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면 평소보다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부탁을 받고 보면 안 할 수도 없고, 기도의 중보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자기를 위하여 뒤에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왜 기대하는 것일까요? 아마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풍지대가 아닌 위험지대로서 나를 위한 누군가의 기도의 배경이 없다면 고난의 세상을 헤쳐 나가기엔 무척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는 믿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하면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평안한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분의 배경 때문이라고 여기십시오.
복음송 중에도 누군가 나를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라는 찬양이 있는데 같이 한 번 불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봅시다.
시온의 찬미 144장
①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② 우리의 마음이 지쳐있을 때에 갈보리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주님은 우리 외로움을 아시고 내 마음에 기쁨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요 17장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기도하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그럼 그때의 열두 제자를 향한 기도문은 지금 누구로 비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바로 나를 향한 기도문으로 비유해도 될 것 같습니다.
1.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보전하사. 조심스럽게 돌보다, 굳게 붙들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으로부터의 보전을 위한 기도입니까? 세상입니다. 또 무엇으로 보전해 달라는 기도입니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이라 함은 소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것으로 살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그런 기도입니다. 죽어도 아버지의 것이고 살아도 아버지의 것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이름이란 그 이름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름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김삼일, 때로는 이름표를 부담스러워 할지 몰라도 이 이름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이름으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면서 보전되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권세로 보호해 달라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토록 간절함으로 보호를 요청합니까? 11절을 다시 봅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주님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자들을 떠나는데 제자들은 세상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 양을 이리 가운데 두고 떠나는 목자의 심정으로서 제자들이 곧 만날 여러 고난의 상황들을 아시고 세상에서 잘 지켜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니다.
11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12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15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주님은 마귀의 권세가 일시적이지만 미치는 그 세력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전해 달라는 기도를 반복하십니다. 사탄은 사람이 세상에 속했으면 자기편이므로 그냥 둡니다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온갖 계략을 다해 넘어뜨리려고 달려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일꾼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며, 누군가의 기도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을 믿으십시오.
시 121:04,05절처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앞뒤좌우에서 배경이 되어주십니다. 이런 사랑을 여러분의 가슴 속에 느끼기를 축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택하셨는지, 지금도 나의 신변과 안전을 지켜주시는 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든든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읽고,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결코 든든한 인생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우리에게 밀려와서 우리를 위기 속으로 이끌어 가려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말씀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시다. 제발 세상에 빠져서, 죽음의 길로 가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2.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
11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문에서 먼저 우리와 같이 라는 부분을 보십시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 03:16~17절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동시에 역사 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내려 주님 위에 임하셨고, 이어서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주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역사하지 않습니까? 결코 획일적이지 않는데도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세 위의 하나님이 비록 다른 모습으로 다르게 역사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함은 주님은 이미 아십니다.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것은 곧 복음의 분열이요 또 죽음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가 되어야 함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남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지역으로 하나 되고, 모임이나 끼리끼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가정도, 직장도, 나라도, 세계도 하나만 될 수 있다면 야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 하나가 되는 곳에는 분열이 해소되고 주님의 평안하게 하심이 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가 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11절을 잘 보십시오. 하나 되기를 위한 주님의 기도는 물리적인 하나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랑으로 하나입니다.
하나를 이루는 일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일이 우선임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서로 돕고 협력하여야 함에도 혼자서 일을 하게 되면 되는 일 보다는 안 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말 그대로 공동체(Community)로서 하나가 되어야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이 없는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며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시는 주님은 이단이나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과의 하나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과의 만남은 야합이나 타락이지 하나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를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될 때 거기에는 놀라운 힘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한 몸이란 뜻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이 누군가와 갈라지고 있습니까?
혹 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한 자리에 같이 앉기도 싫습니까? 이게 누구 때문입니까? 이럴 때는 내 마음을 잘 살피십시오. 혹 사탄이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십니다(롬 08:34).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에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나를 깨뜨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엡 04:0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도 여러분, 하나 됨은 성령님의 사역이고 계속 우리에게 주는 감동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갈등과 분열로 나누어지려 한다면 그 책임은 무섭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신령한 눈으로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함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는 있는데 이게 지금까지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해 겪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김삼일의 성도로서 주님의 원하시는 하나로 전환하기를 원하십니까? 상대방의 어떤 허물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큰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3. 제자들이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입니다. |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기쁨이 있다는 말을 교회에서 가끔 주고받습니다. 비단 기쁨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이 임한다고도 합니다. 한편은 나는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기쁨이 별로 없다. 라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기쁨이 있는데 잘못 믿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믿음생활에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얼마만큼 누리셨습니까? 13절을 잘 보십시오.
내 기쁨, 예수님의 기쁨이 나오는데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영적 삶의 교제를 통하여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말합니다.
그냥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고 잘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고 인생관인 사람을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기쁨이 있으나 13절의 기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기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기쁨은 기쁨인데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 성령님의 역사로 오는 기쁨(요16:22)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령한 기쁨을 심령에 담고 살아갈 때, 현실의 여러 환경에서 만나는 불평과 원망 거리를 넉넉하게 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기쁨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목을 매며, 성도들도 여기에 편승 하는데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쁨을 상징하는 연령대별 성공시리즈를 소개합니다.
10대에는 성공한 아버지를 두었으면 성공이고, 20대에는 학벌이 좋으면 성공이고, 30대에는 좋은 직장에 다니면 성공이고, 40대에는 2차를 쏠 수 있으면 성공입니다. 50대에는 공부 잘하는 자녀 있으면 성공이고, 60대에는 아직 돈을 벌고 있으면 성공이고, 70대에는 건강하면 성공이고, 80대에는 본처가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면 성공이고, 90대에는 전화 오는 사람 있으면 성공이고, 100세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대 성공이랍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데, 삶이 좀 심심하다고 생각되니 마약을 해서라도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니 동성연애를 하고, 정상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니 도박도 합니다.
이렇게 순리를 역행을 하여 얻는 쾌락들을 기쁨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것은 바로 파멸이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십니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나 혼자만 얻으라고 함이 아니라 더불어 지내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받아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성도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오는 기쁨, 그리고 희생과 섬김을 통하여 오는 기쁨을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고 또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신령한 기쁨은 세상적인 소유나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얻어지는 만큼 우리도 주님께 영적인 삶을 집중하면 그 기쁨이 대박으로 찾아 올 것입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진리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는 큰 능력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죠? 주님께서 드리신 이 기도야말로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생활의 표준이어야 합니다.
금년 원 플러스 원으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특별히 우리 주변의 이런 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믿음생활을 잘할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 말입니다. 자기가 비록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는 분들,
예를 들자면 나, 이번 주 교회 못 가. 왜? 약속 있어. 저, 당분간 교회 못 가요. 왜? 아르바이트하고 시간이 겹쳐요. 이런 식의 이야기들, 알고 보면 사실은 교회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기로 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안 간다는 표현을 쓰는 자체가 차마 민망해서 교회 안 간다고 못하고 못 간다는 분들, 이런 분들을 위해 기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계셨으면 이런 사람을 위하여 요 17장에서 이렇게 기도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이들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다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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