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2년 말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입니까?(고전 09:24~2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2. 10. 2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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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는 B. C. 776년 신들을 섬기고 축하하는 종교적인 제전으로서 출발하여 4년 혹은 2년 단위로 발전을 해 왔습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4대 제전(祭典) 경기로서 아테네의 올림픽(Olympiad)대회, 지역별로 피티안(Pythian)대회, 네미안(Nemean)대회, 이스트미안(Isthmian)대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과 관련 된 대회는 이스트미안 대회로서 고린도의 이스트머스 동쪽 이스트미아에서 2년마다 기수(騎手)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 신을 축하하며 열렸습니다.

경기 종목으로는 레슬링, 마차경기, 달리기, 경마, 권투, 짐승과의 결투로서 대회 참가 선수들은 경기를 위하여 10개월 이상 엄격한 훈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경기는 종교적인 제전의 성격을 따라 정의의 법칙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승리자에게는 월계수 관을 머리에 씌우고 100드라크마를 상금으로 시상했는데 그 외에도 말로 다할 수 없는 명예와 함께 자신의 조각상을 영원히 경기장에 남기는 가문의 영광도 누렸습니다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트미아 대회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사도 바울도 오랫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런 경기를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몇 차례 경기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육상의 달리기와 권투 경기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이스트미아 대회의 달리기 종목에서 우승을 향해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의 경주도 이렇게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을 합니다
. 오늘 우리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사람은 일생을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0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이끌어주시면서 토지를 경작하며 특별히 잘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02:15). 에덴동산을 해칠 만한 어떤 악한 존재가 이미 아담의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또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악한 존재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사탄(Stan) 아닙니까? 결국 우리 사람은 한 평생을 다양한 형태의 싸움을 하면서 살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2,26~1885,5,22)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그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했는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재난, 홍수, 지진, 혹한, 혹서, 기후로 인해 오는 각종 질병 등 이런 것들과 우리는 싸우며 살아갑니다. 이 싸움에 이기면 건강하고, 지면 죽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람은 자연과의 계속적인 싸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간의 싸움입니다
. 이웃을 협조자로, 반가운 사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이웃과 싸워야 하는 관계로 살아갑니다.
상점에 가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어떻게 하면 속지 않고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을까? 또 파는 사람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로 팽팽한 긴장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먹느냐, 먹히느냐, 지배 하느냐, 지배를 당하느냐,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로 싸우며 살아갑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혹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여서 이웃들과 한 번도 다툼이나 싸움을 해보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과 싸움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있을까요? 세상에 사는 동안은 우리 모두가 날마다 내면적인 갈등의 전쟁을 합니다. 한 편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나오면, 또 한 편에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나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내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셔도 심성이 당장에 천사처럼 변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이 경건한 마음을 방해하는 악한 심성의 방해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더욱 영적인 곤고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바울도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자신의 아주 적나라한 모습을 공개 하는데 한 번 보겠습니다.

 

 

0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때로는 우리의 관심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의 세상적인 문제로 골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이런 것들을 초월하여 선한 싸움의 길로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이 적당하게 사는 것도 원치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0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2. 나는 영적 싸움을 위한 전략을 잘 세웁니까?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은 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달리기 선수는 빠르게 달린다고만 다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결승점을 바라보고 정해진 룰을 따라 힘껏 달려야 합니다. 격투기 선수도 펀치만 세다고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상대 선수의 허점을 향해 주먹을 날려야만 합니다.
승리를 위한 적절한 훈련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고린도의 시민들은 이스트미안이라는 게임에 선수로 출전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럼 최대의 불명예는 뭐겠습니까? 이스트미안 경기에서 선수로 뛰던 자가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실격을 당해서 선수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대회를 앞두고 고된 훈련을 하다가 경기가 임박해서는 세심한 부분까지 극도의 절제를 합니다.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아서 제대로 되지 않으면 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 알맞습니다.

절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신적 절제로서, 분노, 시기, 탐욕, 음욕, 이기심, 명예심 등이 이에 속하고, 또 하나는 물질적 절제로서 음식, , 담배, 마약 등입니다. 사람의 식탐은 돼지보다 심하다고 해요. 개나 돼지는 정량의 70%만 먹는데 아무리 맛있는 것을 주어도 자기 양의 70%를 먹으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장병에 걸리지 않는데 비해 사람은 130%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절제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14세기 경 현재의 벨기에 지역에 레이몬드 3세라는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동생의 반란으로 폐위되었는데 동생은 차마 형을 죽일 수 없어 감옥에 가두고는 특수한 문을 제작하여 달았습니다. 아주 작은 문입니다.

레이몬드 3세는 원래 식욕이 왕성하고 뚱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몸으로 나올 수 없도록 문을 작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생은 그 작은 문으로 나오면 자유를 주겠다고 말하고는 감방에 날마다 맛있는 음식들을 들여보냈습니다. 좁은 문을 빠져 나오려면 음식들을 먹지 말아야 할 텐데 식욕의 노예였던 레이몬드는 그만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열심히 먹다가 뚱뚱해져서 영영 나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 속에서 살아갑니다. 습관의 감옥, 죄악의 감옥, 실패의 감옥, 가난의 감옥, 저주의 감옥 말입니다. 그 감옥에서 나오는 비결은 절제 하나만 제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그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여전히 거기에 갇혀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충돌을 합니다. 왜 충돌을 합니까? 절제라는 컨트롤타워가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제의 컨트롤타워가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계속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반대쪽으로 이끌어 갈 것이고 신령한 싸움의 주도권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합니다.

 

0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3. 영적 싸움을 위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킵니까?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라.

26절을 보면 바울은 영적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목표와 확실한 믿음의 방향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의미 없는 싸움은 안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싸움도 승리가 목표이듯이, 영적인 싸움도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선한 목적을 위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2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싸움을 위한 승리의 비결을 공개합니다.

 

내 몸을 쳐. 바울은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것을 연상하면서 내 몸을 쳐. 라고 표현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는 뜻인데 자신의 영적 싸움의 우선 대상이 자기 몸임을 사실적으로 말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몸은 편안하고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 몸의 욕구대로 살면 영적 싸움에서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종하게 함은. 둘로스(노예)와 아고르(인도하다)라가 합성 된 둘라고고는 의역을 하면 노예를 길들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경기에 출전하려는 자는 승리를 얻기 위해 먼저 훈련 과정에서 자기 몸을 강하게 단련하여야 하는데 때로는 그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고 자기와 싸우면서 몸을 만들고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때로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가혹하게 노예를 길들이듯 내 몸을 피눈물로 훈련하는 것은 이미 자신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먼저 자신의 영적 승리의 삶을 위해서, 더 나아가 이웃의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영적 싸움은 결국 자신과 일대 일의 게임, 자기와의 처절한 한판 싸움 아닙니까?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수준에 대해서 얼마나 체크해 보았으며, 자신에 대한 컨트롤 능력이 얼마나 된다고 봅니까?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뜻하지 않게 실패를 하였다면 거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지나쳤다는 말이죠.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생을 걸만한 확실한 목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세운 목적에 대한 합리적 값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원했으면 그만큼 수고해야 하고 학자가 되려고 했으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믿을 것이 못 되고, 내 지식, 내 감정, 내 판단, 이런 것들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0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 욕망, 내 의지, 내 판단을 따라 행하는 것은 영적 패배자의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발상의 전환이 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경건의 훈련을 시켜 승리자로 시상대에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 뜻에 합당한 자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헬라에서는 올림픽 경기나 이스트미안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는 최대의 명예는 월계수
(月桂樹) 면류관이라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월계수 나뭇잎으로 만든 것인데 최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상임에도 문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정중하게 걸어 놓아 봤자 며칠 지나면 시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시들어 버리는 월계수 면류관 하나 쓰자고 그렇게도 시간을 투자하고, 땀을 흘리고, 자신을 조절하고 욕망을 절제하면서 애를 씁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벧전 05:04), 영원한 가치가 있는 면류관을 위해서 자신을 얼마나 담금질하면서 믿음의 훈련을 합니까? 자기 욕심을 컨트롤하지 못해서 세상에 끌려 다니다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모습은 아닙니까?

지금 나는 누구입니까? 내 마음, 내 몸, 내 뜻, 내 습관, 내 성향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이대로 괜찮습니까?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우리 모두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입니까?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하렵니까?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킴으로 승리를 합시다.

 

딤후 04:0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0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