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예수님을 만나는 성탄절(요 01:09~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2. 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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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맞는 성탄절인데 사회의 분위가가 어두운 탓인지 거리마다 트리 장식이나 캐럴 송이 너무 한산한 것을 보면 이제는 사람들에게 별 관심 없는 절기입니다. 요란한 것보다 분위기는 무겁지만 차라리 조용한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점잔하고 조용한 성탄절이 더 좋지 않을까요? 성경에서의 성탄절 정신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성탄절이란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이고,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살핀다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Christ)+경배(Mass)의 합성어로서 예수님을 경배하여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서 임마누엘이라는 말로도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01:23). 바로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사람의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을 비우고 위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으로 오늘의 말씀을 받으면 성탄절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 함께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내가 만나고 그 분과 함께 동행을 하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탄절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날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두 가지 태도가 나오는데 영접하는 자가 있고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밝히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로서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까지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셨겠지만, 혹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한 분들은 없습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기쁨으로 축하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거절하거나, 증오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을 한 번 보겠습니다.

 

미움과 증오의 헤롯 왕(02:01). 헤롯 왕은 의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으로서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호적을 하라고 명령할 때의 통치자입니다(02:01). 이 사람은 40여년 왕위에 있으면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원형경기장을 건축했고, 수도 공사를 했고, 예루살렘 제 3성전을 건축(40년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인물이었기에 아내가 10명이고 자식이 15명이었지만 자기의 권력을 위하여 아내도, 장모도, 세 명의 아들까지도 살해한 인물입니다.

당시 로마의 줄리어스 시이저 황제는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고 말했다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 때 동방 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제보와 그 뒤에 일이 자기에게 좀 꼬이자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인 아주 잔인한 인물입니다

 

세속화된 제사장과 서기관들(02:04~06). 이들의 반응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무관심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지도 않았고 메시아의 탄생에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들의 특권만 챙기고, 헤롯 왕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여 메시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 그것은 당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영성 면에서 깊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질이나, 명예나, 사회적 생활에서 볼 때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돈벌이에만 집착한 여관집 주인(02:07). 오직 돈 벌이에만 집착하다 보니 만삭된 마리아가 찾아왔어도 방 한 칸 내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관집 구유에서 나셨다면 여관집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메시아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의 찬스를 만난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알고 보면 땅을 치고 통곡 할 일입니다만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런 복을 받을 기회가 와도 잡지를 못합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성탄절 카드가 옵니다만 믿음과는 별 상관없는 분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정치적 보험을 드는 식으로 보내옵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행위 속에 상업의 속셈, 정치적인 계산만 들어 있다면 그 카드는 진정한 의미를 담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거리에 나서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돈벌이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장사를 위해서 크리스마스를 이용하는 불신자들의 크리스마스는 돈벌이에 집착하여 방 하나도 내어주지 못하는 여관집 주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 성탄절은 메시아 예언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탄절은 무엇보다 최초의 메시아의 예언, 즉 원시복음(原始福音)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진 날입니다. 원시복음으로만 머물던 메시아사상이 이제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구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날입니다. 이 원시복음의 본체인 주님께서 비록 구유(구시 혹은 죽통. 02:07)에서 나셨지만 이 놀라운 사건은 인류의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예언되어 있던 일입니다.

 

0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이 틀림없지만 예수님만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셨기 때문입니다. 01~03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 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되는 분입니다(01:15).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함은 신성은 그대로 지니면서 자발적으로 인성을 입으셨다는 의미로서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 합니다. 성육신이란 14절 말씀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개념으로서 여기서 말씀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을 말합니다.

 

아직 세상에 오시기 전 성부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고, 함께 일하셨던 바로 그 성자 하나님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할 때 육신이란 단순히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다 포함한 전 인격체를 말합니다(04:13). 그러므로 성육신이란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어우러져있다는 이 성육신이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가 아닙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 그리고 낮아짐의 표현입니다.

어떻게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인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예 하나님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신비 중의 신비를 경건의 비밀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딤전 0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메시아의 예언이 이루어진 성탄절은 바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날이므로, 이제부터 나의 삶의 스타일을 주님처럼 낮은 자세, 낮은 마음, 섬기는 마음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오셨는데 그러면 왜 이처럼 낮아진 자리로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섬겨주기 위해서입니다.

 

02:0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3. 성탄절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날입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서의 저자 요한은 14절에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라는 표현으로 주님의 영광을 본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과거의 것은 잊히기 쉽고, 현재의 것은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본다는 것은 그 옛날 갈릴리 중심으로 일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은 한참 지난 일로서 오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본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삼년간 함께했던 육신의 주님이 떠나신 후 오순절 성령님 강림사건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새롭게 변화 되었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즈음에 요한은 그 옛날의 요한이 아니라 신령한 세계를 볼 줄 아는 요한입니다.

 

이제 영의 눈을 뜨고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돌아보니 인류의 구세주이신 영광의 주님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을 본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거나, 영적 눈이 감겨 있음으로 인해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하거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우물가의 여인, 제자 빌립

 

0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4:0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0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왜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합니까?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고 했고, 또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도 왜 알아보지 못합니까? 세상의 기득권과 이권이 영적인 눈과 영적인 귀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물질세계에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나는 주님과 관계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의 아내가 오랜만에 한국을 가서 한 달 동안 있다가 오게 되자 아내를 맞이하러 공항에 나갔습니다. 한 달 만에 아내가 오는데 승객 명단에도 있고, 비행기도 다 도착했다고 사인 판에 나오고, 사람도 다 나왔는데 아내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상하다. 비행기 명단에도 있고 비행기도 맞고, 그래도 나오지 않으니 인천공항에서 도로 들어갔는가? 혹 아픈가? 하면서 걱정하며 집에 오니 아내가 와 있는 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보자마자 한 달 만에 오는데 공항에도 안 나오고 어디를 갔다 오는 거예요? 하며 막 화를 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공항에서 오는 길이라고, 2시간 이상 기다렸어 하며 대응을 합니다.

실은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한 거지요. 그러자 남편이 순간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비슷한 여자가 한명 지나가더니 당신 이었는가 벼. 그래서 그 소문이 퍼져 비슷한 여자와 사는 집사라고 놀림감이 된 적이 있습니다.

 

, 비슷한 여자와 사는 이 분처럼, 우리의 믿음생활도 확실성 없이 그저 비슷한 믿음, 짝퉁수준의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는 경우는 아닙니까? 바로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유명한 영화(데이비드 린 감독의 1957년 작)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이 태국의 콰이강에 철도용 다리를 놓는 과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내용은 일본군이 포로로 잡아 온 사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 일을 동원하였는데 어느 날 이 다리공사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비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포로들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리가 놓이면 일본군은 작전을 빨리 수행하게 되지만 연합군에게는 피해가 가니 포로들 중 누군가가 그 장비를 훔쳐 숨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전부 불러 모은 후 없어진 장비를 당장 가져다 놓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포로병들 전체가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때에 영국군 포로 한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장비를 다른 곳에서 찾게 됩니다.

한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영국군 포로는 내가 희생하지 아니하면 다 죽는다고 생각하고 내 한 몸을 던져 전체를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주님께서 한 몸을 던지러 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의 정신은 예수님처럼 비우고 포기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내 한 몸을 줄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얻은 것, 가진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던져주는 그런 성탄절의 정신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더러는 성탄절이 정확히 1225일인지 물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습니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20일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2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이었으며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 신인 정의의 태양 탄생일에 대치한 것입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16일에 예수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님의 탄생도 연결시켰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25일을 성탄일로 지키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