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담력이 큰 한 초등학생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겁도 없이 야심한 밤에 귀신이 자주 출몰한다는 공동묘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하면서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지나는데 진짜 귀신같은 게 눈앞에 보이는 것 아닙니까? 설마 하면서 얼굴을 꼬집고 때려보지만 아프기만 합니다.
귀신이 눈앞에 점점 다가오자 온몸이 굳어 도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전도사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친구들 찬양을 크게 부르면 귀신은 도망가요. 무서울 때는 크게 찬양하세요. 알았지요?
그러나 이 아이는 너무 겁에 질린 탓에 마땅히 부를 찬양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쩌지? 무슨 찬양을 부를까? 아이 씨, 생각이 안 나네. 귀신은 무서운 얼굴로 빠르게 아이의 얼굴까지 다가왔습니다. 이 순간 아이는 힘을 내어 찬양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아이의 찬양에 귀신이 당황하다 이내 감동하고 눈물을 쏟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을 합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예,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여 든든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고난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처한 환경과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만, 고난을 떨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도 동시에 고난도 받기 위해 태어난 셈입니다. 따라서 이웃의 고난도 함께 짊어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고난을 잘 극복합시다.」로 정했습니다. 말씀 듣는 가운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의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겉으로만 보면 좀 이상한 말로 들릴 겁니다. 어떻게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될 수 있습니까? 예, 고난을 겪으므로 말씀을 듣게 되고, 고난을 겪으므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고, 고난을 겪으므로 말씀을 따르는 생활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후사 곧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계 21:0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0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인생살이에 날마다 천국처럼 행복한 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때는 고난도 함께 따릅니다. 고난 이것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때로는 죽음과도 비교되는 일입니다. 고난은 항상 작은 것에서 출발하여 점점 큰일로 옮겨갑니다. 깨닫지 못하면 좀 더 큰 고난이 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절망 같은 자신의 고난을 놓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그 고난이 유익한 모습으로 찾아옴을 깨달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고난 닥칠 때 말씀을 듣는 자리에, 말씀을 깨닫는 자리에,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리에 서십시오. 놀라운 영광의 길이 보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세상 그 어떤 보배보다 더 중요한 줄을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내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영광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받는 것이 유익입니까? 그렇습니다. 시편 119편 기자는 고난을 받지 아니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 믿음의 눈으로 고난 넘어 영광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성숙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자기 생각 따라 살 때는 사명을 피하는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체험한 후 하나님의 선교를 깨달았습니다.
열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된 상황에 이르자 비로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고난을 받는 중입니까? 나를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의 영화로운 세계를 보십시오. 보지 못하면 절망의 자리에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고난을 통해서 깨달음과 은혜를 체득하는 일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살아가는 구분 점이 무엇일까요? 의인은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고, 죄인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우매함입니다.
롬 0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 역사는 고난은 잠깐이요(18), 영광은 영원합니다(고후 04:18). 내가 지금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며 지냅니까? 그 어떤 고난이라도 장차 받을 영광을 내다보며 이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도 패배로 끝나는 고난, 삶을 좌절하게 하는 고난, 주님 안에서 영광으로 인도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만난 고난은 어느 쪽입니까? 영광으로 인도하는 고난을 택하십시오.
2. 고난을 극복하는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므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를 매우 아프게 하는 고난을 바울은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합니까?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래 참음을 무장하라고 말합니다. 원망 중에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소망 중에 참고 기다리는 뜻입니다.
현대인 단점이 무엇입니까? 참아내는 여유가 없는 일입니다. 싫으면 싫다고 갈라서는 일을 쉽게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어느새 법원으로 달려갑니다.
일상에서 깊은 생각 없이 사용하는 말이 실망(失望) 아닙니까? 실망이란 말 그대로 희망을 잃었다는 뜻인데 함부로 쉽게 할 게 아닙니다. 불가피하다면 최후에 하십시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고난을 만날 때 쉽게 무너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고난을 만날지라도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일을 자주 소개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참고 기다렸으며, 요셉도 약혼녀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혼란과 갈등이 왔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극복하였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서 지낸 13년 세월의 고난을 어찌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후에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형들보다 앞서 보내 우리 가족을 살리려고 애굽으로 보낸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때로는 믿는 분들도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신음이 나옵니다. 상식으로 생각해도 교회에 잘 다니는 내가 왜 이런 힘든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하는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환경을 주십니까? 라고 반문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누구나 이런 상황에 부닥칠 수 있고, 상식과 신학으로도 도저히 이해와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세상은 영원히 따뜻한 햇볕만 비치는 곳이 아닙니다. 인생길도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고난의 일은 항상 나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야 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납니까? 그래서 예수님 억울합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 없이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단다.
극심한 고난을 만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비한 힘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고난과 고통 중에서 신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된 프로그램이 있을 줄 믿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분명 복된 일이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렘 10:19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고난은 원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분을 낸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고난을 만날 때 이 일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혹 앞길에 고난이 보인다 해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영광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감기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볼 줄 알고 소망의 세계를 넉넉하게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왜 현대인이 옛사람보다 불행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까?
오래 참음이 없어서입니다. 컴퓨터나 휴대폰에서 인터넷이 조금만 버벅거리면 숨 막혀 죽을 것처럼 답답해합니다. 조금만 더 여유 있게 생각합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갑시다.
3. 고난을 통과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고난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의 환경을 만나면 원망과 영적 피로는 더욱 깊어집니다. 이런 환경에 처하면 믿음 좋은 분이라도 감당해 내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모두가 고난이 없는 무풍지대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 사항일 뿐 고난은 친구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높은 뜻을 볼 줄 알고, 높은 뜻 속에 들어있는 신령한 가치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0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안내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에 대한 안목을 높이면 신령한 복을 만날 수 있다고 안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는 것에 많이 집착합니다. 사실 영원한 것은 장래에 관한 일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우선순위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 좋은 예를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창 25:29~34).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야곱이 쑤어 놓은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자고 요청합니다.
즉시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흥정합니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왔으므로 배고픔이 현실입니다. 장자가 누릴 기업은 장래의 일에 속합니다. 당장 나타날 것은 아닙니다. 즉시 떡과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팝니다.
창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에서는 장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장자권의 가치를 몰라서 육신의 것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자권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장자권을 잃고 난 뒤입니다. 장자권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지나버린 후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에서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되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그 신령한 복을 회복할 수가 없는 비극의 현장에서 방성대곡(榜聲大哭)하는 에서를 향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말씀을 남깁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주님께서 오셔서 판단하실 때까지 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해서 믿음이 탈선하는 자리에 이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쉽게 남의 고난을 보고 왜 저렇게 되었느니, 잘못되었느니 하며 나름의 주석(註釋)을 답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따르는 일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참고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고난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나타내게 해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실패는 하여도 절망은 마십시오. 절망만 없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 진행됩니다. 혹 고난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때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현재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은 외면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마음가짐이 달라야 합니다. 이 고난이 어떤 이유인가? 이 고난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고난 앞에 도망치려는 도망 형, 나는 이제 망했다고 포기하는 절망 형,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책임 전가 형, 분을 삭이지 못하는 원망 형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원망도 절망도 아닌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26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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