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이력서를 경영 컨설팅 전문회사에 의뢰하여 정밀 조언을 받은 것처럼 상정해서 만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귀하! 당신이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검사 자료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학력이 낮고 단체생활을 할 능력이 없으며 협조 정신도 약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신적 안정성이 빠져있고 성격도 과격해서 좀 지나친 부분이 많고, 안드레는 한 마디로 무능하여 다른 사람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 못 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자기들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하며,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도 많지만, 추진력을 가지고 일할 사람은 아닙니다.
마태는 자기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분자들로써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귀하가 이룰 온건한 기업에는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랑은 단 한 명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 있고 사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경영 감각이 있고 상류층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예의와 기풍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소는 가룟 유다 한 명만 추천하고 나머지는 다시 찾을 것을 권고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가장 유능한 제자는 가룟 유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 왜 그다지 내세울 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선택하셨을까요? 아무리 부족해도 예수님은 좋은 일꾼을 만드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표본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 역시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열두 제자처럼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열두 제자가 주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쓰임을 받는지 또 크게 쓰임을 받은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전도자의 나아가는 길」입니다.
1. 은혜로 쓰임 받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
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30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은 마 10:02~04, 막 03:16~19, 눅 06:14~16에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직업이 세리인 레위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나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열두 제자 명단을 작성할 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서열과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열두 제자 출신 마태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러면 세리 출신인 자기를 은근히 좋은 쪽으로 미화시켜서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가나 누가보다 자기의 이름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도 마태는 자기 이름을 제2그룹에 올립니다.
막 03:18, 마태와 도마, 눅 06:15 마태와 도마, 마 10:03 도마와 세리 마태, 이런 이름의 서열을 보면 마태가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마태가 자기 이름만은 2그룹 제자들 가운데서 조금 서열을 앞당기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닙니까?
오히려 마가나 누가보다 자기를 한 단계 더 낮게 기록하였습니다. 거기다 마태는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자기의 직업까지 밝힙니다. 그렇게 떳떳한 직업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는 본명이 레위입니다(막 02:14). 마 09:09 절에서 자기는 세리의 일을 하는 사람임을 밝힙니다. 이어서 본문 03절에서 열두 제자의 명단을 작성하면서 자기 이름에다 세리를 붙입니다.
제자들의 명단에 직업이 기록된 제자는 마태가 유일합니다. 왜 마태는 제자들 명단을 기록하면서 유독 자기의 직업을 밝힙니까?
자부심을 가질 만큼 좋은 직업이어서 기록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세리는 당시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받으며 매국노 취급받는 직업입니다. 마태는 이 직업만큼은 감추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나 누가는 예의상 마태의 직업 세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기 직업이 내세울 만한 직업이 아님에도 의도적으로 밝힙니다. 왜 그러합니까? 당시 마태가 근무하던 가버나움 세관을 봅시다.
이곳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삼은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곳입니다.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있습니다.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일한 경력을 이력서에 남기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태는 자기의 직업을 굳이 공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나름대로 나같이 못난 사람도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제자로 불러서 사용해 주신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자기를 불러 주님 제자로 삼아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직업을 공개하는 겁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님은 천대받는 사람도 순종만 하면 영광스러운 제자로 삼으십니다. 부끄러운 과거로도 주님을 간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영어권 사람의 이름을 봅시다. 열두 제자의 이름을 딴 예가 많습니다. 베드로(Peter), 야고보(James), 안드레(Andrew), 요한(John), 빌립(Philip), 마태(Matthew) 도마(Thomas, Tom), 시몬(Simon) 그들의 출발은 미미했지만, 주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복된 생애가 되었습니다.
2. 길 잃은 영혼을 찾아가야 합니다. |
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0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01). 05절에서는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하고 말씀하십니다. 01절은 제자를 부르신 것을 말하고, 05절은 제자들에게 임무를 주어 보내신 일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모아놓고 훈련만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받은 후에 복음의 터전으로 가서 일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예배에서 은혜받고, 각종 성경 공부와 훈련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01절에서 주님은 열두 명을 제자라고 부르고 02절에서 사도라고 칭합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고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열두 제자가 보냄을 받아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다(06).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을 하십니까?
이는 마 09:36 절에서 유대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생명과 진리가 없는 곳에서 헤매는 상황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마 0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따라서 06절에서 이스라엘 집으로 가라는 말씀은 이방인을 제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시적 명령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먼저 전파되어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복음 전파는 나중 예수님께서 지상 명령을 통하여 맡겨주셨습니다(마 16:15; 행 01:08).
이 시간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예, 이미 주님께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으니 이 지상 명령을 감당하는 말씀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입니까? 아직도 유대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을 합니까? 이스라엘의 양에게는 잃어버린 양에 걸맞은 세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향 감각이 제대로 없고, 방어 능력이 거의 없고, 잘 뒤집히며, 뒤집히면 목자가 일으켜 세울 때까지 그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길 잃어버린 양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인생은 영혼이 있습니다. 넘어졌으면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영혼의 목자가 되신 주님께 돌아오기까지는 잃어버린 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예배와 각종 성경 공부를 통하여 훈련을 시키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길 잃은 양과 같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세우기 위합니다. 교회에서 잘 믿고 있는 사람, 은혜 생활 잘하는 사람들 빼 오기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친 영혼들, 낙심한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을 데려오는 일에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명 의식을 우선순위로 삼으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천국만 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더러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믿음도 부족한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고? 내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남한테 전도하느냐고? 오히려 새 가족 수준일 때 전도는 더 잘합니다.
3. 가는 곳마다 평안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목사님, 교인들은 어떤 집이든 들어가면 기도하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무엇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예, 이에 대한 답이 오늘 12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전도 여행을 하시면서 어느 집에든 들어가면 먼저 그 집을 위하여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도 가정에 들어가면 잠시라도 묵상 기도를 합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다른 환경을 만나든지 그곳에 평안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까? 어떤 물질보다 더 가치 있는 선물을 하는 셈입니다.
주님은 그 집에서 평안의 복을 빌 때 그 가정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그대로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혹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복을 빈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므로 서로가 격려의 삶을 원한다면 축복하는 일에 익숙해야 합니다. 거절당하고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항상 축복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축복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삭막한지 모릅니다. 말을 한마디 해도 거칠기가 짝이 없습니다. 꼭 독기를 품은 사람처럼 항상 모든 사물을 보는 시각이 삐딱하기만 합니다.
힘드니까 그런지, 아니면 세상이 싫어서 그런지, 말 하나하나 하는 것도 거의 부정적입니다. 좀 저속한 말이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놈의 세상 어디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얼른 망해 버려야지, 이 빌어먹을 썩은 세상 하면서 입도 행동도 점점 거칠어만 갑니다.
거친 말을 해서는 세상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욕을 해서도 교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거친 말, 복과 관계가 없는 말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합니다.
꼭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주변 환경부터 서서히 축복의 터전으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축복의 상황이 아닌데도 꼭 축복해야 합니까?
13절은 부메랑효과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잘 보십시오. 한탄하면서 사는 사람은 결코 성공의 자리를 만들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말이 오히려 자기에게 돌아와서 결국은 그 말속에 자기가 갇힙니다.
신앙인은 비록 좀 힘들고 역경에 처할지라도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활이 좀 힘들다고 해도 늘 희망이 얼굴에 묻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신앙인은 까칠한 독기가 없어야 합니다. 축복하며 사는 곳에 분명히 천국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기업에서 사원들에게 주는 스톡옵션 제도가 있습니다. 월급 외에 주식을 옵션으로 주어서 사업 성과가 좋아 주식이 올랐을 때 그 차액을 받는 제도입니다.
스톡옵션을 받는 사람들은 업무량이 많아도 일을 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을 잘해서 결과가 좋으면 그만큼 보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고 인간관계에서 평안의 복을 빌면 은혜의 스톡옵션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일은 실천하면 반드시 축복의 대가가 옵니다.
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나를 위한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험하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한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있는 일에 매달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중국 역사를 보면 황제는 남성입니다. 그런데 단 한 명 예외가 있었습니다. 당나라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나중에는 황후에 올랐다가 그의 놀라운 야망을 이용해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1.23.~705.11.2.)입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60km 떨어진 건릉에 당나라 고종과 그의 황후 측천무후가 묻혀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측천무후 공적비에 글자가 하나도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왜 이런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습니까? 그 이유는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날 무렵 자기의 업적이 너무 많아서 비석 하나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테니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비워 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후에는 누구든지 행한 결과를 놓고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왕이면 행한 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세상 평가는 정확할 수도 있고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길을 가는 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책을 통하여 받게(계 20:12) 될 평가에 예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복을 빌어주면서 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 원리를 따라 우리 전도자의 삶이 영혼을 구하는 데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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