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는 남에게 밀리지 않는 특별한 일 하나가 있습니다. 외국이든 국내든 높은 산(건물)에만 올라가면 자기가 다녀간 흔적으로 이름을 새겨놓는 일입니다.
백두산이나 지리산 등 좀 평평한 바위를 보면 그곳을 오른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매우 눈살 찌푸리게 합니다.
백두산 이름 들어 보셨지요? 현재는 중국과 북한 관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다녀간 사람 중 살짝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 대부분이 한국인입니다.
아름다운 백두산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숨어서 무리하게 새겨놓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일압나더. 삼가야 합니다. 백두산에 하도 이름을 많이 새겨놓아서 名山이라 하는가 봅니다.
히 11장을 일명 믿음장이라 부릅니다.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믿음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모델을 제시하는 장입니다.
이미 히 11장은 끝났습니다. 더 기록되지도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여기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곳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은 전도를 위하여 제자를 파송하실 때(막 06:07)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칠십 제자를 35전도 팀으로 나누어 파송하셨습니다.
이후 35전도 팀이 전도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도 보고를 합니다. 이 가운데 인상적인 보고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니 귀신들도 항복했습니다. 라는 보고입니다(17). 제자들은 주님께서 이 보고를 들으시고 그래 대단히 수고했다. 이렇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내 이름이 하늘나라에 있습니까?」로 정했습니다. 어떤 신령한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칠십 제자들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께서 칠십 제자를 35전도 팀으로 조직하여 파송한 곳이 어떤 곳입니까?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비롯한 여러 지역입니다. 이 가운데 고라신과 벳새다는 주님께서 전도하실 때 소돔과 두로와 시돈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교만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사 14:13, 15)을 적용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사람들 심성이 완악하고 교만한 곳입니다.
이 세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완악하고, 교만하고 심령이 거칠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 사람들에게 강하게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예수님께서 바로 이곳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중심으로 전도대를 파송하시면서 내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03).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도무지 전도하기 힘들고 복음을 듣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칠십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 이름만 붙들고 복음을 전했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강퍅하던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면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악한 귀신들이 결박되고 항복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중요한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원리 말입니다. 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라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여 가면 됩니다.
전하라고 하면 말씀대로 입을 열어서 전하면 됩니다. 이렇게 전도 대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순종하며 천국 복음을 전하니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직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교회에서 전도하라고 하면 나는 내성적이라 입이 안 떨어집니다.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잘 안 됩니다. 나는 성경을 잘 모릅니다. 나는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됩니다.
그럴듯한 핑계이지요? 이는 전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전도를 내가 하려고 하니 부담이 되고, 그렇게 핑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마 04:19 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되게 하리라. 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신령한 일에 속한 것은 내가 되고 싶다고, 내가 하고 싶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해 주셔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전도 대원들이 흥분에 덜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귀신들이 막 항복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나를 알아보는구나, 주님께서 내게도 특별한 능력을 주셨구나, 내가 귀신에게 고통받는 사람을 구해주었구나. 하는 흥분입니다.
이런 체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격려하고 축하를 해 줄 만한 거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칠십 제자들을 보니 좀 걱정스럽습니다. 그런 일로 기뻐하면 교만이 찾아올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 일로 자랑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20). 이 말씀은 지금 막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는 힘이 빠지는 소리입니다.
이런 체험은 분명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 전도자의 목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이름이 천국에 있느냐 즉 구원을 받았느냐? 입니다.
오늘 칠십 제자들의 전도 보고 현장에 내가 참여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겠지요? 나에게 굉장한 능력이 있다. 어디 고쳐줄 병자가 또 없는가? 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일들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군대 귀신까지 쫓아냈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진실한 제자가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은혜받은 사람 몇이나 참가하였습니까?
나병환자를 한꺼번에 열 명을 고쳐주었지만 돌아와서 고맙다고 감사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사마리아 출신 하나뿐입니다(눅 17:11~16).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분명 좋은 일입니다. 성령님의 은사와 능력을 받는 것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로 된 일 가지고 뽐내지 말라 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생각하면서 신령한 기쁨 거리로 기뻐해야 교만의 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살아 온 모습에서 혹 주님 밖에서 기뻐할 이유를 찾고 구한 것은 아닙니까? 수명이 짧은 인간의 기쁨이나 믿음의 유익이 없는 기쁨은 주님께서 버리라 하십니다.
2.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어야 참 기쁨입니다. |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말씀입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느냐? 다시 말해서 내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느냐? 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중직자로 일하다 과로로 쓰러지는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성도가 되는 일입니다.
마 07:21~23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리 능력을 나타낼지라도 주님과 관계가 없고,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것은 불법을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0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제자들 사역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지를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해도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일은 별것 아닙니다.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χαίρω). 이 말의 완료 수동태는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뜻인데(출 32:32) 그러면 내 이름도 그곳에 있습니까?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면 두 종류의 책이 펼쳐집니다. 행위의 책과 생명책입니다. 행위의 책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단 07:10).
하나님의 심판 근거의 책입니다.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천국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성도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로 기쁨을 누립니까? 무엇보다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각자 구원받은 사실이 가장 기뻐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자녀가 아니면, 만일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만일 나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다면 모든 일이 허사입니다. 별 의미가 없는 뜬구름을 잡은 것과 같습니다,
왜 나의 믿음은 자라지를 않는가? 왜 나에게는 성령님의 은사가 없는가? 왜 나에게는 물질을 안 주시는가? 왜 나에게는 건강을 안 주시는가?
왜 내게는 길이 열리지 않는가? 도대체 내게는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주님은 20절 말씀을 주십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땅의 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무엇보다 큰 기쁨은 죽어가는 한 영혼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하나님의 교회에서 올려놓은 글이 있어서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안상홍님, 예루살렘 어머니)만이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 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하늘 자녀의 출생 신고를 도울 수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늘 생명책에 출생 신고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께서 영혼의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로 오셔서 하늘 아버지, 하늘 어머니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고 하늘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에 미혹을 받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내가 남보다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는 좋아하다가도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하여 부족하다 싶으면 그때부터 불행해집니다.기쁨도 사라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안달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는 소유를 많이 늘린다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이웃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능력이나 직분 가지고도 비교하지 마십시오. 천국 가면 다 소용없습니다. 내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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