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름답게 하는 기도(삶의 기도 중에서). 날마다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과정에 기쁨을 주셔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영원히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누구 앞에서나 똑같이 겸손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머리를 낮춤으로써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눈물이 많게 하시고, 생각을 빛나게 하여 웃음이 많게 하소서….
사람에게는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잘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움 입니다. 아직 떠날 때가 아닌데 머무는 것이 힘들다고 성급히 떠나서도 안 됩니다. 또 머뭇거리다가 떠날 기회를 놓치는 것도 문제입니다.
머물러야 할 때 머무는 이는 듬직한 사람이요,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머물러야 할 때 떠나는 이는 가벼운 사람이요, 떠나야 할 때 머무는 이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으로 인해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일가족과 함께 믿음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행 안내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일가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 하란, 가나안 세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맺은 세 지역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을 함축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세 지역을 통해 「떠나야 할 곳 머물러야 할 곳」 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갈대아 우르(אוּר)를 떠나야 합니다. |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 기억하십시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의 고향입니다(B.C. 2166). 그 인생의 출발지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출발지입니다.
성경은 우르를 특별히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고 칭합니다. 갈대아는 이라크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주변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우르가 한 때는 수메르[Sumer] 제국의 수도로서 많은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고대 문명 공동체입니다. 오늘날로부터 보면 무려 4천 년 전부터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번성하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약 삼십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고대에는 도시가 번창하면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문화도 함께 유입되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이곳 우르도 달 신(神)으로 불리는 나나를 숭배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입니다. 고대인들은 도시 이름을 정할 때 도시의 내력과 실상을 살핀 뒤 그와 관련된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르는 불꽃,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발달한 부유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엇이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도시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문명의 도시 거대한 신전이 마을 중심 언덕에 버티고 있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일찍부터 많은 우상을 접하며 자랐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후대의 여호수아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수 24: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때부터 우상을 섬겨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장사를 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화신(火神) 숭배자였고 직업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브라함도 문명의 부요와 풍요 속에서 살았지만 말할 수 없는 영적 목마름과 공허 가운데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갈대아 우르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처럼 생명수를 갈급해 하는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단번에 우르의 인생을 접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떠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갈등 형제들과 갈등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성경은 이런 일들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목마름의 땅에서 생수의 땅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은 사실을 스데반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 07:0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0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0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그러면 오늘 우리는 갈대아 우르와 같은 영적 목마른 자리를 떠났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목마른 곳에서 방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셔서 심령의 문을 두드리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2. 하란(חָרָן)도 떠나야 합니다. |
창 12:0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이 처음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여러 걸림돌 때문에 즉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만류했을 것이고 고향 사람들의 만류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형제들도 크게 제동을 걸었을 것은 능히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아가는 길에 혹 걸림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제거하십니다. 그 예가(?), 바로 하란입니다(창 11:28).
이후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가나안으로 가고자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 지점인 하란에 머물고 맙니다. 왜 하란에서 머뭅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갈대아는 당시 최고의 문명권을 형성한 나라입니다.
하란은 갈대아의 법과 문명이 미치는 최변방(最邊方)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나 두려움 때문에 국경을 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갈대아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것은 혹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는 모험입니다. 그리하여 하란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러나 하란은 계속 머물고 있어서는 안 될 곳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분명 하란을 떠나려고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좀 걸림돌이 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떤 걸림돌 말입니까? 얘야,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 힘이 드니 그냥 여기서 살자. 이런 식의 인간적인 정의 걸림돌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데라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비전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브라함을 만류한다면 분명 걸림돌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이라는 목표를 앞에 두고서도 하란에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하란이 목적지가 아닌 이상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무의미한 곳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아버지 일로 지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또 개입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데려가신 것처럼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32, 행 07:04).
행 07:0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란은 장애물의 상징인 지체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령한 목적지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면 계속 전진하십시오. 신령한 곳을 향해 가는 길에 걸림돌 요소들이 혹 더러 있습니까? 그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듯이 벗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완전히 나오게 된 것도 홍해를 건너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도 요단강을 건너므로 가능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걸림돌이 되는 옛것과 단절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까? 단절하는 방법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즉위의 것을 찾는 믿음의 결단을 지금 해야 합니다.
골 03:0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0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영적으로 무엇으로 비교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좋은 것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풍습으로 비교됩니다.
이런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가나안(כְּנַעַן)에는 머물러야 합니다. |
창 12:0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구약시대 가나안은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등을 포함하는 아주 넓은 땅입니다.
이 지역은 지형상 분할되어 있어서 정치의 구심점을 갖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곳이 남쪽 이집트와 북쪽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다 보니 주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이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쪽에서는 알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하란에서 볼 때 그렇게 매력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나라도 다르고, 거리도 멀고, 거기다 문화권이 다른 곳인데 누가 관심을 가지기나 하겠습니까?
바로 이곳에 도시 생활로 익숙해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온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라는 말은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현대는 문명이 발달하여 교통수단으로 비행기나 자동차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기껏해야 낙타 정도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데 있어서 유프라테스강 변을 따라 시리아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광야를 횡단하는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헐몬산 남단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이미 하란에서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안정된 생활을 하였기에 소유물도 넉넉합니다. 그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시 미지의 세계에 온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모험입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거리가 지름길로 오면 480km 정도 됩니다. 가나안에서 다시 정착지를 찾아다니는 거리까지 합하면 약 600km 이상 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해 온 것은 믿음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는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길이 행복의 길이요, 살길이요, 영생의 길인 줄 알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띄엄띄엄 있는 산촌까지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가도 가도 도시라고는 없는 산악지대인가? 가끔 산동네만 보이는가? 그런 생각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여기다. 라고 하십니다(창 12:07). 아브라함이 멈추어 서서 돌아보니 좋은 평지는 고사하고 산악지대의 불모지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원망하지 않고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올립니다. 감사 거리가 안 보이는 곳에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제단을 쌓고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르와 하란의 문명권에서 잘 적응되어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곳이다. 라고 하심에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이는 그만큼 아브라함이 거한 곳이 정착지가 아니 산악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창 12:08, 09).
오늘날에도 복된 은혜와 풍요로움의 세계를 들어감에 있어서 길목마다 강변을 따라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길을 믿음과 인내로서 통과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복이 임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나안이라 할 때는 영적인 면에서 미래의 소망인 천국을 상징합니다.
현재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국도 함께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삶의 목표를 상징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 가나안은 의미 있고 힘이 있는 풍성한 생활을 누리게도 하는 곳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는 말씀처럼 여러분도 마침내 축복의 땅으로 들어왔습니까? 신앙생활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까?
구원의 감격이 넘치고 늘 기쁘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러면 신령한 면땅 가나안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도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라 하실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 11:0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김삼일 가족 여러분,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갈대아 우르와 같은 곳입니까? 지체하고 있는 하란과 같은 곳입니까? 아니면 축복의 땅 가나안입니까?
떠나야 할 곳과 머물 곳을 잘 구분하십시오. 세상의 쾌락, 세상의 편안함, 세상의 휘황찬란함, 세상의 인간 문명이라면 즉시 벗어나십시오.
기독교 역사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임을 기억하십시오. 의와 거룩함을 좇는 순례의 길을 잘 행하기를 축원합니다(롬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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