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하나님과 화목하면 복이 임합니다.(욥 22:21~3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4. 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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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東京)에서 북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곳에 닛코(日光)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신사들이 있으며, 그 중 어느 한 신사에 아주 유명한 우물 네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각기 있는데 장수를 의미하는 수(), 부귀를 의미하는 부(), 권세를 의미하는 권(), 사랑을 의미하는 애()라는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수의 우물 앞에는 주로 60세가 넘은 노인들이 오래 살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서 있으며, 부의 우물 앞에는 주로 30,40대 젊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서 있으며, 권의 우물 앞에는 국회의원 후보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서 있으며, 애의 우물 앞에는 주로 20대의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연인을 소망하면서 이 물을 마시려고 서 있다 합니다.

그곳에 관광을 갔던 한 분은 네 군데 우물의 물을 다 마셔보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한국 사람도 복 받으라고 하면 싫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복을 받는 일에 대해서는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도 God bless you!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을 주십니다. 라는 말로 축복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 복 받을 사람이라고 하면 무척 좋아하지만 정작 어떻게 복을 받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21절을 중심으로 복을 받는 비결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위로보다 상처를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에 앞서 욥의 처지를 먼저 간략하게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경건한 사람, 재력이 든든한 사람 욥이 두 차례의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먼저 욥 01:13~19절을 보면 욥은 갑작스런 재난을 겪게 됩니다.

강도를 두 차례 만나고, 또 두 차례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자식들과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다음으로 02:01~10절에는 욥의 온 몸에 종기가 나는 극심한 피부병이 발진하였는데 현대 의학으로 보면 나병의 일종인 상피 병입니다. 거기에다 인생의 반려자로 만난 아내마저 고난과 질병 중에 있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악담을 합니다(02:09). 이런 고난 속에 있는 욥의 처지를 친구 세 사람이 듣고 찾아옵니다.

 

0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세 친구의 이름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인데 여기서 욥을 찾아 온 세 친구들의 고향을 한번 봅시다. 데만은 남부 아라비아 사막 지대의 한 성읍이고, 수아는 북 아라비아 동부 지역의 한 성읍이고, 나아마는 아라비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한 성읍입니다.

욥이 살던 우스 땅과는 적어도 수백 km이상 떨어진 곳들인데 이 먼 곳에서 세 친구가 서로 긴밀히 연락을 하여 함께 욥의 문병을 왔으니 욥과 세 친구 이들은 막역한 우정을 유지하는 사이임을 능히 짐작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다고 찾아와서는 위로 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겪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병을 왔으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서 위로만 따뜻하게 해 주면 될 것 아닙니까? 공연히 딴 말을 하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심장만 뒤집는 결과가 되기 알맞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괴로워하는 욥을 만나자 약속이나 한 듯 자신들의 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리고는 같이 일주일 동안 앉아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02:12,13). 일주일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둘러 앉아 있다면 아주 이상한 일 아닙니까?

욥의 친구들은 지금 자기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욥이 어떤 숨겨놓은 죄가 있어서 그 징계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님이 분명히 친구 욥에게 진노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 때문에 욥과 문병을 온 세 친구들 사이에 각기 세 번씩 돌아가면서 변론을 하는데 오늘 말씀도 그런 차원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마지막으로 충고를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 한 부분이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보게 친구 욥, 하나님 사이에 모든 것이 바르게 되어 있다면 지금이라도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게 라는 권면입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제각기 긴 변론이 다 끝나자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이 욥에게 잘못 했으니 사과하고 너희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라고(42:07,08). 충고나 권면, 또 위로란 신중하면서도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잘 배려하여야지 그렇지 못하면 욥의 세 친구들처럼 상처라는 부작용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위로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별로 위로는 되지 못하고 큰 고통만 안기고 온다면 얼마나 큰 결례입니까? 위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로했다는 자기만족을 얻는가는 몰라도 위로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위로보단 상처를 받을 수 있으므로 위로는 사랑과 신중함과 배려가 꼭 따라야 합니다.

 

 

 2. 하나님과 화목하면 복이 임합니다.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엘리바스가 욥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충고를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건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고, 21절 말씀 자체는 아주 복된 말씀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수 있는 21절을 나의 말씀으로 받으면 어떨까요? 분명히 성경은 복을 악속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불화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잘 통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불화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간의 불화, 부모와 자식 간의 불화, 직장에서는 동료 간의 불화, 이웃 간에 불화 등 이런 것들이 인생살이를 힘들게 합니다.

불화란 먼데 있는 사람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뜻이 안 맞아 일어나는 겁니다. 불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먼 곳으로 밀어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물질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화목에서부터 이루어짐을 기억하십시오.

 

17:0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고 할 때의 화목이란 히브리어에서 보면 계속 밀착시킨다, 아주 가까워진다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 명예적인 복, 건강의 복 등 이런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부터 오는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 밖에서 구하려고 온갖 노력과 힘을 동원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재물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물의 노예로 살고, 세상의 권력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의 노예로 살고, 자식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식의 노예로 살고, 건강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건강의 노예로 삽니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야말로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과 잘 통하는 화목에서부터 은혜도 받고, 평안도 누리고, 기쁨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 불화하게 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사소한 교만과 사소한 죄 때문일 것이며 이런 것들이 쌓임으로서 자신을 복에서 떠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한 마디로 마귀는 불러들이고 하나님은 밀어내는 현상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더 화목하고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으며,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을 데리고 와서 잡아 하나님께 피를 흘린 후에 교통이 가능했습니다.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구약은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재입니다. 구약시대의 짐승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05:0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3.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흥하는 복이 임합니다.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지음을 받는다는 말은 개역성경에서는 다시 흥하리라. 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것이다. 는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흥하게 된다고요. 누구든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흥하게 될 것이라고 안내합니다. 돌아가면 이 말 속에는 떠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사용하는 말인 줄 아시지요? 또한 떠나 있다는 말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물질을 최고로 여기고 의지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물질주의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보화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연히 전능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래야만 흥하는 복을 받을 수 있고요. 유다 왕국이 멸망 직전 죄악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실 때의 상황을 볼까요?

 

03:07~10절을 보면 하나님과 멸망해 가는 유다 백성들과의 사이에 변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07).

 

그러자 유다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십일조와 봉헌물이니라.

이렇게 대화가 오고가고 하는데 이 모두가 다 물질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직접 물질을 뒷받침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을 볼까요.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 밖의 사람입니까? 물론 그들도 돌아와야겠지만 무엇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돌아와야 합니다. 영적 죽음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영적 활동이 없습니다. 영적 감각이 없습니다. 영적 죽은 냄새가 납니다. 영적으로 매장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영적 교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백미임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곳이 한 부분 있어 말씀을 드립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보면, 아들이 먼 나라(로마)에 가서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용기를 내어 돌아오자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줍니다.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어른이 달려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발목이나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상대방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자신들을 모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리를 뜬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탕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맞이했다고 하신 것은 돌아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일러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며,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입니다. 화목은 생명의 문제이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람은 참된 만족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고,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인데 불행하게도 하나님과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 직전 죄악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기 위해 대 속죄일에 금식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함으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옷을 찢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옷을 찢는 행위는 내면적인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지만, 당시 유다 백성들은 진정한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그쳤습니다.

 

0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