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Rembrandt, 1606,7,15~1669,10,4 네덜란드)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라는 유명한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고, 그 모퉁이에는 그림자에 가려 겨우 알아 볼 수 있는 얼굴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미술가들은 이 사람을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렘브란트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간접으로 고백하는 셈이지요.
기독교의 절기로 맞이하는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며,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골고다(마 27:33; 요 19:17)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 죽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주간임을 아시고 한 주간 새벽기도회 잘 감당하면서 경건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33절 말씀에 해골이라고 나오는데 다른 말로는 골고다입니다. 그러면 왜 해골이라 부릅니까?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 언덕이 해골을 닮아서,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들의 시신을 치우지 않음으로 인해 수많은 죽음의 해골들이 방치됨으로 인해서 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Calvary(해골의 아람어)라고 합니다. 이곳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 개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양쪽의 행악자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골고다의 세 개의 십자가로 정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회개가 없는 강도의 십자가. |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방법은 흉악범을 처형하는 극형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두 강도가 그렇게 처형되었습니다. 그 중 회개하지 않은 강도는 양심의 법에도 어긋나고, 국법에도 어긋나며,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합니다. 39절을 보면 이 죄수는 마음이 완악하여 마지막까지 뉘우치거나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이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일그러진 얼굴로 이빨을 막 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 세상을 저주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이 강도는 육신의 생명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의 영혼까지 멸망하여 지옥의 형벌아래 놓인 대단히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회개가 없는 이 강도, 예수님의 음성을 곁에서 직접 듣고도 회개를 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행적으로 보아 이런 사람은 태어나지 아니하면 좋을 뻔 한 사람입니다.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죽어가면서도 어디서 힘이 나는지 예수님을 향해 지독히도 비방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나도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회개의 생활은 없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죄인은 죄인이되 죄를 알고 피해 다니는 죄인이어야 합니다.
롬 0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970년대 중반에 17명의 생명을 빼앗은 김대두라는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그가 사람을 죽일 때 250원 때문에 사람을 죽인 아주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있는 동안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질이 너무나 흉악한지라 구제를 받지 못하고 1976년 12월 28일에 사형집행을 당하였는데 그가 사형 직전 세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①첫째는 자신은 재판 받기 전에 죽을 몸이었는데 지금까지 살게 된 것과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②둘째는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을 사회가 냉대하는데 출소한 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십시오.
③셋째는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분과 피해 받은 자들, 유가족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을 지도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한 뒤에 찬송가 387장을 부르고 죽습니다.
①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그러나 회개가 없는 이 강도는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인정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저주스러운 일이지만, 주님과 함께하는 영광된 자리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는 인생이니 진정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아닙니까?
2. 회개가 있는 강도의 십자가. |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와는 대조적인 회개하는 강도를 보십시오. 자기의 죄로 재판을 받고 이제 죽음이 열리는 순간 죄인 중에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의 눈이 열리면서 자기와 함께 십자가의 형을 받은 분이 온 인류가 기다리는 구세주임을 알아봅니다. 회개한 강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 반대편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동료 강도를 향해 꾸짖으면서(40),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을 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볼까요?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회개한 강도의 모습, 너와 나는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지만 예수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들은 대로 진정한 의인이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죄의 고백, 회개의 가치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잘못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생각해 달라는 이 부탁은 적극적인 부탁이 아닙니다. 아마 이 강도가 자신이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의 엄청난 죄인임을 알고 있기에 다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소극적인 부탁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회개하는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는 특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낙원(paradise)은 최고의 기쁨과 환희가 있는 세계, 계시록에서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 21:01~04).
43절 말씀에서 우리는 끝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와 사랑 말입니다.
그러면 회개한 강도가 어떻게 예수님을 그 어려운 순간에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무지몽매한 강도의 삶을 변화시킨 것 같습니까? 무엇보다 이 강도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오는 동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자기들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올라왔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원망이나 불평의 일그러진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모르고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합니다. 아마 이 말씀에서 이 강도가 심령의 문이 열리는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심령의 문이 열린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 패의 글을 보면서 예수님은 나의 왕임을 깊게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예수님 그 분은 단순한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분임을 알고 자신의 미래를 맡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놓고 사람들은 더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기도 회개한 강도처럼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 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내다 볼 줄 압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혹 자신의 뜻대로 구원받는 찬스에 자리에 들어올지 모르나 인생의 삶이 그렇지를 못해요. 한 치 앞도 못 내다본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는 시기는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두 강도는 십자가형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기에 당연히 십자가를 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음에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이기에 얼마든지 원수들을 물리치고 십자가를 거부 할 수도 있었지만 어린 양과 같이 그 모든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원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이 무너졌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엡 02:14).
종교개혁자 루터는 빨래를 짜면 물이 나오고,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 구약을 짜면 짐승의 피가 나오고,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 라고 했습니다.
엡 01:0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 곁의 회개한 강도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주님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져야 할 내 몫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좀 힘들다고 그 십자가를 내어 던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까?
눅 0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의 피로 씻어져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 살게 되었고, 새로워진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내 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셨으니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롬 14:0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사람들은 교회를 떠올릴 때, 기독교 하면 십자가요 십자가 하면 으레 기독교를 상상합니다. 성도들 역시도 십자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목걸이나 반지 기타 성의에 십자가 형상을 새겨 착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교회가 많은 나라요, 도시마다 거리마다 십자가 탑이 높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밤이면 어느 곳이든지 십자가의 빛이 붉게 빛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99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라는 이름을 혹 기억하십니까? 살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육을 먹었던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김현양이 교도소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랑의교회 이재명 집사님께 이런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난날 사회를 어지럽히던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 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이재명님이 나눠주신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남은 생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이재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현양 올림.
처음 체포되었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전혀 죄를 뉘우치지 않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순한 양이 되었습니까?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 시켰습니까?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된 일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 변화를 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때가 올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마 24:40), 그 때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때가 올 것임을 기억하고(눅 17:35) 주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따라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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