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2년 말씀

우리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전 04:09~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2. 12. 2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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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북부에 있는 인디애나(Indiana)의 한 초등학교에 뇌종양에 걸린 짐(Jim)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짐은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다 빠졌는데 다행히 치료 경과가 좋아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짐이 속한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말합니다. 얘들아, 내일 짐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단다. 많이 위로해 주어라. 수업이 끝났지만 그날만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지 않고 조용히 있습니다. 곧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져서 어떻게 짐을 위로할 것인가로 고민을 합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말합니다. 짐이 머리가 다 빠졌다고 하는데 우리도 짐처럼 머리를 깎고 오자. 그래서 다음날 아침 짐이 등교해보니 모든 남자애들이 빡빡머리였습니다. 다 서로를 보고 웃었고 곧 이어 교실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짐도 울었고, 선생님도 울었고, 반의 모든 아이들도 서로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나눔입니다
. 마음을 나누지 않으면 마음에 공허함이 차오르고, 마음을 나누면 마음에 풍성함이 차오릅니다. 좋은 것을 나누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이 내 곁을 떠나가고, 좋은 것을 나누면 더 좋은 것이 내 안에 채워집니다.
인생에서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이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채워주는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겁니다. 저는 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를 살피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입니다.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요즘 세상이 점점 살기 좋아지고는 있지만 개인주의는 더욱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원룸 아파트에다 독신자가 많아지고 혼자 지내기를 원합니다. 혼자 이름을 내는 것은 좋아하지만 후미진 곳에서 무명으로 섬기고 봉사 할 줄은 잘 모릅니다.

혼자서 자신만만하게 사는 그 스타일이 영원히 안전하게 잘 유지가 될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여지없는 패배와 같은 시련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인생살이를 마감하고 싶은 때를 만날 때도 어쩌면 있었을 것입니다.

 


한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누구나가 예외 없이 넘어지는 순간
, 실패하는 순간을 많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까지 걸어온 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축하 할 일입니다만 그러나 그렇지를 못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넘어지느냐,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넘어질 때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 회복의 자리로 어떻게 돌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당위성을 제시합니다. 즉 넘어졌을 때 곁에서 손을 힘 있게 잡아 일으켜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넘어져도 일으켜줄 자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혼자만의 삶 그 자체는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무엇일까요? 공동체 회원끼리의 친교입니다. 친교란 그 사람의 삶에 사랑으로 동참하는 것으로서 내가 이웃과 교제를 나눈다면 그것은 그 이웃의 삶 속에 들어 있는 고난과 아픔도 함께 나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인생길을 걷다가 넘어져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믿음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면 교회에까지 와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 아닐까요?

지금의 우리 현실을 보십시오. 기업들은 상황에 따라 호황과 불황을 누리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 서민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든 삶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야말로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바로 이런 사람들, 눈물이 떠날 날이 없는 분들을 붙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물론 믿음생활을 대단히 잘 하시는 분들의 눈에는 이웃의 허물이 잘 보입니다만 그럴수록 그 죄인들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랑의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의무 아닐까요? 신령한 공동체는 모여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임입니다. 다시 일어섬을 경험하는 사람들, 새 힘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이 우리가 세워가야 할 공동체이며 우리 모두가 이런 교회를 이루는 일에 잘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2. 서로를 격려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우리는 왜 인생길에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까? 우리의 살아가는 길이 너무나 춥고 험해서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1절 말씀을 에로틱한 부부의 누워 자는 장면으로 연상하지 마십시오.
그런 의미로 기록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기록 된 때나 그 장소는 팔레스타인의 사막지대입니다. 사막은 낮에는 태양이 강렬히 내려 쪼여서 더위를 견디기가 무척 힘들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급강하하여 이내 뼛속까지 스며드는 매서운 추위가 찾아옵니다.

사막을 다니는 유목민이나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들은 이런 사막지대를 무사히 건너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막지대를 걸어가는 나그네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친구를 만들어 밤이 되면 서로의 몸을 비비면서 등을 마주하며 추운 밤을 지냅니다. 물론 가족이거나 동성끼리이죠.

 

오늘 본문도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이라고 시작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서 꼭 두 사람으로 제한을 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두 사람 이상의 많은 수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 말입니다.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주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보다 나은 삶의 길입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으면서 자주 반복되고 강조되는 단어를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보다 나음, 나으니라. 입니다. 전도서가 기록된 중요한 목적은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가? 보다 나은 인생의 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격려를 통하여 이루어가는 보다 나은 삶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끼리 하나의 마음, 하나의 비전, 하나의 미래지향적인 축복을 목표로 삼는데 있습니다. 격려라는 말의 의미에는 아주 좋은 뜻이 또 하나 들어 있는데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격려가 필요하고 그 격려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고받는 것 아닙니까?

 

성령님의 역사는 끊임없는 격려를 통하여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용기를 심어줍니다만 반면 사탄은 함부로 정죄를 하고 함부로 짓밟습니다. 그나마 있던 용기마저도 빼앗아서 아주 못 일어나게 녹다운을 시키는 일을 한단 말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인 공동체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축복의 터전입니다.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십시오. 이런 격려야말로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넘어졌던 인생길에서 다시 일어섰습니까? 일어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따라 마땅히 가야할 그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어디에서 공급받아야 합니까?

모든 것을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새 힘을 불어넣어주는 친구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주중에 드리는 여러 예배, 여러 소그룹의 모임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런 모임에서 영적인 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04:0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0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3. 함께 승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앞선
11절과 같이 문맥상의 흐름은 계속해서 여행자가 강도에게 당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막 길을 걸어가다 강도가 덮칠 경우 꼼짝없이 강탈을 당하고 말겠지만 두 사람이 여행할 경우에는 능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 겹이란 앞 절의 두 사람에서 하나를 더한 수로서 그러면 셋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셋을 넘어 더 많은 수까지도 포함하는 수사적 표현입니다.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인 셈이죠. 이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설명하면 상승효과(Synergy) 라고 부릅니다.


소 한 마리가 일반적으로
6톤의 짐을 끈다고 하는데 소 두 마리면 각각 6톤씩 12톤의 짐을 끌게 되고 소 두 마리가 합쳐지면 24톤의 짐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각각 끄는 것보다 연합했을 때 갑절의 효과를 얻게 된다는 의미이죠.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한다는 말은 함께 승리하자는 문구로서 우리 모두가 이 말씀에 아멘으로 동참하여 교회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전거에 바퀴가 왜 두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퀴가 한 개 일 때 보다 두 개 일 때가 훨씬 안정감이 있어서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실 때는 일대 일로 부르셨지만, 공동체의 일을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구성원들끼리 연합하여 일하게 하셨습니다.

광야 생활의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을 40년간 인도할 때도 혼자서 다 한 일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제도를 통하여 일하였고 또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는 아론과 훌이 곁에서 왼 팔, 오른 팔 역할을 함으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20년 전만 해도 우리가 경쟁자를 대하는 시각은 거의가 2분법적 논리, 흑백논리였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군과 적군의 논리,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적이고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당신을 짓밟아야 한다는 그런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마인드를 가진 리더십 이론가들이 출현하면서 이제는 함께 살고 함께 승리자가 되자는 win-win전략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해 큰돈을 벌었다고 질투하지 않으며, 회사원이 같은 동네의 마트가 잘된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질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투의 불길이 아주 가까운 인관관계 즉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일어나면 반드시 화상을 입는 사람도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질투의 대부분은 열등감에서 출발하는데 그래서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분발의 동기로 바꾸는 사람은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불어 함께 승리할 수 있고, 그 길이 좋은 길이라면 더불어 가야지 승리자와 패배자로 갈려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웃을 경쟁자, 시기 질투자로 보지 말고 협력자로 보십시오. 그 순간부터 공동체는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며 함께 손을 잡는 그곳에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미국 부모는 정직하라고 말해주고
, 일본 부모는 배려하라고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부모는 어떻게 말할까요? 지지 말고 무조건 이기라고 다그칩니다.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전혀 없는 자기만의 고집을 배워주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가족(Family)이란 단어의 어원을 아십니까?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각 단어의 첫 글자를 합성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뜻인데 우리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녀의 심정으로 공동체의 회원을 대하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도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후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면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02:18). 우리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시고 공동체의 회원을 배려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나로 인해 위로받는 자가 나오고, 눈물을 닦는 사람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