니가 마주보고 앉아 있습니다.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는 가운데 어린 손자가 소리를 칩니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식사를 하다 호들갑을 떠는 손자를 점잖게 꾸짖습니다.

얘야, 밥을 먹을 때는 조용해 해야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할머니 급한 일인데요. 참고 있다 밥을 다 먹은 후에 말을 하렴. 그러자 손자는 그게 아닌데 하면서 묵묵히 식사를 합니다. 드디어 식사를 다 마친 후 할머니가 손자에게 묻습니다.

얘야, 아까 급한 이야기라고 한 게 뭐냐? 이제 말해 보렴. 손자는 힘없이 대답합니다. 이젠 때가 늦었어요. 때가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까 할머니 국에 파리가 한 마리 빠져 있었거든요. 그걸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 파리는 할머니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뭐야?

 

누구든지 잘 듣는 것이 중요하고, 들었을 때 지혜롭게 처방을 내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시간은 지나고 나면 그때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선지자 스바냐는 므낫세 왕의 통치 때 창궐하였던 종교 혼합주의를 책망하여 요시야 왕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국제적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유다 왕국까지 침략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때이고 국내적으로는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서서히 진행하던 때입니다(왕하 22:01~23:20).

이런 상황에서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을 선포하여 백성들이 죄악에서 돌아오면 살길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메시지를 나를 향한 메시지로 받기를 축원합니다.

 

 

 1. 지금은 모여야 할 때입니다.

 

0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로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문구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를 짓고도 양심이 마비되어 뻔뻔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진 유다 백성아, 이 말입니다.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어디서 모여야 합니까?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전에 모여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후에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하나 유다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제사와 신령한 모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세상적인 것들이 백성들의 생각을 점령하였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 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선포 되어 심판이 목전에 놓인 때입니다. 심판이란 나라가 문을 닫는다는 그런 뜻으로 한 마디로 망한다는 말이에요.

 

신령한 모임이 무너지면 그 곳에는 형식이 찾아오고,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중단되고, 은혜의 기도가 막히는 영적 답답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와 있는데도 영적 센스가 무디어진 까닭에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 꼬. 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미국에서 사용되어지는 농담 중에 뿌려지는 크리스천(Sprinkling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평생에 세 번 정도 교회와 연결 된다는 뜻인데, 어린 시절 유아 세례식 때 물이 뿌려지고 결혼식을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설 때 쌀이 뿌려지고 장례식의 하관식 마무리 절차에서 흙이 뿌려지는(取土) 것을 말합니다.

유럽에선 네 바퀴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네 바퀴만 타고 교회 오는 신자란 뜻으로 유아 세례식 때 유모차를 타고 교회에 오고, 결혼식 때 네 바퀴 자가용 타고 교회 오고, 죽어서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네 바퀴 영구차를 타고 교회에 온다는 뜻입니다.

 

일생에 세 번만 교회 나온다는 뜻의 예로서, 교인이기는 하나 교회에 잘 출석을 하지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이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의 현실만 보아도 모이는 생활에 다소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의 믿음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를 통하여 성숙해 갑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 좋은 것을 찾는다며 예배를 등한히 하는 헛수고의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예배의 모임이야말로 복중의 복입니다. 예배를 통한 은혜와 기쁨의 생활이야말로 신실한 성도의 표시 아닙니까? 우리는 예배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입니다. 왜 사소한 구실로 공동체 모임이나 예배를 등한히 합니까?

손님이 왔다고요. 아이가 아프다고요. 거래처 고객이 왔다고요. 몸이 너무 피곤하다고요. 그래도 예배와는 바꾸지 마십시오.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할 것이 아니라 더욱 열심을 회복하여 신령한 모임 쪽으로 자리 이동을 하십시오. 차차, 천천히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2. 신령한 모임을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0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 할 지어다.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겨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불살라져 사그라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시간은 한번 지나면 다시 되돌릴 수가 없고, 또 사 올 수도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의 때라고 여겨지면 더욱 잘 관리하고 받들어야 합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그토록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아 가는 것을 아시지요?

젊음을 빼앗고, 순수함을 빼앗고, 든든한 허리도, 명석한 기억력도, 아름다움도, 탱탱하던 피부도 다 빼앗아 갑니다. 대신 그 위에 주름살을 하나를 덧씌워 놓는데 그래서 세월이 남긴 것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절대로 펼 수 없는 목주름입니다. 이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눈물겹지만 별 도리 없습니다.

 

인생살이의 모든 때를 잘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이 정하신 때, 그 가운데서도 신속한 때가 있고, 또 사람이 분명히 놓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때를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연같이 여겨질 수 있으나, 성도의 관점에서 보면 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게 할 수 없는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죽을 때를 어떻게 알겠으며, 자기의 병들 때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일에는 다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만일 그 시기와 때를 놓쳐 버린다면 실패한 자의 자리, 낙오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건강이 있을 때 열심히 믿음생활 하지 못하면 나중에 육체의 병 앞에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이 있을 때 헌금하지 못하면 가난해 질 때 후회할 것이고, 은혜생활의 기회를 허비하면 나중에 무능한 자가 되어 후회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나중이 아니라 현재이고, 지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와서 잠깐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현재 주어진 일이 있다면 그것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마다 세 개의 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달력 삼백 365일로 된 달력입니다. 집집마다 걸려 있을 것입니다. 마귀가 만든 내일이라는 달력입니다. 이 달력은 안방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데 한 장 들추면 정월 초하루가 아니라 내일이 나옵니다. 또 한 장 들추면 내일, 그렇게 해서 일 년 365일 전부가 내일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믿음의 성도가 가지고 있는 달력입니다. 이 달력은 첫 장을 들추어도 오늘, 또 들추어도 오늘, 계속 오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달력도 오늘이지요. 혹 내일은 아니지요

 

 

 3. 신령한 모임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심판을 면합니다.

 

0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를 찾으며.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좁게는 기도한다는 뜻이고, 좀 더 넓게는 기도를 넘어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믿음의 감각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장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던 영적 초점이 세상으로 향 할 때도 있습니다. 무기력한 믿음으로 지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여러 상황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면 우선 영적 파선과 같은 상황을 만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들 앞에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무엇보다 믿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십시오. 믿음의 중심을 세우는 첫 단계가 여호와를 찾는 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영적인 일입니까? 아니면 육적인 일입니까? 신령한 세계의 영적인 문제를 열기 원한다면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도 여러분, 내 삶의 터전이 황무합니까? 내 삶의 구조가 전반적으로 흔들리는 것 같습니까? 주님을 향한 가슴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로 영적 혼란이 내게 찾아 올 때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일로 정해야 합니다.

 

대하 0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 지라.

 

마틴 로이드 존스. 사람이 무릎을 꿇었을 때 가장 높은 경지의 위대함이 나타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권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오직 기도라는 파이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라는 기어가 들어가야만 우리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직장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사업장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중보 기도의 파트너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의 물을 주면 그때부터 살아납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도 기도의 물을 주면 능히 살아납니다. 어떤 환경이라도 기도의 물을 주면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하나님을 찾는 일에 전념할 때 놀라운 은혜를 맛 볼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은혜로운 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즐거움을 잃어 가고 있습니까?

혹 삶의 터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시행되는 것 같은 예감이 듭니까? 그럴수록 내 입술에 기도의 불, 말씀의 불, 찬양의 불을 붙여서 하나님과 관계, 얼굴과 얼굴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게 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열리는 복을 체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5:0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0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0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중년 남자가 한적한 해변 길을 거닐고 있을 때, 파도가 쓸고 간 모래 사장에 뭔가 뾰족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주전자입니다.

중년 남자는 뚜껑을 열자마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속에 갇혀있던 종이 연기와 함께 나타나서는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서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중년 남자는 종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꼭 1년 후의 석간신문을 나에게 가져다주게. 이 남자는 일 년 후의 주식시세를 미리 알아서 그곳에 몽땅 투자를 하여 큰 갑부가 되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 가져다 준 신문을 기분 좋게 읽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창백해집니다. 그것은 주식의 시세를 알리는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 게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육신의 일에만 집착하여 마지막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오자 다시 삶을 정리하여 새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세상일에 얽매여서 세상 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따라 가오리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잃었습니까? 아니면 아직 열심을 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습니까?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으니 내게 주어진 기회가 홀연히 지나가기 전에 믿음의 결단을 합시다. 하나님을 찾는 곳에 신령한 웃음이 찾아오고, 하나님을 등진 곳에 슬픔이 찾아옴을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