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추수감사주일>하나님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시 108:01~0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1. 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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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농부가 기쁨에 찬 얼굴로 아내에게 달려와 여보, 우리 암소가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소. 하며 흥분 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합니다. 한 마리는 붉고 다른 한 마리는 흰 송아지입니다.

너무 감사한 나머지 농부는 아내에게 이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때가 되면 팔아서 주님을 위해서 헌금합시다. 라고 말했고 이 말에 아내도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물어 봅니다. 여보, 주님께 바칠 송아지는 어느 것이에요?

하자 남편은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요. 두 마리를 키우다가 때가 되면 그 때 정하기로 합시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 하는 말이 여보,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하는 겁니다. 이때 아내가 따지듯이 묻습니다. 아니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송아지인지 결정하지 않았잖아요. 이에 남편이 대답하기를 나는 말이야, 벌써부터 흰 놈을 드리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하필 흰 놈이 죽어버렸어 하더랍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태도나 주변의 생활환경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혹 극한 슬픔을 만날지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떨칠 수도 있고 잠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놓고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줄 것인가 안줄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면 행동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믿음 생활에 진보가 없으신 분들도 나름 다 열심히 해 보아야지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은 다 의지와 결심이 약한 탓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정한다는 것 즉 믿음의 뜻을 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 다윗 왕은 본문 시 108편을 통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라는 간절한 고백을 합니다. 57:07절에서는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이요 또 시인이었던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정했는지를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0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건강한 믿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내 마음이 은혜의 방향으로 확고하게 정해져 있어야만 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면 부실한 신자가 되지 않을까요?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57:07). 다윗이 자기의 마음을 정했다고 하는 것은 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의미로서 거듭난 마음, 성령님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졌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으로서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어릴 때부터 뛰어난 시창력(詩唱力)과 연주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를 창작했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곡을 붙여 노래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다윗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마음을 다져 왔기 때문에 사울 왕의 치하에서 정적에게 쫓기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또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겪고 맨발로 피난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주시는 찬양의 은혜로 이 모든 고난을 극복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마음을 다 한다는 원문의 의미는 나의 모든 영광을 다 바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생활에 더욱 온 정성을 쏟겠다는 각오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더욱 힘 있게 울려나왔는데 이런 찬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쇄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었던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 왔지만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니 옥문이 열리는 기적, 사람의 심령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16:25).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찬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노래에는 발성법과 호흡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입술로 부르는 경우가 있고 마음(심령)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술로 부르는 찬양은 듣는 사람의 귀를 감미롭게 할 수 있는 반면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은 듣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의심이 가득하면 입에서 의심의 말이 나오고, 원망이 가득하면 입에서 원망이 터져 나오고, 불평이 가득하면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에 감사가 충만하면 입에서도 감사의 말과 찬송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확정하면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찬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높이는 감동의 찬양은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위치와 특권을 잘 활용하십시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이 각오를 가지고 4천명의 찬양대까지 육성한 찬양에 올인하는 생활이었습니다(대상 23:05).

 

 

 2. 다윗은 새벽을 깨우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02 비파야, 수금아, 깰 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02절을 읽으면서 또 새벽기도 나오라고 하는 구먼 하는 부담을 가질 분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새벽기도를 강조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니까요?(57:08) 그러나 이 구절은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의미 보다 더 깊이가 있는 영적 고백입니다.

새벽은 누가 깨우고 말고 할 것이 없어요. 혹 오늘 새벽을 깨우신 분 있습니까? 어두운 밤이 지나고 때가 되면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다윗이 깨우겠다는 새벽은 그 새벽이 아니라 영혼의 새벽입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무너진 영혼이 깨어나게 하겠다는 그런 새벽이에요?

 

시간적인 새벽은 시계 바늘만 돌아가면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만 영혼의 새벽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깨워야만 옵니다. 절망과 분노와 두려움과 피로에 지쳐 잠긴 영혼은 깨우지 않으면 한 주, 한 달, 일 년, 아니 평생 그대로 갑니다.

그러나 영혼의 새벽은 믿음으로 깨우면 금방 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두드리며 깨웁니다. 새벽에 비파와 수금을 꺼내들고 조율하면서 자신의 처져 있는 영적 리듬을 깨웁니다.

 

지금은 새벽 종소리가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만 한 때는 교회의 은은한 새벽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새벽의 제단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시들어가는 영혼을 깨우는 사람이며, 잠든 민족의 혼도 깨우는 사람 아닐까요?

다윗은 하나님, 저는 비파와 수금과 기도로 새벽을 깨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런 고백이 과연 쉬운 일입니까? 안 쉽습니다. 통치자의 신분이다 보면 낮에는 정사를 돌보느라 얼마나 바쁩니까?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내 가족의 영혼을 깨우고, 내 민족의 깊은 영혼의 잠을 깨우겠다는 겁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교인에게 신년도 서리 집사를 앞두고 임명하면 순종하라 했더니 그 대답이 무척 걸작입니다. 목사님, 저는 체질이 야행성(夜行性)이어서 저녁 늦게까지 잠을 안자는 것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으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집사가 되면 새벽 기도회에 나가야 할 터인데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만은 어렵겠습니다.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씀을 안 하시면 집사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야행성이라 특새를 발표해도 새벽엔 못 일어난다고 하던 분이 낚시를 가는 모임이나 관광을 위한 계획이 있을 때는 꼭두새벽이라도 일어나 설치지 않습니까?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고,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각오, 얼마나 아름답고 복 된 일입니까? 우리에겐 새벽을 깨우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제가 결코 내 영혼의 어두움을 용납하지 않고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그 각오는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새벽을 깨달은 사람들의 기도의 모습과 그로 인한 기적의 현장을 제가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하는 심판의 불 속에 뛰어 들어가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천사의 허리춤을 붙들고 애원했던 때가 바로 이른 새벽이었으며(19:27),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그 뒤를 추격하던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으며(14:24),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시간이 새벽이었고, 광야에서 만나가 내린 시간이 새벽이었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난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06:19).

 

46:0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3. 다윗은 감사하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0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다윗은 한평생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았고, 다윗이 기록한 시편들에는 전체적인 흐름이 한결같이 감사로 새겨져 있으며 특히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여러분 기도원과 교도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반적인 생활은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거친 식사나 불편한 잠자리, 적적한 환경, 독방이나 기도굴 등은 교도소나 기도원이 다 거기가 거기입니다. 거의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차이를 구분한다면 교도소와 기도원의 차이는 불평을 하느냐? 아니면 감사를 하느냐? 입니다. 즉 교도소에는 대개 불평이 가득하고 기도원은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플라톤(Platon,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 철학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세계를 알지 못한 플라톤과 같은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가는 다윗과 같은 감사로 삽시다, 어떤 일에도 불평을 제거하면서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하며 삽시다. 언제나 심령으로 감사하며 삽시다.

 

가난한 학생이 여행 중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누가 신발을 도둑질해 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제 밤 잠자기 전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시오. 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도둑맞았습니다. 그는 대단히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났는데 하필이면 가난한 자기 신발을 훔쳐가게 내버려둔 하나님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미안해하며 창고에서 헌 신발 한 켤레를 꺼내주며 오늘은 주일이니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따라가긴 했지만 기도도 찬송도 되지 않고, 신발 생각만 계속 나는 중에 같은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는가 하면 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간절하고 감격스러워서 그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 가난한 학생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발 신을 발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사와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신발 한 켤레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투정을 부렸구나. 라며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훗날 독일의 유명한 재무장관이 된 마르틴 바덴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항상 감사 할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요즘 같은 환경에서는 불평할 일이 더 많을는지도 모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05:18)는 말씀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운 환경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감사에 대한 마음을 확정하라고 권합니다. 항상 감사의 거리를 찾는 영적 눈을 하나님께로 고정시키십시오. 감사의 원리가 내 마음을 항상 지배할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눈에 감사거리로 다가 올 것입니다.

 

금년 한 해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돌아봅시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복을 다음주일에는 넉넉하게 감사로 표현 할 수 있는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부인이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갔습니다. 이웃집 부인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고맙습니다. 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얘야, 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해야지? 하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껍질을 벗겨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일곱 살 난 이 아이뿐이 아닙니다. 이 아이의 모습은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침묵한 채 더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요구하며,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 않을 때는 오히려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01:0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내 마음을 정하였다는 말은 내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켜 변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그 마음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마음이 확정되면 적극적인 믿음으로 바뀌며, 늘 의심만 하던 사람도 마음이 확정되면 그때부터 믿음은 전에 누리지 못했던 믿음으로 바뀌어 집니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