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들러리의 기쁨을 누리는 세례 요한.(요 03:22~3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2. 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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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도시를 여행하던 여행자가 마침 주일이 되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통경찰에게 은혜로운 교회를 알면 좀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는데 이 여행자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많이 있어서 경찰에게 왜 가까운 교회도 있는데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줍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 저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할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생활을 약속 하셨고, 그렇게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tl신령한 기쁨이 우리의 모습에서 나타나도록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채널을 고정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물질, 명예에 관한 것들의 기쁨은 그 수명이 짧은 줄 아시지요?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시는 즐거운 인생길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주인공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특별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 기쁨이 무엇이지를 살피면서 들러리의 기쁨을 누리는 세례 요한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인간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0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그는 로마 디베료 황제 15년경부터 유대 광야와 요단강을 중심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03:01~03) 천국을 소개한 인물입니다. 그는 광야를 주 무대로 하는 고행(苦行)주의 선지자로서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고 엘리야의 심정으로 사역하였습니다(왕하 01:08). 이런 요한과 예수님과의 육신의 관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출신 배경에 있어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한 요셉의 아들이고, 학문의 정도나 가족 구성원들로 보면 그다지 내놓을 만한 꺼리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공생애 초기 고향과 같은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목수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느냐며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0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이에 비해 요한은 이스라엘에서 예수님보다 신분상 훨씬 위입니다. 아버지가 현직 제사장이며 이름은 사가랴입니다. 제사장이면 상류층인 사두개파 출신으로서 큰 예우를 받는 직분이며, 그 아들은 세습으로 제사장 직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제사장 직을 물려받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상당한 이스라엘의 전통 교육을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01장에 보면 요한은 그의 출생과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부터 온 집안과 지역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일이 나옵니다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난 형님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서로 친족입니다. 예수님은 외가 쪽으로 요한보다 6개월 늦게 난 동생인 셈이지요.

 

이스라엘의 가족 제도는 서열을 중시하는데 성경의 족보들을 보면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장자부터 시작되는 형제간의 서열은 아주 엄격히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관습으로는 예수님은 요한을 형님으로 깍듯이 모셔야 할 위치입니다.

예수님이 삼십 세쯤 되어 공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요한은 이미 3~4년 정도(성경 연구학자들 견해)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명성은 온 이스라엘에 알려져서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정치 권력을 크게 행사했던 헤롯 왕 조차도 요한의 말을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요한의 사역지 요단강은 몰려드는 사람으로 인애 연일 북적거렸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세리나 군인들도 감동되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03:12~16).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집안 문제나 파워 게임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주님이라고 설정을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 표현으로서 자신을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주님을 위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할 자다. 라고 자기 위치를 정합니다.

 

0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 세례 요한은 신랑의 들러리로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예수님을 향한 관계 설정을 이스라엘의 결혼식 행사를 비유로 들어 표현합니다. 당시 결혼식은 신랑의 친구들이 주로 진행하였습니다. 바로 들러리 역할로서 신랑이 결혼식이 치러지는 신부 집으로 향할 때는 대체로 늦은 저녁시간에 이 들러리가 어둠을 밝히며 신부 집을 찾습니다.

무사히 신부 집에 도착하여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게 되면 이때 들러리였던 신랑 친구들은 자기들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한바탕 즐깁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문법상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요한의 심령에 기쁨이 가득 채워져 있음을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이런 고백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신령한 기쁨이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라는 문구를 보십시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하는 역할,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주님의 들러리에 위치하는 사역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사역을 놓고 역시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고후 11:0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믿음의 세계, 신령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육신적인 집안 동생으로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처럼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오랜 전통적인 메시아사상, 말씀의 영적 깊이에 정통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생각해 봅시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가 좋은 사람을 찾고 만나는 것이 행복이지만, 신랑의 들러리는 아무리 자신이 못생겨도 신랑 신부의 아름다움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도 배가 아프지 않고, 그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뻐하고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그들의 들러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들러리와 같은 자세로 모든 일에 내가 좀 서운해도 주님이 좋아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나보다 남이 믿음생활에서 더 앞서 가거든 마음껏 앞 세워 주시고 그저 뒤에서 조용히 따라만 가십시오. 신령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였던 니체(Friedrick Wilhelm Nietzsche)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 속에서 성장했는데도 무신론 주의자로 전락을 해 버렸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니체는, 내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누리는 생활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판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서 기독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동력인 참 된 기쁨을 누가 찾을 수 있습니까? 누가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신령한 감격의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부잣집 노인이 말을 타고 행차하다가 앞길에서 다리를 절름거리는 행색이 남루한 사람이 기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여보시오, 나는 돈이 많아도 춤을 출 일이 없는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 기뻐서 그렇게 즐겁게 춤을 추는가? 라고 묻자 그 사람이 내가 기뻐 춤은 추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지어 주신 것을 생각하니 즐겁고, 비록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장애자이나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장애자가 많기 때문이요, 세상에서는 날 부러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안에 있을 것을 생각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70명의 전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잘되는 것을 기쁨으로 누립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0절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라고 하는 26절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은 이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증언하였고(01:19~28), 예수님께 세례도 베풀었습니다(03:13). 그러므로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자기들 선생님에게 빚(?)을 졌으며 또 감사해야 할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히려 요한의 명성에 도전하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느껴지자 예수님의 이름까지도 기피하면서 상당한 불만을 터뜨립니다. 좀 더 세밀하게 26절을 볼까요?

 

세례를 베풀매.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시옵소서. 란 감탄사(이데)가 붙어 있는데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혹은 그의 제자들)께서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과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조금 전 까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예수님께로 가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스승에게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보고인데 이에 대하여 요한은 뭐라고 말을 합니까?

주님께로 가는 사람들을 놓고 조금도 시기하거나 섭섭해 하기보단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지워지는 사람이 아름다우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교회의 일을 하시고, 세상을 푸르게 바꾸어 가십니다. 그럼에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이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시기와 경쟁의 노예가 되어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마지막 메시지로서 요한의 메시아관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요, 교회 생활 전반에 적용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리는 것은 자신의 사명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드러내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시소게임의 법칙을 아는 자로서 자신은 언제나 아래에 있기를 원하였으며, 내가 낮은 자리에 있어야 예수님이 높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였던 천사장 루시퍼를 보십시오. 당장 버림을 받아 마귀가 되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번 끌어내려보려고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고요. 세상의 성공의 법칙은 내가 흥하고 너는 쇠하여야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성공의 법칙은 내가 쇠하고 너는 흥하여야 하는 원리입니다.

요한은 주님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자의 모습이고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리고 요한은 주님께서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 열심히 뛰다 주님의 공생애가 본격적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헤롯 왕의 박해로 순교하면서 사라져 갔습니다(01:14;).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익두(1874~1950) 목사가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산길을 걷다가 너무 더워서 웃옷을 벗어 놓고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온 거야? 라고 말한 후 김 목사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김 목사는 아무런 저항도하지 않고 가만히 매를 맞고 있다가 술 취한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 라고 묻자 그래 다 때렸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김 목사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 하니 그는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자 내가 김익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 목사를 때린 사람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 아닙니까? 김 목사는 이일을 계기로 그를 데리고 부흥회에 함께 참석하였으며 그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게 되어 훗날 장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령한 기쁨에 사로잡힌 김익두 목사야말로 진정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아는 분 아닙니까?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신령한 세계를 볼 줄 알고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