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하나님께서 너는 안 된다고 하실 때.(대상 17:16~2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4. 2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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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왕으로 취임 한 후 자신의 위치가 견고해지고 나라가 안정되자 이리 저리 떠돌았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서 지내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계속 천막 가운데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왕궁을 출입하는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의 생각을 알립니다.

나단 선지자는 왕의 생각을 듣고는 정말 좋습니다. 하고 동의를 하였는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다윗은 성전 건축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즉시 왕에게, 나도 왕의 생각처럼 성전건축이 좋은 일이라고 여겨 동의를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라고 통보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성이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성전을 지어보겠다는 마음을 품었는데 그 구상이 지금 막혀 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인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바로 다윗과 같은 열정을 품고 열심히 충성을 하려 할 때 너는 안 된다는 부정적 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성전건축을 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나으며, 봉사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나으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 열심히 땀을 흘리는 것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오늘은 우리의 일상생활 여러 모습들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통로를 통하여 너는 안 된다고 하실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를 영적 교훈으로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왜 다윗 왕의 성전건축을 막으셨습니까?

 

대상 22:0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아니한 이유에 대해서 다윗이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좀 더 신중하게 접근을 하여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만날 때마다 그 전쟁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심으로 승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광야시절 모세나 가나안 정착시절 여호수아의 전쟁역사, 이스라엘 왕조 초기 사울 왕, 그리고 다윗 등 모두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승리를 하였지 않았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다윗이 군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창칼로 죽이고 피를 흘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이 전쟁을 하면서 과도하게 살육한 일이나(삼하 08:02), 암몬 족속을 과하게 징벌 한 것도(삼하 12:31) 다 하나님이 허락 하신 일이란 말입니다.

 

삼하 08:02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 .

 

결국은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한 일인데 그런 일들을 성전건축의 부적격 사유라고 판정 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멸망시키라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그런 일이 잘 못 되었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상황을 놓고 좀 더 영적인 깊이에서 다윗의 성전건축을 막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을 한 일이나, 승리자의 입장에서 좀 잔인하게 피를 흘린 일을 놓고 전쟁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성전건축의 부적격자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상 22:08절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합니까? 본 구절이 의미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군인으로서 이방인들을 정복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성전 건축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실패한 사울 왕조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정(神政) 국가 수준으로 든든하게 세우는 일 까지가 사명인 셈이죠.

사실 성전건축은 성격상 평화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며, 만일 피를 많이 흘린 군인에 의해 건축된다면 성전의 참된 의미는 반감되고 말 것입니다. 성전은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베풀어 주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내포하고 있는 속성과 그 성격상 다윗이 성전건축의 적임자가 아닌데 비해 전쟁을 알지 못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대상 28:3,6).

 

그래서 성전건축을 놓고 다윗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를 하였지만 진작 건축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돈만 있으면 성전을 지을 수 있을까요? 내가 교회를 지어야겠다. 는 의지와 믿음이 있으면 될까요? 교회 짓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이 모든 것에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어야 합니다. 돈도 있고, 의지도 믿음도 있고, 열정적인 기도가 뒷받침 돼도 한 가지 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OK사인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지난 시간 돌아보면 제가 성전 건축에 관심을 갖다보니 여기저기서 건축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그 중에 정말 솔깃해지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건축을 하려면 헌금을 잘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건축을 앞두고 특별부흥회를 하라는 겁니다. 강사를 소개하는데 이런 강사만 모시면 건축헌금이 정말 많이 걷히니 꼭 그 건축헌금 전문 부흥사를 모시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만 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나간 목회시절을 돌아보니 건축을 세 번 했더라고요. 하나님께서 하락하셔서 되어진 일이기에 목회의 자부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2. 다윗은 그럴수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16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너는 성전건축을 할 수 있는 적격자가 아니다. 너는 안 된다. 하며 하나님께서 거절 할 때 다윗은 성전건축에 관한 열망을 즉시 접고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그 옛날 이새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위치로 돌아가 자기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자신은 왕손의 혈통으로 난 사람도 아니고, 왕실 교육을 받은 것은 더욱 아님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집에서도 말째로 태어나 그다지 가족들 중에서 주목 받는 생활을 하지 못하였고,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가정에 왔을 때도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삼상 16:11).

 

그런 처지에 있던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조금도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며 묻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항상 왕 됨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종임을 자처하고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거절함을 받을 때에 많은 분열과 싸움과 분노를 앞세우고 또 스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보지 못하고 조상 탓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불신자들은 세상을 원망하고, 또 부모도 원망합니다. 난 왜 이럴까? 난 왜 재수 없게 없는 부모 아래서 태어나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며 스스로 자기 학대에 빠지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돌아보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자손손에게 은혜의 복 주심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17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여기서 이것은 다윗의 가정이 현재 누리고 있는 놀라운 복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현재의 복도 감당 못하겠는데, 거기에다 다윗의 왕통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미래의 복까지 보장해 주시겠다는 일에 대해 감격하는 장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가장 힘들고 고달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이나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무시를 당할 때에 참을 수 없는 수치와 괴로움을 갖습니다. 아무리 의욕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려 해도 네가 뭘 할 줄 아냐? 너는 안 돼. 포기해라. 이런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계속 들으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식어질 뿐만 아니라 절망적인 마음도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일이 힘들고 좀 고될 때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헐뜯는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들을 때는 잠도 잘 못 자고 괴로워합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절을 당하여 좌절을 맛보아야 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16절 말씀처럼 하나님,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의 출발점에 다시 세우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은 그럴수록 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니다.

 

25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왕조를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성전건축의 적격자가 아니다. 너는 안 된다는 통보를 받은 후 먼저 언약궤를 안치 해 둔 장막 즉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이때 다윗이 너는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항의하기 위해 나아갔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현재의 성전 건축의 계획이 비록 거절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더 큰 섭리가 있는 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너는 안 된다는 거절함 앞에서 무척이나 분노하고 괴로워합니다. 왜 분노와 괴로움이 옵니까? 거절과 부정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지 않았습니까?(13:22) 그렇다면 너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윗의 생애 전체에 대한 부정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다윗의 열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것은 좀 더 멀리 영적인 시각으로 내다본다면 그 집안 대대로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좋을 때는 좋다가도 상대방이 나의 부탁을 거절할 때나, 나의 말에 동의를 해 주지 않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겪는 이런 불편하고 상한 마음을 만날수록 더더욱 하나님께 기도를 가지고 나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쉽지 않겠지요. 저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보다 사람 앞에 가서 위로를 받으려 하는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런 방식은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우리의 믿음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싶은데 거절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직접적으로 거절도 하시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하여서 간접적으로 거절을 하시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 직분자에 대한 선출입니다.

 

공동의회는 사람들이 직접 선택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사람을 통하여서 직분자로 부름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교회들마다 직분을 선출하는 것 때문에 시험과 어려움에 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더욱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에는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직분을 받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직분을 받아서 시험에 들기도 하고, 받을 분이 선출되지 못하여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실망에 빠뜨리는데 어떤 분은 공동의회 투표 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10, 20년 교회에서 봉사했는데도 교인들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어떻게 부끄러워서 이 교회에 다닐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떠나가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더 놀라운 계획과 방법을 세우시고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일시적으로 거절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꼭 선출되면 더더욱 헌신하여 희생하기를 작정하고, 선출되지 못해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리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육체에 심겨진 사탄의 가시가 없어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안 된다. 이만해도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내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절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서도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심을 깨닫고는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고후 12:0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것 같습니까? 나의 희생과 봉사가 아름답게 사용되어질 것 같이 생각됩니까? 혹 누구로부터 너는 안 된다는 음성을 듣게 될 때 거기에는 더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담겨 있는 줄로 믿고 스스로 시험에 들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에 가장 충성스러운 일꾼은 자기를 죽이면서 협력과 찬양으로 이루어 가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함께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신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 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삼하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