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2년 말씀

<성탄절>복을 잃은 사람과 복을 받은 사람.(눅 02:01~2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2. 12. 2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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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Gaius Octavius)는 식민지 국가들의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호적 명령을 내려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02:01, 03~05). 로마의 호적 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번거롭고 상당한 경제와 시간이 소요되는 본적지 호적 등록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호적 명령이 비록 편할지라도 거부하고 자신들의 최소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전통적 관례를 따라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도 남편 요셉을 따라 다윗의 후손 인고로 나사렛에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 갔는데 이때 마리아는 만삭이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날처럼 전산 처리가 가능한 호적이 아니라 수() 작업에다 사람들이 동시에 몰리기 때문에 타지에서 오는 사람은 숙소를 미리 예약 않으면 곤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삭의 몸을 이끌고 약 120Km 되는 먼 거리를 겨우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숙소를 구할 수가 없는 처지였고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시야로서 오신 분이 이렇게 초라하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보다는 숙박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얼마나 복이 되었겠습니까
? 반면 목자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양자의 모습을 통하여서 복을 잃은 사람과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는 복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1. 여관집 주인은 복 받을 기회를 잃고 맙니다.


0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 이러라.

 

숙박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만원이 되기도 하고 나중에 온 사람에게는 방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관집 주인은 자기 집을 찾아 온 요셉과 마리아가 어떤 신분인지는 몰라도, 또 방이 이미 예약이 끝났다 해도 최소한 사랑과 배려의 눈으로 출산이 임박한 여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방을 배정해 주어야 합니다. 먼저 예약한 손님이 양보를 안 한다고요?
, 남의 사정을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할 리가 없겠지요? 그러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의 방을 한 칸 내 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최소한 인심마저도 베풀지 않고 있습니다
.
좀 더 넓게 이해해 봅시다. 여관집 주인이 자기 방은 못 준다 할지라도 여분이 있는 이부자리 정도는 밖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내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관이니 그 정도 여유야 있을 것이지만 여관집 주인은 한 출산이 임박한 여성에 대해 그것마저도 넉넉하게 베풀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다만 사랑의 눈이 감겨진 상태에서 베푼 게 있다면 말구유에서 태어날 수 있는 정도의 배려인데 이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웃을 향한 사랑의 눈이 감겨 있는 증거입니다. 지내놓고 보니 이 여관업을 하는 이 사람 지극히 인간적인 물질주의자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이웃 사랑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식으로 살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만 자기 집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수 있는 크게 복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때 좀 더 과감히 사랑의 눈을 뜨고 만삭이 된 마리아를 바라보았더라면 그래서 자기 방이라도 내어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영원 무궁히 뭇사람의 칭찬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의 흔적은 간 곳 없고 구유가 있던 자리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예수님 탄생교회가 있어서 성지 순례의 코스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이미 한 2천년이나 지난 오늘 이 사건을 우리가 돌아보면서 모든 일, 특히 복을 받을 수 있는 일에는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관집 주인은 메시야 되신 주님께 자기 방을 내어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난 후 더 이상 주님을 향한 사랑을 베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저 조건 없이 손님을 열심히 대접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일이 하나님(천사)을 대접한 결과가 되어 오늘날에까지 회자 되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13:0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성탄절을 맞아 우리 성도는 항상 사랑을 베풀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깁니까? 서로 간에 사랑을 격려하고 나눕니까? 믿음에 대한 무관심, 하늘나라에 대한 무관심, 영적인 일에 대한 무관심 그러면서도 세상일에 대한 심취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2. 목자들이 맞이하는 성탄절입니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직접으로 받은 사람은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 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을 향하는 개방된 메시지입니다. 이런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14)과 이방(32)에로 확대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줍니다. 그러면 천사가 누구에게 나타났다고요?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입니다. 당시 목자들의 생활 형편이 어떤 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추측하건대 하루하루의 생활을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로서 24시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밤에는 더욱이 피곤하고 졸리고 더욱 힘든 가운데서 지내지만 그러나 천사의 음성을 통해 구주 탄생의 큰 소식, 예수님을 경배할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목자들, 소외된 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천사를 통하여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들었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목자들의 행동을 봅시다.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세상에는 빨리 할 것과 천천히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천히 할 일은 빨리 하고 빨리 할 일은 천천히 하려고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목자들처럼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시나 생각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결재를 받고 천천히 해도 잘못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즉각적으로 순종할 때 복이 됩니다.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정작 보아야 할 예수님은 못보고 사람만 보고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도 만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보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만나기까지는 집에 갈 생각을 마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찬양하고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그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하고 가십시오. 그런데 혹 나는 이런 신령한 일에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자녀에 대한 무관심이 자녀를 문제아로 만들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를 불의하게 만들고, 교회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를 시들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무관심은 바로 사랑이 없는 증거요 믿음이 죽은 증거입니다. 무관심이 그 사람을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실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큰 기쁨의 소식을 나도 전해야 합니다.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 들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로부터 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10) 듣고 아기 예수님께 가서 확인 한 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하였는지는 좀 분명치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갓 태어난 예수님 외에 한 아이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든 그들에게 천사의 메시지를 전했거나 아니면 이웃 사람들 즉 베들레헴 주민들에게 직접 가서 예수님의 사건을 전했을 것입니다.

목자들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다 놀랍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초자연적으로 된 일이기에 목자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감동 있게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그들의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구주 탄생의 놀라운 소식을 증거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으니 이것이 진정한 전도자의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를 드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보는 것으로도 끝나지 말고 직접 나가서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사십시오. 이 일이 오늘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신앙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너무 바쁜 것은 아닙니까? 물론 사람은 보람된 삶을 위해서, 행복한 믿음을 잘 가꾸기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세상에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대단히 바쁘게 움직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찾았던 여관집 주인처럼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여 바쁘게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사람은 누구나 내가 어디서 왔는가? 지금 내가 서 있는 현 주소는 어디인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파선을 만날 수도 있고, 주님과의 거리가 더 크게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업에 얽매어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보다 중요한 일을 잊은 것은 아닙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신령한 복음 증거의 삶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하여야 합니다.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
이에 대한 대답은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실 문밖에는 면회사절이란 글과 함께 다만 불신 친구나 친지는 가함. 글이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마침 불신 친구가 있어 면회가 허락되어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친구는 측은한 생각으로 목사님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어떤가? 죽을병에 걸렸지. 누구나 한 번은 죽을병에 걸리는 법인데 내가 조금 먼저 걸린 셈이지. 어째서 신자에게 사절된 면회가 불신자인 나에게는 허락되었는가?

목사님은 친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립니다. 신자는 다 천국에서 만나게 되지만 자네 같은 불신자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일세.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보는가?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있다고 믿네. 자네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믿지 않겠나?

지옥에 안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겠네. 그럼 되었어. 빨리 나가게. 왜 그리 서두르는가? 자넨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그때 만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다시 못 만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봐야지. 복음 증거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시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 첫 번 성탄절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작고 초라한 마구간을 만들고 그 안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꾸며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름다운 명소가 되었고 또 보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주기 위해서 여러 행사들도 계획했는데 그만 한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이 정도 되면 그야말로 난리 난 것 아닙니까? 연일 지역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아기 예수를 돌려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드디어 장난꾼의 마음도 움직여서 다행스럽게도 성탄절 전에 아기 예수가 돌아 왔다고 합니다
.


성도 여러분
,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아무리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고 동방박사들의 멋진 예물이 있다 할지라도 성탄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쓸쓸함과 외로움이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의 주인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뜻 깊은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십시오. 내 마음이 천국이 될 것이요, 이로 인해 우리 교회에 천국의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