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데마는 인생 마무리 잘 못 했습니다(딤후 04:09~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2. 28.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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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인생 경영을 어떻게 믿음으로 마무리를 잘하느냐? 입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지나온 삶의 여정을 차분히 돌아보십시오. 만인이 손뼉을 치며 환영해 줄 만한 삶을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때가 되면 모두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삶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인데 그때는 삶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장기 수 물리듯이 다시 살아나오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자기의 지나온 행적들을 정산하여 심판하는 과정만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못된 삶을 회복할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는 생방송과 같습니다. 그래서 인생 관리, 믿음 관리를 더욱 잘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자기의 삶에 대한 순교를 예감합니다. 당연히 주변부터 믿음으로 하나하나 정리해야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 가운데 특별히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찾습니다. 변절 된 데마, 배교자의 길을 간 데마를 가슴 아프게 거론하며 말입니다. 어떻게 변절하였는지를 10절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인생길은 한 번 가면은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그래서 인생은 왕복이 아니라 일생이라고 합니다. 또 예행연습도 없이 그냥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아니면 짧게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어떻게 그 삶을 이름답게 마무리하였느냐가 기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안타까운 데마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데마는 인생 마무리 잘 못 했습니다」로 정하였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데마의 신앙행적 세 가지를 보겠습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의 이름이 바울 서신에 꼭 세 번 나타납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바울은 그의 모습을 각각 다르게 표현합니다.

①첫째 등장에서 바울은 데마를 자기의 동역자로 소개합니다(몬 01:24… 나의 동역자 데마). 바울의 동역자로 소개되는 데마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했습니다.

 

②둘째 기록에서 바울은 데마를 동역자가 아닌 인물로 소개합니다(골 04:14… 또 데마). 데마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동역자, 사랑하는 자 수고하는 자 등의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데마라는 호칭만 있을 뿐입니다. 믿음이 약간 추락한 것 같음을 느낍니다.

아마 바울의 마음에 데마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나, 매력이나, 열정이나, 필요성이 바래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저 안부를 전하는 명단에 따라붙는 이름 정도입니다.

 

③셋째 기록에서 바울은 데마를 신앙의 변절자로 소개합니다(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의미입니다. 데마가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은 그가 믿음의 세계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장 칼뱅은 데마에 대하여 바울의 투옥과 그 현실을 보고 자기 신변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결국 바울뿐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신앙마저 버린 셈입니다.

 

바울은 데마가 변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남깁니다. 이 말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라는 말과 비교됩니다(딤후 04:08).

데마의 모습은 그가 단순히 바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상과 사역과 목적까지 다 버리고 떠났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였던 까닭에 장소만 바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의 자리, 구원의 주님을 떠나서 타락의 길로 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요일 0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데마가 바울에게 한때는 동역자로 불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여러 힘든 환경 때문에 믿음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지금 바울은 데마의 추락을 놓고 아픔을 깊게 느낍니다.

그가 바울을 떠나 돌아간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요, 환락의 도시입니다.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죄악의 도시 타락한 도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데마의 고향이 데살로니가라 합니다. 데마는 고난보다 안일을, 미래의 소망보다 현실을, 십자가 보다 자기 삶을, 그리스도 밖에서 보이는 현재의 성공을 택하여 세상으로 날아갔습니다.

 

마 0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 잘 못 된 길이라면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데마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늦가을에 어떤 사람이 생각납니까?

혹 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고, 실망을 준 사람입니까? 그러면 그 받은 상처를 잘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담고 있으면 해롭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도 상처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미래를 열어가는데 지장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지금 생명 길이라고 장담합니까?

자녀를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진액을 다하여 성장시켜 놓아도 나이 이십이 되면 부모 품을 떠나 버립니다. 바로 이런 자녀들 뒤치다꺼리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이며 생명 길입니까?

 

생명의 길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의지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어느 길에 서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나아가는 길이 만일 생명 길에서 이탈되었으면 즉시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힘을 가진 나아만이 한센씨 병을 고치러 큰 기대를 하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왕하 05:08~14).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을 영웅처럼 환대하지 않고 다만 종을 시켜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통보합니다.

 

왕하 0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그러자 나아만의 거만함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병을 안 고치고 죽으면 죽었지, 그런 일은 못 하겠다며 수행원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렇다고 엘리사가 직접 와서 치료받으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나아만 장군이 왜 쉽고도 간단한 것을 거부합니까? 자존심 때문입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군복을 벗고 요단강에 일곱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요단강 물은 좀 지저분한 흙탕물입니다. 문제는 이제 나아만 장군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종들이 간절히 권합니다.

 

그 정도의 일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장군님 모르는 체하고 그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하며 간절히 청합니다.

결국 그는 자존심을 죽이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군복을 벗고 요단강에 일곱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씻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 몸을 잠글 때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왕하 0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자존심을 내려놓는 용기가 진정한 생명줄입니다. 진정한 용기란 제일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결단력 아닙니까?

눅 15장의 작은아들 일명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께 돌아가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지 못합니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행동이 뒷받침되어야(눅 15:20) 잘못된 인생길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탕자가 이런 결단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돌아가면 과연 아버지께서 받아 주실까? 혹시 문을 닫으시며 못된 자식이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까? 기진맥진한 몸으로 집에까지 갈 수가 있을까 하는 망설임을 하다 결국 행동으로 옮겨 살길을 얻었습니다.

 

 

3. 데마의 실패 현장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①데마는 주님 일에 온전한 희생을 생각지 않고 출발하였습니다. 믿음 생활에 만사형통할 때도 있고 때로는 아픔과 슬픔과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모든 시험 거리가 안개 걷히듯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감당할 힘을 얻는 정도입니다. 자기 길은 자기 믿음으로 이겨 나가야 합니다. 데마도 복음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를 때 주님을 잘 믿고 섬기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순교의 각오 없이 그저 순간의 열심 가지고 나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난의 환경을 만날 때 쉽게 피로가 오고 시련과 핍박 앞에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마 데마는 일시적으로 은혜를 체험하고 나섰을 것입니다. 막상 생각하지 못한 핍박과 고통 등을 만남으로 크게 실망하여 낙심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2013년 데마처럼 화려한 믿음의 출발을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굳은 열심과 각오는 무너져서 용두사미와 같은 격이 된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낙심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믿음의 고난으로 중도에 포기한 이들을 볼 때 출발은 좋았으나 비극으로 끝난 데마를 연상하게 됩니다.

 

②데마는 뒤돌아봐서는 안 될 것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는데 단순히 바울이 싫어서 떠난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의 주님을 떠난 불행의 길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서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그 일을 참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막무가내로 선동하였습니다(민 13:26~14:04).

 

민 04:0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0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돌아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결국은 노예 생활밖에 더 있습니까? 참된 자유의 가치를 모르니 이런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벗어 던지기로 했으면 이제 벗어 던진 그 옛것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주님 품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 즐거움과 구원을 바꾸는 셈입니다.

 

롬 06:0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 0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도 여러분, 세상의 것들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세상 편으로 기울어져 가지는 않습니까? 데마처럼 데살로니가행을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 등장했다가 중간에는 이름만 붙여 놓고 따라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주님을 떠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데마는 낙심자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육체와 정신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문화를 웰빙(well-being)이라 부릅니다. 그 웰빙의 종착점이 웰다잉(well-dying)입니다.

평안하고 즐겁게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우리 믿음의 가족은 마지막을 믿음으로 잘 마무리하고 잘 죽어야 합니다. 만일 믿음의 길에서 탈락하면 이런 웰다잉과는 거리가 멉니다.

 

영원한 스승의 모델로 불리는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스위스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12.~1827.2.17.) 묘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 여기 잠들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묘비명도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다 살고, 응답하다 죽었다.

 

신령한 일로 시작하였으니 결국 육으로 전락한 데마, 지상 교회에는 데살로니가행을 택한 데마와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육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요, 퇴보의 길입니다. 믿음의 마무리를 잘하는 길에 서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