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잘 합니까?(히 11:13~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1. 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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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사는 동물들 가운데 녹색 거북이(Green turtle)가 있습니다. 이 거북이는 알을 낳고자 엄청난 거리를 항해하는 아주 영리한 존재입니다. 한 번은 브라질의 과학자들이 이들의 항해 경로를 조사하려고 녹색 거북이의 등에 인공위성 송신 무전기를 장착하고는 인공위성으로 추적하여 보았습니다.

그 결과 녹색 거북이는 브라질 동해안을 출발하여 대서양의 아선시온 섬까지 장장 4,500Km나 되는 먼 거리를 정확하게 항해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선시온 섬에서 암컷은 약 100여개 정도의 알을 모래 속에 놓고는 다시 브라질 동해안으로 돌아오는데 그 동안 모래 속의 알은 1주일 정도 지나면서 부화를 합니다.

 

이어서 새끼 거북이도 바다로 들어가서 그 순간부터 홀로 기나긴 항해를 시작하여 어미가 살던 브라질 동해안으로 돌아옵니다. 항해술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새끼 거북이가 나침도 없이 어미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돌아온다는 게 신기한 일입니다.

몇 년 후 이들이 어미 거북이가 되어 다시 머나먼 대서양의 아선시온 섬으로 알을 낳기 위해 긴 여행을 합니다. 누가 거북이에게 이런 항해술을 가르쳐 줄까요? 동물들은 이 놀라운 여행 술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며, 또한 최첨단 컴퓨터를 능가하는 고도의 정보가 내재되어 있어서 이 정보로 놀라운 종족번성을 위해 항해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으신 거북이의 여행 술을 통해서 우리 사람에게도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안내해 주십니다. 완벽한 설계를 통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에 우리는 찬양을 올리면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상에서의 날들을 믿음으로 잘 엮어서 내세의 큰 상급을 잘 준비하기를 축원합니다.

 

 

 1. 믿음의 조상들은 고향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성도 여러분도 여러분을 따뜻하게 맞아줄 고향이 있으시죠? 고향이 있고 또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고향 하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표현을 하여 내 고향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두메산골, 바닷가 등으로 소개를 합니다. 고향, 말만 들어도 정말 가슴이 설렙니다.

전통 가요의 가사 중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가 무척이나 많은 것도 그만큼 고향의 향수가 진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누구든 고향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태어난 곳을 생각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가는 거지요. 여우는 죽을 때 태어난 곳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울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을 때에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린 사람도 있고, 못 가는 고향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짓는 사람도 있고, 북한이 고향인 사람은 임진각이나 통일 전망대에 올라가서 북녘을 바라보며 울기도 합니다.

 

여기 15절의 본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곳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고향을 떠나라 할 때 아브라함은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믿음의 길, 순례의 길을 과감하게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 할 때 자신의 고향 쪽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 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 아들을 고향으로 직접 데리고 가지 말라(24:06) 하였고, 야곱도 하란에서 20년을 살면서도 그곳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왔습니다(30:25; 31:03).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고향의 향수를 그리워하였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고향을 자신들의 돌아갈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조금도 그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이란 옛날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고향이나 후에 거하였던 가나안 땅을 자신의 영적 터전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더 좋은 영원한 본향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믿음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다다르는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니 육신의 고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 13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고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고향, 믿음과 거리가 먼 고향은 접어두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는 그런 뜻입니다.

 

 

 2. 성도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세상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출세를 할까? 좀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까?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날까?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사실 대체적인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투기하여 돈을 벌수 있겠는가? 입니다. 그래서 증권에 대한 얘기, 부동산에 대한 얘기, 집에 대한 얘기가 주종을 이루며, 좀 더 돈을 벌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쳐서 아깝게 되었다는 이런 후회도 더러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말씀에 순종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화성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이 말의 뜻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현실에서는 비록 나그네 생활이 어렵게 여겨져도 눈앞의 환경을 뛰어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삶이 어려울 때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든지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바라보는 영원한 본향이 더 크고 귀하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이제 고향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여러분의 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지금껏 부지런히 뛰어 다닙니까? 또 무엇을 얼마나 거두어 들이셨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대단한 것처럼 여겨집니까? 삶의 가치관이 건전하지 못하면 아직도 옛사람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06:33)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과,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길 원하였습니다(01:20; 고전 10:31). 그런데 우리의 삶의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가치 있는 믿음의 삶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위해 더욱 힘쓰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딤전 0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번영이 탐심을 낳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거부(巨富)에게 돈을 벌려는 그 힘든 노력을 언제 그만 두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거부는 돈을 충분히 가졌을 때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충분하다는 것이 얼마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얼른 1달러 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숨 쉬는 천국,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는 삶을 즐거워하며 삽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음을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제가 소개하겠습니다.

 

23:0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0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3. 여러분은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잘 하고 있습니까?

 

16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후의 세계를 아주 복잡하게 이야기합니다. 가령 제일 잘된 사람은 극락(極樂)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드문 일로서 대부분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하거나 그보다 못하면 짐승으로, 그리고 제일 못하면 미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또 대부분 객사하거나 교통사고로 죽거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혼은 구천(九天)을 떠돌므로 그 영혼을 위해서 49제라는 것을 드려야 환생한다며 거금을 들여 49제를 유도합니다.

 

공자는 사후 세계에 대하여 답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 중 안연이란 사람이 와서 사후 세계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살아서 일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은 다음의 일을 알겠느냐? 하며 사후 세계에 대하여 모른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사후 세계에 대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안내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분명하게 안내하며, 부활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어느 종교가 이처럼 사후 세계를 말해 줍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찾았던 더 나은 본향은 세상에서 임시 머무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좋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는 말은 열렬히 갈망한다는 의미로서 믿음의 조상들은 영원한 본향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현실보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이 성은 그들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가서 누릴 영원한 처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육신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분명히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누굴까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지 못하여 그곳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03:01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0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육신의 고향은 말만 들어도 가슴 뭉클해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고통과 외로움 고독한 일들만 가득하게 쌓여 있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이 다른 사람은 이 세상에 꿈과 영원한 소망을 두거나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endif]-->여기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어린아이 시절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그리고 땅 따먹기를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중에 땅 따먹기가 제일 재밌습니다.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 손을 길게 쭉 펴서 땅을 늘리려 하던 그때의 놀이가 지금도 선합니다.

그러나 어느 듯 해가 서산으로 지고 어둠이 내리면 어머니들이 나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때까지 하던 땅 따먹기를 발로 휙 뭉개면서 끝이 납니다아무리 딱지를 많이 따고, 구슬을 많이 모으며, 땅을 많이 땄어도 해가 지면 끝이 나서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생의 밤과 죽음의 밤도 인생의 한계가 오면 끝이 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지도나 도로 표지판을 이용하고, 항해사는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며, 항공기 조종사들은 자동 항법장치를 이용하여 운행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은 인생 여행에 있어서 이런 세상적인 도구들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침판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벌써 12월의 첫 주 설립기념 주일에 들어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금년의 지난 시간들을 결산해 보자면,

해가 저물어 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진정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는가?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본향을 향하여 언제고 갈 수 있는 준비를 하였는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 심판 날에 많은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했습니다. 라고 말 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0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