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아프리카 킴벌리에서 양치기 소년이 무려 83.5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주웠습니다. 많은 돈에 팔렸는데 다시 그 원석을 가공하여 45캐럿이라는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가 나왔습니다. 이름이 프렌치 블루 다이아몬드입니다.
이 보석에 또 하나의 이름이 추가되었었습니다. 저주의 다이아몬드, 왜 이런 이름이 추가되었느냐 하면 소유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극적 최후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 보석의 원래 소유자 페르시아 총독은 도둑에게 살해를 당했고, 두 번째 소유자 페르시아 왕은 반란군에 의해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소유했지만 단 한 번 목에 걸어본 후 천연두에 걸려 죽었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소유했지만 두 사람 다 단두대(斷頭臺)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다 이 보석은 영국의 최고 재벌인 헨리 필립 호프에게 넘어가서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새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저주의 다이아몬드가 희망의 보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호프 다이아몬드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호프가(家)도 곧 몰락하고 말았는데 이 후로 최고의 다이아몬드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되지 못하다 그대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껏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보석의 내역이 주는 교훈은 소유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인의 경우 믿고 부를수록 좋은 신이 있는가 하면, 믿고 가까이 할수록 불행하게 되는 신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커 보이고 좋아 보여도 저주의 다이아몬드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신을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값진 보석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둑을 청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불행을 불러오는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재물은 생명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의 삶을 보장하겠습니까?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 함께 하셔야만 안전한 삷,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나를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주님. 이렇게 정하고 강론을 하겠습니다.
1. 주님은 내 곁에서 힘을 실어주십니다. |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주님께서 내 옆에 그 위치를 정하셨다 로서 잠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아예 자리를 잡고 영원히 곁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앞 절 11,16절에서 바울은 마지막 인생길에 동료가 하나도 없다고 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으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은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딤후 04:11)는 바울의 메시지를 보면 로마 옥중에서 최후의 서신을 쓰는 바울의 고독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가 많은 사람 속에 산다고 외롭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가족들과 주위에 성도들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 바울만 외로웠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베드로가 자기의 안전을 위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을 때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우리도 때로는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길이 잘 안 열릴 때는 가끔은 혼자라고 느껴지는 고독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잠깐 곁에 있을 뿐 다 떠나 갑니다. 떠나서는 안 될 사람도 떠나고, 떠날 것이라 여기지 않던 사람도 떠나갑니다만 그러나 주님은 내 곁에서 힘을 실어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로움을 떨쳐 주시는 주님께서 의기소침 했던 자신의 마음을 만지시고 힘을 실어주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체험을 볼까요? 전도를 위해 세계를 뛰어 다니면서 수많은 위기를 만났습니다만 그 때마다 주님께서 오셔서 위로하시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행 18:0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린도에서)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예루살렘에서)
행 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지중해 바다에서)
믿음생활을 좀 제대로 하다보면 때로는 자신이 외로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고독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마음 상하거나 외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나를 버릴 수 있고 몰라줄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의 모든 속사정과 중심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바울의 곁에 서서 힘을 실어주시는 그 주님, 바로 나의 주님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내 곁에서 항상 위로해 주시는 그 분은 결코 내 곁을 떠나지를 않을 뿐 더러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순간에도 내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 주님은 내가 위기에 처할 때 보호하십니다. |
17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시 22:22(LXX)에서 인용한 것으로 극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바울이 1차 투옥과 재판 이후 무죄로 풀려났음을 암시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하다 붙잡힌 것도 아니라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 붙잡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복음 선교에 한 때는 물질로 후원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었습니다만 현재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추위에 벌벌 떨고 있으며, 외투를 구하지 못해 쩔쩔 매고 있는 처지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믿음생활을 바르게 해도 어려움이 닥칠 수 있음을 말입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내 곁에 자리를 잡고서 위기에 처하기만 하면 그때는 그 위급한 상황을 친히 막아 서 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어려움을 당할 그때 주님은 내 곁에서 모든 환난까지도 막아 서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혹 조금도 풍파가 없는 순탄함을 누리기를 원합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그런 기대를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샤머니즘적인 종교로 전락시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생활을 바르게 해도, 기도를 쉬지 않고 해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분명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엄연한 현실인 만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탄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고 섬기는 주님께서 내 곁에 다가오는 모든 환난과 위기들을 안전하게 방어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나 주를 맞으리.
② 주의 옷을 만진 여인처럼 나도 주께 손을 내밉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찾으면 주 나를 반기리.
③ 나의 맘에 의심 다 버리고 겸손하게 주님께 나오니 인애하신 주님은 언제나 날 기다리시네.
예수, 예수 마음이 상한 자들 예수, 예수 위로를 주시리라 예수, 예수 내 일생 주께 맡겨 승리 얻으리.
그럼에도 성도들 가운데 가끔은 자기를 포기하고 패배인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자기를 포기합니까? 자녀들이 속을 썩인다고 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 내리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왜 부모가 자식을 포기합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행진에는 반드시 방해자가 찾아와서 속삭이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는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니, 3번 반복을 해 봅시다. 또 옆에 있는 분들에게는 주님께서 당신 곁에 계십니다. 이렇게 3번을 반복해 봅시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의연히 순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고전 10:13), 감당키 어려운 시험을 만날 때는 피할 길도 열어주십니다. 설령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은 위기를 막아 주셔서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분입니다(롬 08:28). 문제는 우리가 참고 기다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내 곁에서 모든 고난의 현장들을 막아 서 주심을 믿으면 됩니다.
고후 0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3. 주님은 나를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의 주변 사람들 중에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부고장을 전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금년 이 겨울에 그 분들이 우리의 부모님일 수도 있고, 친구나 친척, 혹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했을 때 그 영혼의 울부짖음과 고통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좀 춥지만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찾아가십시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랑하는 영혼을 위해 원 플러스 원의 사명으로 찾아가십시오. 바울은 순교를 이미 예감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한 믿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든든한 소망 때문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한 생을 마감하는 인생의 종착역에서도 내가 믿는 주님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머잖아 인생의 삶, 믿음의 삶을 마칠 때가 올 것인데 그 때는 바울처럼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며 떠날 수 있습니까?
딤후 04:0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0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누구든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이요,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우리 모두가 원하든 원치 않던 인생의 겨울은 반드시 찾아올 것인데 그 인생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의 삶을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문구일건데 공중 화장실이나 공동체의 장소에 가면 잘 붙어 있습니다. 뭘까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
내가 머물렀던 삶의 자리, 내가 살아왔던 그 삶의 자리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삶을 다 마치고 난 후에는 그 나라에서 주님께서 주실 아름다운 상급,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겐 인생의 출발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은 더 중요합니다. 인생 겨울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복된 일들로 전환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나도 가고 너도 갑니다. 전능자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초라하고 옹졸하게 살았던 모습들을 벗어 던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 달려갑시다.
여러분께서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목사라는 직분이 제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직분일까?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별로 다정다감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비위도 잘 못 맞추는 스타일입니다. 또 고집은 좀 셉니까? 못 말리는 사람이죠. 가끔 두 분 정도가 목사님, 다른 사람들에게 좀 다정다감하게 사랑이 느껴지도록 웃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란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게 제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됩니다. 나름대로 살갑게 다가가는데도 상대방에게는 좀 퉁명스럽게 보이니 저도 힘들고 남도 괴로운 겁니다. 그러나 천국의 얼굴을 만들어야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목사 체질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명이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솔직히 비위가 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일은 도저히 제가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만 주님께서 사명으로 맡겨 주셨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당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각 자의 맡은 직분들,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모두 그런 일을 하라고 정해진 사람입니까? 천국의 소망과 상급이 있기 때문에 믿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요즘을 백세시대라고 합니다. 백세까지 사는 법이 있는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육십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오면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못 간다고 일러주고, 칠십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애인이 생겨서 못 간다고 일러주고,
팔십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벌어놓은 돈이 많아 돈 다 쓰고 간다고 일러주고, 구십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때에 날 잡아 간다고 일러주고, 백세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내 발로 내가 걸어 갈 테니 걱정 말고 먼저가라고 일러주시게.
예, 때가 되면 누구나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그런 뜻의 유머입니다. 도무지 죽음을 거부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믿음으로 살아갑시다.내 곁에서 힘을 실어주시는 그 분이 나의 보호자가 되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잘 살다가 마지막엔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당연히 의의 면류관 상급이 기다랍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앞으로도 믿음의 전진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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