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종교개혁주일] 종교개혁을 믿음으로 이끈 사람(롬 01:17, 마 21:12~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10. 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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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 년 동안 52주일을 맞이합니다. 그 가운데 절기 주일을 맞으면 아무래도 정성을 더 들여서 의상을 갖추고 헌금도 드리며 행사도 합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일은 세계만방 교회가 기념하고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제의 신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성공으로 이끈 일을 기념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시킨 주일입니다.

종교개혁(宗敎改革)은 독일의 한 수도사 마틴 루터(M. Luther 1483.11.10.~1546.2.18.)가 로마 가톨릭교의 부패를 지적한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마틴 루터 이전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많이 있었습니다. 다만 종교개혁이 루터에 의해서 성공의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이라 부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직접 원인은 죄를 속한다는 소위 면죄부(免罪符) 판매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16세기는 결과로는 교회를 회복하는 시대였습니다.

교회사 관점으로는 신교로 전환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높아갑니다.

이렇게 소리가 커지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가 부패하여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2013년은 종교개혁 496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가족과 함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루터를 중심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종교개혁을 믿음으로 이끈 사람」으로 정했습니다.

 

 

1.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배경입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먼저 종교개혁의 선봉에서 성공으로 이끈 마틴 루터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북부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광부 한스의 아들로 태어나 1546년 이월 18일 6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터는 어린 시절 만스펠드(Mansfeld) 농촌 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1497). 비록 가정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부모님의 강한 교육열을 배경으로 18세에(1501) 에르푸르트(Erfurt. 유명론의 보루로 명성을 떨치던)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합니다.

1502년 그곳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3년 뒤에는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아 경제의 안정이 보장된 법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1505년 7월 2일입니다.

 

친구와 함께 고향을 향해 가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소낙비를 만나게 되자 비를 피해 나무 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일을 보았습니다. 이때 루터는 친구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인생 무상함을 느끼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목숨만 살려주시면 법학을 그만두고 수도사(修道士)가 되겠습니다. 하고 서원했습니다. 이후 루터는 법관의 길을 접었습니다. 바로 오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사제 서품(敍品)을 받고(1507) 1512년에 신학 박사가 되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1510년쯤 하루는 루터가 수도사들 순례 여행 코스 중 하나로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스칼라 산타(Scala Santa) 성당 내부의 빌라도 계단이라는 28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고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돌계단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272년 2월 27일~337년 5월 22일)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 축조된 계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려고 밟고 올라가신 계단을 로마로 옮겨와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이 계단에는 유리 조각을 깔아 놓고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가 무릎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구원과 죄 사함을 받는다는 그릇된 고행 의식입니다.

 

루터가 로마를 방문하여 이 스칼라 산타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고행을 체험하고 있을 때 바로 롬 01:17 말씀이 심령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이렇게 고행과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후 바로 일어나 계단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 후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대성당 앞에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라틴어로 쓰인 한 문서를 꺼내어 나무로 만든 문짝 위에 못질하여 달았습니다. 그 글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진리를 밝히려는 열망에서 문학사요 신학사이며 사제인 루터의 사회로 다음 논제들이 비텐베르크에서 토의되겠습니다. 이 구술 토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서신으로라도 의견을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공개토론 문서의 내용이 그 유명한 95개 조항입니다. 이 문서가 공개된 지 2주 만에 전 독일에 영성 회복을 위한 신앙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약 4주 만에 전 유럽이 변화의 물결로 덮였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①속죄표(免罪符)는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고 ②속죄표는 죄의 벌을 면할 수 없고 ③속죄표는 연옥(煉獄)에 있는 영을 구할 수 없고 ④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이 운동 앞에 당시 로마 가톨릭은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부패와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주일이란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 다음으로 매우 뜻깊은 주일입니다. 이는 교회사 면에서 약 천 년 동안의 영적 암흑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로마 가톨릭의 교권 탄압으로부터 해방된 믿음의 용사들이 교황제도와 교회 의식과 면죄부 등 복음에서 이탈된 일에 대한 신학 교리를 확립하는 날입니다.

 

 

2.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했던 때와 예수님 당시 상황이 같습니다.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막상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왔을 때 종교 유대인과 지도자들은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신령한 면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영적 맹인이 되었으니 어디 백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특히 제사장들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상인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환전상과 비둘기, 양, 소를 판매하는 자들을 성전(이방인의 뜰)으로 끌어들여 영업권을 내주었습니다.

 

결과는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예수님은 상인들의 좌판과 의자를 엎으시고 이들을 성전 밖으로 과감하게 내쫓았습니다.

이런 타락 현상이 후대의 루터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랄 바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기가 몸담은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기독교는 역사 면에서 주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그 무서운 핍박을 마감하고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어 발전해 온 종교입니다. 이제 황제는 신이 아니다. 교인이다. 대신들도 교인이다. 평민도 동등한 교인이다. 하고 외치면서 교회 예배당은 크게 건축되었습니다.

기독교 문화도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기독교에 위기가 왔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기 전 박해 시대에 사자 밥이 되면서도 손에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던 그 영성이 점점 사라진 일입니다. 교권과 외식과 세상 물욕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제도화되고 권력이 밀려오면서 오히려 영적 생명력은 메말라 버렸습니다. 특히 중세(5세기~16세기 약 1,100년)로 접어들수록 심화하였습니다. 

이런 영적 헐벗음을 정화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입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교황의 절대무오설과 성직자의 특권 그리고 교회 전통 및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선전하였습니다. 성경 이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 백 년이 넘게 진행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성당을 완공하기 위해 막대한 공사비 충당 방편으로 알베르트(1490~1545) 대주교와 이권(利權)을 거래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면죄부입니다.

 

교황과 대주교 두 사람이 속죄표 판매를 위한 일에 의견일치 하게 된 일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분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알베르트도 마인츠(Mainz)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속죄표 판매를 청부 맡아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였습니다.

즉시 도미니크 출신 테첼(1450~1519)을 고용하여 신학 박사의 학위를 주고는 곳곳마다 다니면서 면죄부에 대해 웅변하게 했습니다.

테첼은 가는 곳마다 속죄표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고, 부모나 형제 또한 조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었을 때 연옥(煉獄)에 가 있다. 그런 자를 위해서 그 자녀나 가족이 속죄표를 사기만 하면 된다. 헌금함에 쨍하고 돈이 떨어지는 순간 사죄의 은총이 임한다. .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이 그 웅변에 미혹되어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는 속죄표를 사면 내 지은 죄가 사함을 받아 없어진다는 일종의 심리 면에서 면죄부(免罪符)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연설입니다.

그 외에도 당시 그 성의 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행 03:06) 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많다. 교만이 넘치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7.25. 독일의 신비 사상가)는 로마 가톨릭은 은과 금은 많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없다. 하며 맞섰습니다.

 

 

3.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끄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만났습니까?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끄는 동안 하나님의 동행을 믿었을지라도 모든 일이 그렇게 수월하다거나 평탄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에게 주위 환경이 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거대한 권력과 감시로 인해 일상생활은 계속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루터로 인해 일어난 종교개혁을 로마 가톨릭은 처음에 철모르는 어린 신부의 생각 없는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파문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루터 때문에 면죄부 판매는 망쳤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인 1518년 7월 당황한 교황은 루터를 소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추기경 카제타누스(Cajetanus)를 시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압박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루터의 마음을 돌리려 회유 정책을 썼습니다.

그 일례로 1518년 12월 교황은 그의 시종 밀티쯔(Miltitz)를 시켜 황금 장미를 보내었습니다. 황금 장미는 교황에 의한 축복으로 알고 누구나 받기를 바라는 명예입니다.

그렇다고 불의를 향해 개혁을 시작한 루터가 이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겠습니까?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당시에 신부 중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돈으로 대주교직을 샀으나 죽어서야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해프닝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성자들을 숭배하고 유물 숭배를 하는 성상(聖像) 숭배도 유행하였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뽑아 왔다는 볏짚,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잘라 왔다는 나무 조각, 성자의 엄지손가락, 예수님께서 써셨던 가시 면류관 등과 같은 것을 숭배하거나 소지하면 은혜도 받고 병도 고친다는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 루터는 신자는 복음의 제사장이다. 교황권이 일반 사람보다 우월할 수 없다. 일반 신자도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만 성경 해석권이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지적하며 종교개혁의 영적 싸움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520년 6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행되었습니다. 국회를 통해서 화형 시키도록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로마 황제 찰스 5세는 제국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1921년 4월 17일 독일 브롬스(Worms)에서 소집된 국회는 루터에게 출두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때 루터의 친구들이 그를 만류하자 루터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국회로 들어가는데 그때 100여 명의 기병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가 재판정에 서게 되었을 때 한 유명한 말이 지금도 회자 됩니다.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자의 용기입니다. 그때 루터는 국민으로부터 황제 이상의 환영을 받았으며 국민의 ¾이 지지했습니다.

이후 1529년 로마의 황제 카알 5세가 독일 제후국들의 종교 분열을 저지하고자 전 제후국에 로마 가톨릭식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자 루터의 종교개혁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독일 개혁주의 제후국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나아가 싸울 것을 독려합니다.

그때 만든 불후의 찬송가가 시편 46편 내용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내 주는 강한 성이요(585) 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루터의 모습은 마치 요단강 강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는 세례 요한처럼 외로운 투쟁을 하는 처지이었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서 구원받는다는 진리 아래 오직 성경(딤후 03:16), 오직 은혜(엡 02:08), 오직 믿음(갈 02:16), 오직 그리스도(행 04:12), 오직 하나님께 영광(고전 10:31)을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칩니다. 그런데도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개혁은 하지 않고 상대부터 개혁을 추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①성전을 예배드리는 곳으로 청결케 하는 개혁하셨습니다. ②성전을 기도하는 곳으로 개혁하셨습니다. ③성전을 복 받는 곳으로 개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