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VIP이신 당신을 초청합니다.(창 08:06~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1. 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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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南美) 칠레의 한 작은 마을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동네에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목사님께 다짜고짜 당신은 이곳에서 15년을 살면서 어떻게 내게 한 번도 주님을 소개하지 않고 교회로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라는 원망의 말을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마음이 편치 못하여 죄스런 마음으로 5분 정도 철길을 따라 걷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기차에 치어 죽은 한 사람의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 죽은 사람을 가만히 보니 바로 5분 전 자기에게 원망스런 이야기를 한 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방금 전에 기차 기적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해서 이럴 수가 없다며 사람들에게 언제 죽었는지 물어보니 이미 1시간 전에 사고가 나서 지금 경찰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순간 목사님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 나타나 왜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소리를 복음 전파에 게으른 자신을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알고 그때부터 틈이 나기만 하면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관에서 보면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적 있는 인생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김해삼일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일에 복음의 사명자로 부름 받았다는 목적의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믿음의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꿈이 좋은 소식을 창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의 꿈을 꾸면서 VIP이신 당신을 초청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은혜를 저버린 까마귀.

 

0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往來)하였더라.

 

방주가 산에 닿은 지 73일 째 되는 날 101일 산봉우리들이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40일이 지나자 노아는 방주 3층에 만들어놓은 창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까마귀를 날려 보냅니다. 지면에 물이 얼마나 감하여졌느냐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07절은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앞으로 날아갔다가 되돌아 왔다는 반복의 표현으로서 방주 안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아니라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앉을 곳을 찾아 날아다녔다는 뜻입니다.

 

만일 까마귀가 방주 안으로 돌아왔더라면 노아는 이 까마귀에게 재차 사명을 맡겨서 방주 밖으로 내놓았을 것이지만(08), 까마귀는 방주 주위만 배회하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왜 까마귀가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걸까요?

땅의 물이 다 줄어들어 거할 곳이 많아서 입니까? 이 까마귀는 방주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날면서 보니 사람들과 동물들의 죽은 시체 등 먹거리가 넉넉함으로 인해 돌아오지 않은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아가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보낸 우선 목적은 그런 시체물들을 취하며 살라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취해도 되는 일로서, 지금 까마귀가 할 일은 즉시 방주로 돌아가 노아에게 땅의 상황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까마귀는 방주 안에서의 보호를 망각하고 밖에서의 죽은 시체물의 먹거리에 정신을 빼앗겨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낸 노아의 품, 방주가 답답하게 여겨져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는 은혜를 저 버린 새 아닙니까?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과 믿음은 세상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혜를 저버린 까마귀를 통하여 상징적인 의미에서 은혜를 저버린 신앙인의 모습, 사명을 저버린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유익이나 덕을 끼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바로 이 분들이야말로 까마귀와 같은 신자라고 비유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를 삶의 한 수단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길 것이며, 교회를 문화인의 친교 수단 내지 직업상 상업적 이익 추구의 한 방편으로 여깁니다. 교회의 유익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며,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의 이익을 생각한다 할까요? 죄송하지만 이런 분들의 인생 스타일은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예배는 드리지 못하고 그저 교회와 세상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만 합니다.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믿음의 목적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적이 없이 그저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이 또한 무의미한 삶이요 어쩌면 불행한 삶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까마귀는 방주 안에서 나와 세상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썩은 고기를 찾아 행했을 것이고 보면 이런 까마귀의 모습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여 타락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2. 1차 비둘기 작전.

 

0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노아는 앞서 까마귀를 내어놓은 목적이 지면에서의 물이 감한 여부이었지만 까마귀는 노아의 뜻을 저 버리고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품 방주보다 세상이 더 좋았기 때문에, 방주의 고마움을 잊었기 때문에, 방주에 있는 주인은 어찌 되건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고 여겨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어 노아는 귀소성(歸巢性) 강한 비둘기를 내어 보내는데 노아가 이 비둘기를 택한 것은 귀소성의 성질을 따라 물이 감한 증거물 즉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11).

 

0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비둘기 역시 까마귀와 같은 여건에서 물위를 날았지만 발 내릴 곳을 찾지 못하자 방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즉각 방주로 돌아왔습니다비둘기가 왜 돌아왔을까요? 땅의 물이 아직은 덜 말랐기 때문에 노아가 나가서 생활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는 말은 마땅한 휴식처를 발견치 못했다는 강한 의미로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함은 눈이 없어서, 다리가 없어서, 날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차원이 다른 정결함을 지향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건조하고 깨끗한 곳에만 앉는 동물로서 먹이 역시 깨끗해야 하는데 땅은 여전히 습기가 있고 진흙투성이인 상태입니다. 아무리 공중을 자유롭게 날며 활동해 봐도 까마귀와 달리 앉을 곳도 먹을 것도 없자 노아의 품이 제일인 줄 알고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어느 한 곳에도 발 딛지 못하고 종일토록 사명을 따라 날아다니느라 지친 비둘기에게 노아가 내민 손바닥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한 안식처 아니겠습니까?

발붙일 곳이 없어서, 방주 밖이 불안정하여서 돌아오는 비둘기처럼, 돌아올 줄 아는 것이 지혜이며, 아닌 곳을 가다가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되면 휴가도 가고, 또 비전트립도 가지 않습니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돌아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성도들도 세상에서 안식과 기쁨을 찾기보다는, 주님의 품으로 오는 자에게 만이 참된 기쁨과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앉고 서는 자리가 분명해야 하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성도는 그 은혜의 품이 최고인 줄 알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거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돌아설 줄도 알고,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본래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25:0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3. 2차 비둘기 작전.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노아가 칠 일을 주기로(12)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 보내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이렇게 칠 일을 계산하는 것은 방주 안에서도 거룩한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방주 안에서도 천지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안식일(02:01~03)을 엄숙히 지켰으며, 당시에도 한 주간은 오늘날과 같은 칠 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주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믿음과 기도와 인내로서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저녁때쯤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 것은 비둘기가 노아에게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 종일토록 좋은 소식을 찾아 날아 다녔다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지금 물이 대단히 많이 감하여진 것과 생명운동이 이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로서 감람나무 잎을 입으로 찢어서 물고 왔는데 이때 노아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감람나무 새 잎사귀. 감람나무는 과일 나무로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서(08:08) 주로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06:11), 등유로(27:20), 거룩한 관유로(30:25)서 포도, 무화과와 더불어 중요한 과일나무입니다. 비둘기가 물어온 감람 새 잎사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감람나무는 고산지대가 아닌 저지대에서 재배하는 작물로 이제 물이 낮은 곳까지 빠져서 새싹이 돋는 생명의 땅이 된 증거입니다. 그 무서운 천지가 개벽한 홍수 가운데서 이런 소식을 노아가 보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을 기억(권념)하신 증거입니다(01).

 

노아가 비록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였지만 방주 안에서 긴 나날들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잊힌 사람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하며 언제 풀려날 지에 대한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노아에게 비둘기를 통하여 새 소망의 소식을 받은 것입니다. 홍수 심판 후 제일 먼저 나타난 감람나무의 새잎은 창조적인 사역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영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제 사망의 물은 물러가고 다시 심음과 거둠의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는 구원의 소식을 알려준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의 상징입니다. 성전의 불은 감람유로서 사용하되(27:20) 영원히 꺼지지 않고 밝혀야 하며 꺼지지 않음은 우리의 소망의 빛이 됨을 말해 줍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 안에 영적으로 비둘기와 같은 성도 한 분만 있어도 분위기가 달라질 것 아닐까요? , 교회가 계속 잠을 잘 것인가? 깨어 일어날 것인가? 는 비둘기 같은 성도 한 분이 있느냐? 복음의 소식을 가져 오느냐 오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명을 받고도 은혜를 망각하여 까마귀처럼 제 역할을 못하거나 떠난다면 이런 분들은 교회에 아무리 있어도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은혜 받은 성도는 교회의 생활이 때로는 부자유하게 느껴지고 내 뜻대로 잘 안 된다고 해서 박차고 나가거나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이 부자유하다 해서 그 품을 떠나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도들은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일을 하다 주일날 교회로 올 때는 새 감람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와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밝은 소식을 가져와서 함께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비둘기가 귀소 본능이 강한 새임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이상의 은혜를 갚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비둘기는 그때그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이제 지면에는 물이 줄어들어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새 생활을 일구어도 좋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김해삼일 가족들에게 12월 첫 주 설립기념 주일까지 VIP이신 당신을 초청합니다. 라는 슬로건을 따라 VIP를 모셔오는 일에 적극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시고 믿음으로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0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밤늦게 손님을 태우고 과속으로 달리는 일명 총알택시를 타본 적 있습니까? 손님이 목적지를 택시기사에게 말해주면 그야말로 총알처럼 달려 목적지에 데려다 줍니다. 꼭 총알택시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택시들은 빨리 달리기 때문에 바쁠 때 요긴하게 이용한 경험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천천히 달리는 택시도 볼 때가 있습니다. 택시답지 않게 아주 느리게 갑니다. 왜 그럴까요? 손님을 태우지 못하여 어디로 갈지 두리번거리며 방황하는 택시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손님을 태우지 못한 택시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방황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예수님을 만나야 방황을 끝낼 수 있으며, 주님께서 내 인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는 비전을 들어야만 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니까?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하여 감람나무 새 잎사귀처럼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김해삼일 가족들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