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예일 대학교가 1953년도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종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97%의 학생이 아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20년 뒤인 1973년도에 1953년도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하였더니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였던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런 결과는 인종이나 학력, 부모의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비전의 차이입니다. 명확한 비전은 자신의 미래를 아름답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 시절의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평판이 나 있는 안디옥교회(수리아)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어떤 면에서 좋은 평판이 나 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의 비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서 선교의 비전을 품고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교회가 안디옥교회 말고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이 안디옥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고 어떻게 선교의 비전을 실천하였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안디옥교회의 설립 배경과 성도의 양육. |
행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행 08:01절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큰 핍박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모든 땅으로 흩어졌고, 그들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9 유대인에게만, 20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전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만큼의 혁명적인 시도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유대 동족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예수님을 구주로 전했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쓴 대단한 전도의 열정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교회인데 이 교회가 믿음으로 성숙하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교회로 쓰임을 받는다는 게 신앙적인 가치입니다.
당시 안디옥교회가 위치한 수리아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지중해에 위치한 인구 50만 명에 이르는 세 번째 큰 도시입니다. 이곳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났고, 무엇보다도 세계 선교의 활발한 운동이 이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독교 복음의 참된 가치 즉 순교자적인 각오를 배우면서 믿음생활을 한 강점 즉 바로 배우고, 바로 믿은 힘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때로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전도자로부터 통해 들었고, 신앙의 길은 나만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선교의 사명임을 배운 것입니다.
특히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이름 있는 지도자 바나바를 목회자로 지원 받아 말씀의 훈련을 받으면서 성도들의 믿음의 수준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성장해 감에 따라 성도들을 더 잘 양육하기 위해 초야에 묻혀 있던 실력자 사울을 직접 데려와 함께 사역함으로 교회는 질로 양으로 더욱 성장을 합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이 안디옥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제 막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양육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 년 동안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하여 양육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양육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님의 오심, 현재의 일과 장래에 일어날 일에 관한 일로서 이런 양육이 바로 성도들의 믿음의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희생적인 양육의 결과로 안디옥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으며,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까지도 얻게 되었습니다(행 11:26). 성도 여러분, 양육과 지속적인 신앙 지도가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성도의 삶은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도 말씀을 배우는 일에 더욱 힘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안디옥교회는 넓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
0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의 멤버들을 보면 그 구성원들이 다양함을 알 수 있는데 귀족, 평민, 백인, 흑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분과 계급과 인종의 흑백 관계를 뛰어넘어 좀 더 큰 선교의 비전을 위해 하나 됨을 실천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또한 교회 내의 성도들의 수준의 차이점도 있겠지만 그것은 복음 전파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선교라는 구심점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01절의 인물들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바나바(Barnabas of Cypress). 안디옥 교회의 가장 주도적 역할자이기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레위족 출신으로서 많은 부동산을 교회에 헌납하였으며,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다가가 권면을 잘 해 줌으로 위로의 아들이라 불렸습니다(행 04:36.37, 행 11:23,24).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니게르는 별명인 것 같으며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 흑인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아프리카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사람을 보통 선민과 이방인으로 구별하였고, 헬라인은 지혜인와 미개인으로 구별하였습니다.
또 로마인은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로 구별하였는데 이런 이분법적인 분류에 비교해 본다면 안디옥교회는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치와 연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Lucius of Cyrene).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 지역에 속한 지역으로서 이곳 출신 루기오도 흑인입니다. 여기 루기오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로마식 이름을 가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로마인의 양자가 되든지, 아니면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루기오는 당시 노예들이 가지는 가장 흔한 이름으로서 1세기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사고파는 물건, 인권조차 제대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루기오는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헤롯은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린 안티파스로서 주전 2년에 태어났으므로 마나엔의 나이는 61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마나엔은 헤롯 왕의 육신의 형제는 아니지만 같은 유모의 젖을 먹으면서 자랐다는 점에서 흔히 젖동생으로 불립니다. 젖동생이란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귀족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사울.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신약시대의 가장 위대한 믿음의 인물로 지목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위대한 선교사로서 나중 바울로 개명되었고 이방의 사도로 불립니다.
안디옥교회의 멤버들을 보면 특별히 흑인이 두 사람 있습니다. 시므온과 루기오인데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의 인권을 주장한 것이 불과 50여 년 전의 일 아닙니까?
요즘도 피부색과 인종차이를 극복하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 안에 들어와서 한 꿈을 품고 넓은 생각을 가지면 얼마든지 세대 차이, 문화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안디옥교회에 이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습니까?
여기 안디옥 지방은 지역 여건상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각 국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이주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만나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가치관과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3. 안디옥교회의 일꾼들은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였습니다. |
0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교회의 생명은 성령님이 함께하시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재력이 든든하고 건물이 웅장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생명력이 없는 교회와 같을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뜻은 멤버들이 주님을 섬겨 금식할 때에 임했습니다. 여기 섬겨 라는 단어는 공적인 일을 한다는 의미로서 예배를 말합니다. 금식까지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면 이는 특별한 영적 감동이 온 것 아닐까요?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선지자들 중 한 명을 통해서였을 것입니다(01). 이럴 때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계 02:0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회 반복).
성령님께서 안디옥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성령님의 이 명령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의미였기에 안디옥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선교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두 기둥 같은 인물을 빼 내는 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나바와 사울의 입장에서 내가 없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하나? 라고 염려하거나, 이 교회를 키우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는 태도를 보였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리하여 부정적 생각들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치 않았다면 유럽 지역이 그렇게 쉽게 복음화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일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다 전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을 전도한다고, 우리 주변에도 전도해야 될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그들에게도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국이나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 주변도 다 전도하지 못했는데 하면서 초기의 선교사 보내는 일을 주저했더라면, 또 미개한 한국에까지 가서 전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도 막상 실제로 아픔을 감당할 순간이 되면 기존에 누리던 특권들을 내려놓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자신도 선교의 일에 동참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교에 대한 열정까지도 발목을 잡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변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일들을 모두 끝낸 다음에 땅 끝까지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선교사로 나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인 줄로 믿고 순종을 합니다.
0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주님은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전도를 시작할 때부터 진정한 교회가 되며, 교회는 성도가 적을수록 더욱 전도를 하여 성령님의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전도가 부담된다고요?
예, 거룩한 전도의 부담은 믿는 그날부터 지고 살아야 하며, 자나 깨나 머리에는 전도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전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야성을 회복하여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면 됩니다. 전도의 야성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회복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타임머신(폴 데이비스 지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타임머신 기계를 만들어서 마음대로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 미래로 날라 가기도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책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안다고 해서 인류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는 것이지 미래를 알아버린다면 그 순간에 미래는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김해삼일 가족들의 미래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자가 나름대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유로운 이유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 때문이요, 사람이 자기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되는 이유도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연 초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전도하는 일에 한 번 뛰어 봅시다. 내가 감당하여야 할 거룩한 부담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봅시다. 얼마나 우리 교회가 발전 할지 모릅니다. 다만 전도에 대한 생각, 이것은 우리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이며, 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임을 기억하면서 지금부터 뛰어 봅시다.
고전 0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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