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믿음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 즉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과, 남달리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아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구원받은 성도의 공동체 안에 있는 것도 다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02:08).
이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이 무엇일까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310장 1절)
1.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
0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모세는 노아의 대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08절에서 본격적으로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08절을 잘 보십시오. 노아에 대해 처음 운을 뗀 말이 너무도 복이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조건 없이 그리고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 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고 그냥 주시는 것이며, 값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05절의 상황으로 노아 시대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에 노아가 믿음생활을 온전히 유지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해야 할 만큼 악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0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아담 이후로 노아 홍수가 나기까지 1656(?)년 동안 늘어난 인구의 숫자를 구약학자들이 계산해보니 약 10억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 기간을 옛 세상이라고 하는데 이 옛 세상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의 프로그램 앞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는 분명 세상 사람의 길과는 구별 된 경건의 삶, 믿음의 길을 외로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이 바로 노아인데 이 노아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어떤 특별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노아에게는 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노아가 한 치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결코 아니며, 창세기는 오히려 노아의 허물을 기록합니다(창 09:20,21).
창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이런 노아의 일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다 꼭 같아요. 거기가 거기에요. 다만 노아와 그 시대 사람들의 차이점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입니다. 분명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음으로서 그 시대의 사람들과 구별 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요?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으며, 우리는 믿음이라는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야지 그렇지 않는다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 들어 깊이 깨닫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인 제가 사람을 바꿀 수 없고, 성도들을 변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안 됩니다.
목사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도들을 변화시켜 믿음생활을 잘 하게 하려는 것, 그런데 이게 잘 안 돼요. 자주 만나기도 하고, 기도도 해 주고, 먹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자존심을 상하면서까지 해 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 했으면 변화 될 만한데 안 돼요. 변화되었는가 싶으면 그대로이고 변화되는 척은 하는데 변화가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단 하나 은혜를 받지 못해서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경건한 삶을 삽니다. |
0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인이요. 전혀 무죄하거나 흠 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그 시대적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의 믿음의 몸부림을 높이 평가하여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흠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 0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이 역시 의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가 한 점 티도 없이 완전하다거나 전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보기에 부끄럽지 않는 자가 되도록 성실히 노력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잠 28:18).
여기서 의인과 완전이라는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라 노아의 신앙적인 인품과 사람됨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말입니다. 완전한 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영적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동사 하나가 나옵니다. 무엇일까요? 보았다. 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05). 하나님은 보시는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사람의 부패한 모습도 하나하나 보시지만 경건한 믿음의 사람 노아의 행적도 일일이 보십니다. 09절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난 후의 모습으로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믿음의 본을 제시합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서부터 경건생활이 열리고, 은혜를 받은 후부터 믿음의 모델이 되는 것 아닐까요? 노아가 이렇게 의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만 하면 의인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롬 0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 그저 하루아침에 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경건이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과의 믿음의 비밀, 믿음의 내공, 믿음의 가문이 뒷받침 될 때 가능합니다.
노아의 가문을 위로부터 삼 대까지 한 번 볼까요? 증조부 에녹으로부터 조부 므두셀라, 부친 라멕, 그리고 노아 자신까지(창 05:21~29) 든든한 믿음의 산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흔들림 없듯이,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오면서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린 성도는 아무리 세상의 어려운 환경과 고난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갑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죽어도 못하겠다던 기도생활이 되고, 은혜를 받고 나면 지루하던 예배가 즐거운 예배가 되고, 은혜를 받고 나면 앞장서서 봉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고, 은혜를 받고 나면 교회가 그립고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서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은혜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
0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개역성경에서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 역사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이전의 역사는 일단락되고 이후부터 새로운 인물을 정점으로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 것을 안내 해 줍니다. 노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죠.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 또는 완전한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근거입니다. 그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한 가운데서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곧고 경건한 삶, 바른 삶을 살려고 부단히도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런 노아의 모습,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그의 삶을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셔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행동하는 믿음 때문에 분에 넘치는 호칭까지 얻었는데(창 05:22),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호칭입니다. 이런 호칭은 우리도 믿음생활에서 받아야 할 호칭입니다.
창 0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05장에서 모세가 노아를 놓고 기록하기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는데 그 이전에 노아의 증조부 에녹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믿음의 가문 4대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둘이나 되는 셈이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 하나님과 의논하였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였고,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는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세상인데 왜 어두운 세상이 되었을까요? 문화가 그렇게 발달되지 않은 세상에서 인간의 수명이 9백 년을 넘다 보니 하나같이 죽음이란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무법천지라 웬만한 악한 일을 해도 징계의 심판이 없자 너도 나도 불법 속으로 띄어들게 되었습니다. 불법이 더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이죠. 이런 세상이다 보니 우선으로 마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무너졌고, 또 결혼관도 인간 중심의 불신 결혼으로 완전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0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0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결혼을 함에 있어서 믿음을 보지 않았고, 또 믿음은 별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니 경건해야 할 가정은 이내 타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암울한 상황에서 노아만은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노아의 생활을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로 표현을 합니다.
히 11:0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런 호칭을 아무나 받을 수 있습니까? 일시적으로는 가능 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역사가 그렇게 인정 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은 일이 있는데 어떤 호칭인지 아시죠? 하나님의 친구라는 호칭입니다.
대하 20:07 주의 벗 아브라함(개역), 사 41:08 나의 벗 아브라함, 약 02:23 그는 하나님의 벗, 이런 호칭을 받는 것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처럼 하나님과 동행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 참여한 여러분이 하나님의 찾으시는 믿음의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고, 하나는 세상의 풍속을 따라 가는 무법의 길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의 삶, 성령님의 감동적인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방주를 짓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방주를 지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적인 상황이 어떻습니까? 최근에 등장한 용어들 가운데 우리가 흔히 보고, 또 겪고 있는 갑을 관계가 있습니다. 약자로 불리는 을을 힘이 있는 갑으로 불리는 사람이 마구 횡포를 부린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아직도 민도가 많이 낮은 편이죠? 거기다 국회의원이라는 놈(者)들이 역시 소신하고는 상관없이 불의에 서서 자신은 정의라고 부르짖으며 서민들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정말 답답한 세상, 한숨이 나는 세상인데 예수님께서 오늘의 세상을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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