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맥추감사>감사의 제사를 드립니까?(시 50:22~23 )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6. 2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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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백화점에서 오픈하기 30분전에 전 직원을 백화점 입구에서 집합을 시켜 놓고 매일 인사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고객님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백화점 문을 엽니다. 이어서 고객들이 들어오면 직원들은 허리를 90도로 굽히면서 인사합니다.

고객님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를 연발할 때 그 모습이 지극히 형식적인 것 같아 보이지요. 그런데 놀랄만한 일은 처음에는 어색하고 형식적인 인사 같지만 계속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좀 큰 매장은 다 그렇게 합니다.

 

행동이 그 사람이 생각을 바꾸어 주는 좋은 예입니다. 다음주일은 일 년의 전반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는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2014년 전반기 동안 감사거리가 얼마나 있는 것 같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매일 매일이 감사거리지만 불평의 눈으로 보면 일상생활 거의가 원망 일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만 하면 감사가 내 심령에 자리를 잡아서 감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그저 감사헌금 한 번 더 하는 정도로 생각합니까? 나는 보리농사나 밀농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맥추감사절을 지킬 것이냐고 생각합니까? 저는 현대인의 맥추감사절에 대한 영적 의미를 강론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맥추감사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 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감사의 마음, 복된 마음으로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신약시대에는 예배가 가장 신앙의 중요한 표현이지만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특별히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의 세 절기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제사 종류만 해도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 곡물 가루로 드리는 소제, 감사와 나눔의 화목제, 자기 죄를 속하는 속죄제, 성물들을 거룩하게 하는 속건제 등 5대 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피의 제사를 제정하여 우리에게 지키라 하십니까? 이를 통해서 우리 의 죄가 속죄함을 받으며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질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수많은 짐승들을 바쳐야 하니 이것이 죄를 지은 자에게는 부담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만 해도 수백만 아닙니까? 그들이 양이나 염소 한 마리씩만 바쳐도 성전에서는 쉴 새 없이 짐승 잡는 소리와 피 냄새, 고기 타는 냄새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06:0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은 물질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손으로 물질을 드리라 하십니까? 그것은 물질을 통해서 표현되는 우리 마음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물을 바치면서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마음 말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이 말씀에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생략된 것 같습니까?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감사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가됩니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라는 용어에는 희생을 포함하는 의미가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 할 때는 반드시 물질의 희생도 함께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릴 동물을 죽여 끌고 오는 외형적인 물질의 희생도 있지만 근본은 하나님께 대한 희생과 감사를 은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그냥 감사라고 하지 않고 감사의 제사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희생이 있는 제사 목적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을 적용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도록 드리는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제사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도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04:03~05).

 

이슬람교도인 한 이집트의 가난한 농부가 자기 신인 알라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알라 신에게 돈이 필요하니 200파운드만 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편지를 본 집배원은 수신자가 알라 신이므로 자기의 상관인 계장에게 보냈습니다. 계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우체국장에게, 국장은 장관에게 보냈습니다. 장관은 알라 신에게 보낸 편지를 마음대로 버릴 수가 없어 망설이다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대통령은 나세르(Nasser,1918.1.15~1970.9.28)이었는데 대통령은 농부의 딱한 사정을 듣고 100파운드를 우송하였습니다. 이제 농부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감사가 아니라 벌컥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알라신은 분명히 자기가 요구한 200파운드를 보내셨을 텐데 대통령이 중간에 100파운드를 떼먹고 100파운드만 보냈다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없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2. 감사의 제사는 늘 드려야 합니다.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성도가 받는 복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부터이며, 그때부터 일들은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풍요와 편리함속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은 불평으로 가득 찰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현재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과 원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통과 번민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흔들리는 동안은 힘들지만 견디고 나서 돌아보면 그 고통의 시간이 나를 성숙하게 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행복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잡으며,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고,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환경에 따라 믿음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망증이 심하여서 감사와 찬양을 해야 할 순간에도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간 종살이를 하다 모세의 인도로 나와 광야생활 40년을 행군하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의 일정들을 보면 감사의 현장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먼저 감사의 지침서를 정해 주십니다. 옛날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의 처지를 항상 잊지 말 것이며, 그때의 고난의 시절을 돌아보면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과거의 쓰라림의 세월 속에서도 사랑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세월을 돌아보십시오.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여기까지 잘 지내왔지 않습니까? 모두가 은혜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잘못 지내온 것 같다는 생각이라도 듭니까? 만일 그렇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무능함 때문 아닐까요? 이만큼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0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남편을 잃은 가난한 아주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호떡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잖은 신사가 다가왔습니다. 호떡 하나 얼마입니까? 천 원인데요. 신사는 천 원만 놓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도 신사는 호떡은 안 가져가고 천 원짜리 한 장만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1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사는 다녀갔는데 어느 날 천 원을 놓고 가는 신사를 아주머니가 불렀습니다. 뭔가 말을 할 듯 말듯 망설이다가 겨우 말을 합니다. , 호떡 값 올랐는데요. , 이 아주머니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 아닐까요?

 

사람에게 영적인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얼마만큼 감사하며 사는가? 어디까지 감사하며 사는가를 보면 됩니다. 지금도 맥추감사주일이 부담스러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빠지고 헌금만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 몰라서 그런 것 아닙니까? 전반기를 돌아보는 감사의 마음을 회복 합시다.

 

 

 3. 여러분은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까?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그 분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또 죄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는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시고 용서하십시오.

감사할 일이 있거나 인사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꼭 찾아서 감사와 인사를 전하십시오. 우리네 인생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리고 만사는 때가 있습니다. 비록 오늘은 힘이 들고 고통스럽지만 원망이나 불평보다 감사하며 살면 머지않아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복의 은총을 입어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중에서 thank you28%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증거이죠. 성인이 되면 평균 26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언어가 감사합니다. 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언어도 역시 감사합니다. 입니다. 그러면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까?

 

0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어디에 근거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고후 09:08) 라는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를 넘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으로는 오히려 건강이 여의치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독신의 은사를 받아 일생을 홀로 지내다 보니 가정에서 오는 아늑한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전도자입니다.
복음의 순례자로서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평안히 쉴 곳 없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감사의 제사가 떠나지 않았던 것은 환경의 조건들을 감사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를 돌아보면 항상 감사 할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요즘 같은 환경에서는 불평할 일이 더 많을는지도 모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운 환경이겠지만 그럴수록 감사의 거리를 찾는 영의 눈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십시오. 감사의 생활이 나를 사로잡을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눈에 감사거리로 다가 올 것입니다.

성경에 감사라는 말이 무려 196번이나 나오는데 감사라는 단어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기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감사와 찬양과 기쁨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에 실패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원망이 체질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성공하는 사람이 특징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 감사의 제사는 큰 환난까지도 바꾸는 힘을 발휘합니다.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이 있음을 믿으시면 그 믿음이 더욱 큰 감사 거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망은 불신자들의 휴대품인줄 아십시오. 반대로 감사의 제사는 신앙인의 휴대품인줄도 아시고요. 심령의 감각이 살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감사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집에 욕심 많은 주인과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동이 트자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머슴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저 녀석이 산에 가서 빈둥거리며 놀지 모르니 오늘은 뒤를 밟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몰래 뒤를 밟았습니다. 산 중턱 쯤에 이르자 머슴을 뒤따르던 주인이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자 도저히 못가겠다고 생각하고 나무 밑 바위에 앉아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기겁을 하고 달아나려 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욕심 많은 주인은 곰을 보는 순간 이렇게 빌었습니다. 목숨만 건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곰이 기우뚱거리며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하인이 곰의 등을 도끼로 후려치고 있는 것입니다.

곰은 죽었고 머슴과 주인은 죽은 곰을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주인은 곰의 가죽을 잘 벗겨서 팔려고 시장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주인의 얼굴빛이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을 불러놓고는 야, 이놈아, 도끼자국 때문에 반값도 채 받지 못했다 하며 화를 내는 것입니다.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와 불평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면 할수록 더욱 불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불평은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평의 일들이 쌓여가고, 반면 감사는 고백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과 복들이 눈덩이처럼 불어 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보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물질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충성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