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맹인 바디매오가 눈을 떴습니다.(막 10:46~5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8. 1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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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20081205일 생명의 말씀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실로암안과 병원의 원장이신 김선태 목사님의 수기입니다. 이 분은 10살 때 서울에서 살다 한국 전쟁을 맞아 부모님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돌아가시고, 자신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폭발물에 의해 두 눈을 실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김선태는 거지가 되어 쓰라린 고난의 삶을 살았는데, 어린 나이에 친척으로부터 받았던 구박을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써내려갑니다. 이 세상에 앞 못 보는 사람은 살 필요가 없다. 소는 눈이 있어서 일을 하고 개는 눈이 있어서 집을 지키는데, 너는 이제 살 필요도 이유도 없는 거야. 내 집에 있지 말고 멀리 떠나서 웅덩이에 빠져죽던지, 매에 맞아 죽던지, 총에 맞아 죽던지 당장 죽어버려라. 집안에 너같이 눈 먼 사람이 있으면 재수도 없고 동네 사람에게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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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22일 모든 사람이 피난길에 오를 무렵 전날 밤 친척은, 선태 저 녀석은 집에 둘 수도 없고 데려갈 수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 평상시보다 밥을 두 배 주면서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을 밥 속에 넣어 먹여 죽여 버립시다. 죽으면 산에다 파묻어 버리고 떠납시다. 그 얘기를 어떻게 들은 선태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오직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김선태는 그의 책 서두에서,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두 눈도 잃었고, 친척도 잃었고, 건강도 잃었고, 희망도 재산도 다 잃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하늘을 찾을 수 있었다. 땅을 잃은 대신 내가 얻은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특권이다.

그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자리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의 힘든 삶속에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고 공부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결혼도 했고, 두 딸도 낳았고, 지금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돌보는 유명한 실로암안과 병원장이자 목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맹인 바디매오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거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소경, 09:29), 네 소원대로 되리라(가나안 여자, 15:28),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백부장, 08:13). 주님의 원하시는 어떤 믿음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허락하시는 복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주인공 맹인 바디매오는 어떤 믿음이 사람인지 함께 생각해 봅니다.

 

 

 1.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46절을 보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가 맹인 한 사람을 등장시키면서 그의 이름을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소개를 합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 아닌 헬라식 이름입니다. 마가의 좀 친절한 주해적 설명 때문에 헬라 문화권에서는 바디매오란 이름만 듣고도 단번에 아, 디매오의 아들이구먼, 하며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처지를 한 번 볼까요?

사람이 태어나면 웬만하면 정중한 이름을 지어주는 법인데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이름도 제대로 지어주지 않고 그저 디매오의 아들 하고 불렀습니다. 거기에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했으니 그 처지가 매우 어렵고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부모의 경제적 능력 역시 별 기대를 할 정도가 못 되는 것 같고요.

 

왜냐하면 웬만큼 살 정도만 되어도 맹인인 아들을 길거리로 내 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맹인의 처지로서 자생 능력 즉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막혀서 외부의 도움을 구하는 거지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행의 삶을 사는 바디매오가 오늘 복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식이냐고요? 예수님에 관한 소식, 바로 복음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아마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오시기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나름대로 듣고 있었습니다. 맹인인 바디매오가 어떻게 들었을까요?

 

당시의 거지들은 성문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고가는 사람들로부터 구걸 행위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입소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시중의 정보는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약 3년간의 예수님의 행적들, 각 종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고, 민생고도 해결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뉴스 정도는 기본으로 들었다고 여겨집니다.

 

바디매오는 남들이 그저 듣고 흘려 넘기는 복음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비록 맹인이지만 그 예수님을 꼭 한 번 만나 보아야지. 그 분을 만나기만 하면 내 모든 문제는 해결 될 거야 하는 기대감으로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예수님이 이 여리고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여리고는 난리가 났고 야단법석입니다.

단번에 예수 바람이 여리고에 불면서 너도 나도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몰려나왔는데 이 소식을 바디매오도 들었습니다예수님을 그렇게도 만나기를 소원한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가 떠나시려는 순간에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바디매오가 아무래도 맹인이고 행동 제약을 받다 보니 듣는 정보는 늦었지만 늦게라도 들었다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바디매오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부터 문제를 풀어갈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명에 관한 소식은 마땅히 들어야 하고 마땅히 전하여야 합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을 머물게 합니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는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셨을까요?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가 이제 나가는 시점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바디매오의 행동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며 외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향해 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 하며 책망을 하는데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아마 이렇게 책망을 하였을 것 같아요? , 맹인인 주제에 왜 그리 시끄럽게 굴어, 좀 조용히 해, 아니면 썩 꺼져버려. 당시의 장애자를 대하는 유대인들은 아주 싸늘하였기 때문에 능히 이런 식으로 욕을 하며 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오늘 이 순간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예수님은 내 눈을 뜨게 해 주실 분, 나의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여겨 계속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를 질러 댑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는 이 고백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야를 대망하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본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 분이 자신의 한 많은 인생살이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주실 해결자로 믿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함으로 사물을 분간할 수는 없으나, 들을 수 있는 귀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입이 있기 때문에 힘껏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소리 속에서도 바디매오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 앞에 멈추어 서십니다. 이에 맞추어 모든 행렬도 중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힘이 무엇입니까? 여리고의 읍장입니까? 아니면 누가 청탁을 한 겁니까?

그 누구란 말입니까?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바디매오는 기회를 만난 이상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황급히 행동을 하는데 가히 칭찬할 만한 믿음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디매오를 데려 오라 하십니다.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바디매오 곁에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 바디매오,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 안심하고 일어나서 빨리 예수님께 가봐. 그러자 바디매오가 너무 급해서 겉옷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바디매오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한 인간의 절절한 외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그 외침이 여러분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키지는 않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의 몸부림, 믿음의 기도, 이 순간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줄 알고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 믿음의 울부짖음을 주님은 보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를 놓칠 때가 많으며, 뒤로 미루기를 잘합니다.

오늘 기도할 것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선한 일을 다음에 하자고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불행임을 아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도로 내 가정에, 사업에, 직장에 주님을 머물게 하십시오. 바로 이 순간을 잘 붙들어야 합니다.

 

55:0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3. 바디매오의 믿음의 몸부림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너무도 좋아서, 너무도 그 부르심에 급히 응하느라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이와 같은 질문을 자주 하셨습니다(05:09, 30, 06:38, 09:21). 이미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 주님께서 굳이 이런 질문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왜 하실까요?

, 이런 질문은 상대에게 믿음을 고백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에 대해 바디매오는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얻어먹으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한 푼 주십시오. 라는 말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체질화 된 사람입니다. 한 푼 주세요. 적선하세요. 이 말 외에는 언어생활이 끝난 사람이며, 이것 밖에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제 주님 앞에서 다른 말을 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하였던 돈이 아니라(03:02), 오직 당면한 문제를 주님께 아룁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짧은 한마디에 그의 인생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닐까요? 그의 눈물, , 서러움, 배고픔, 원망, 절망을 다 해결하는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기만 하면 된다. 눈만 뜨면 나는 무엇을 해도 살아갈 수 있다. 눈만 뜨면 이제부터 주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살겠다. 그런 각오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만약 주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영적인 세계를 보기 위하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답한다면 그게 복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고백한 병자를 고치실 때 하시는 말씀입니다.(07:50, 08:48, 09:22, 17:19, 18:42)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내게로 이끌어오는 것은 오직 믿음이며, 바디매오의 구원의 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아의 칭호를 고백한데 있습니다.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는 주님의 큰 은혜를 받고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새 출발을 합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단순한 말에 있지 않고 간절한 중심과 행동에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주님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고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바디매오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바디매오의 모습 속에서 우리도 주님을 따르며 살아야 할 의무를 보게 됩니다성도 여러분, 좀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갑시다. 옛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주저 없이 달려갑시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의 일터로 달려갑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신약의 역사 속에 보면 이 바디매오가 등장을 합니다. 1세기 사역자 중에 신실한 바디매오라는 믿음의 사람이 있었는데 주석가들은 바로 이 사역자 바디매오가 오늘 예수님을 통해 눈을 떤 바디매오일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실제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일어난 연대가 주후 33년쯤이고, 마가복음이 기록된 연대는 주후 65년경입니다. 그것을 비교해보면 한 32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바디매오는 그때 눈을 뜬 이후 좋은 제자가 되어 믿음의 사역을 잘 하였습니다. 이에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는 바디매오를 생각하여 오늘 말씀에서 이름까지 넣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72: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성도 여러분, 구원은 들음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맹인은 보지 못했으나 듣는데 예민하였고, 내면적인 열망이 있었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만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귀 기울이기를 포기하였다면 예수님이 지나가도 관심이 없을 것이나 예수님께 믿음의 안테나를 맞춤으로 인해 자신의 장애를 벗어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