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2년 말씀

주님은 어떤 사람을 환영합니까?(행 07:54~6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2. 11. 3.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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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한 평생을 보낸 노부부가 고향인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뉴욕 항에 많은 환영인파들이 몰려왔습니다. 노부부는 자신들을 환영하는 인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자신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아니라 비행사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성공을 축하하는 인파였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오라는 사람이 없어서 뉴욕 시내에 있는 삼류 호텔로 들어가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음에도 환영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린드버그를 위해서는 전 뉴욕 시민이 환영하고 있으니 너무 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노부부에게 말씀하십니다.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희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다. 너희가 고향에 돌아올 때는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면서 내가 직접 너희 부부의 손을 잡고 인도할 것이다. 그 때까지만 참아라. 이 선교사 부부는 주님의 이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벵겔(Bengel)이라는 신학자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일어서신 것에 대해서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서였다. 고 해석했습니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스데반의 담대한 믿음, 순교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차마 앉아서 맞이할 수 없어 서서 이리 올라오너라. 하며 환영을 하였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믿음으로 살다 천국에 들어갔을 때 이런 환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도 살면서 더러는 환영을 받아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친지나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앞에까지 마중을 나와 있다든지 아니면 역이나 터미널, 공항에까지 마중을 나온다든지 할 때는 정말 반갑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땅의 환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영을 받고 난 이후에 그 환영이 크면 클수록 허전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 환영이 허전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행복한 환영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에서의 주님의 환영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이렇게 환영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람을 환영합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이 들은 이 말은 행 07:02~53절의 말씀으로서 스데반이 구약성경을 적절하게 구원의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복음을 들은 자들은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지금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 즉 구약성경을 줄줄 외우다시피 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서 이들이 전도자 스데반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기 보다는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렸다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린 것입니다.

복음의 현장에 모인 공회원들은 스데반의 설교가 자기들을 향한 메시지인 줄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는 오히려 좋은 현상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공회원들은 말씀에 대한 찔림을 통해서 은혜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감정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이를 갈게 되었으니 다음 순서로는 그 말씀에 대한 귀도 당연히 막고 말았습니다. 싸움이란 여기서부터 확전이 됩니다.
싸우는 사람들의 문제를 곁에서 조용히 보십시오. 왜 싸우던가요?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안면몰수하고 싸우는 겁니다. 대부분의 싸움 꺼리가 귀만 열면 싸울 일이 별로 없으나 내 말만 계속 하다 보니 싸움이 계속 진행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려 올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를 계속 받느냐? 은혜를 배척하느냐의 갈림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을 받기 위해 나왔습니다. 무슨 말씀이든 이것은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들으면 좋은 것입니다. 가끔 설교 후에 나타나는 반응들을 보면 어떤 분은 꼭 자기를 치기 위해 설교를 했다는 식으로 오해를 하고 시험에도 듭니다. 이럴 때는 말씀에 대한 심령의 찔림까지만 생각하시고 그 다음 시험의 꺼리까지는 나가지 마십시오. 더 나가면 불평과 원망이라는 세상적인 친구가 찾아옵니다.

 

02: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였는데 똑같이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삼천 명)이 말씀에 대하여 이를 갈거나 귀를 막은 것이 아니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찔렸을 때 어찌할 꼬? 라고 반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며, 항상 심령의 문이 열려 있는 성도에게는 은혜의 길도 열립니다.

사도의 자리에는 들지 않았지만 전도자로서 사명을 가지고 산 스데반,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하고 담대한 복음의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구약성경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사람,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사람, 대적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이런 사람을 주님은 천국에서 환영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올 때 믿음으로 반응하는 성도들 찾으십니다. 혹 우리 가운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다가와서 찌를 때는 귀를 열고, 가슴을 열고 심령 깊숙한 부분까지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환영받는 사람은 이 땅에서 존경받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호화롭게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로 반응하는 자와 받은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자입니다.

 

 

 2.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을 환영합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통하여서 그대로 닮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T V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판을 치고 난리입니다.

각종 프로그램을 꿰뚫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분에게 드라마를 얼마나 봅니까? 하고 물어 보면 별로 안 본다고 합니다. 그저 월, 화 드라마 하나 보고, , 목 드라마 하나 보고, 주말 드라마 정도 본다고 하는데 정말 별로 안 보는 것 맞죠? 우리 가운데도 혹 이와 같은 분은 안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돈만 생각하고, 돈만 바라보고, 돈을 따라 살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06:24). 고 말씀하셨는데 재물의 본래적 의미는 우상적인 신()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적인 신 이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결국 믿음에서 파선을 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 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늘나라의 소망만 바라보는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스데반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 내려치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찰나에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요? 평소의 우선순위의 일이 떠오르는 법입니다. 스데반이 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하늘나라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일상생활의 모습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늘나라를 얼마나 사모하는 지를 돌아보십시다. 헬라어에서는 사람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란 의미인데 위를 바라본다는 것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비록 현실에서 좌절을 만날지라도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 분을 의지하며 행동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체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 흙에서 왔지요.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잘 아시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는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한다고 하였고(11:16)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03:0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 후에 주님으로부터 천국에서 환영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시간 우리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립하여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이 땅에 대해서는 죽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위하여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3. 범사에 기도가 생활화 된 사람을 환영합니다.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유대인의 처형은 주로 신성 모독죄에 한해서 집행합니다. 처형 방법으로는 먼저 죄인을 사형 집행 장소에서 3.5m 정도 아래로 떨어뜨린 후 돌로 치는데 그래도 죽지 않을 경우에는 크고 무거운 돌을 죄인의 목에 던져 죽입니다.

스데반의 처형도 이런 방법을 따라 공회원들이 먼저 돌로 치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처형에 동참하였을 것인데 이때 스데반은 큰 소리로 주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기도합니다. 스데반의 이 기도를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9절의 1차 기도에 이어 60절에서의 기도는 너무 심하게 돌을 맞는 과정에서 스데반이 쓰러져 있던 중 마지막 간구를 위해 무릎을 곧추 세우는 모습입니다. 60절을 보면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무릎을 꿇었습니까? 돌에 맞은 육신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정신도 혼미해져서 이제는 이대로 죽는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기도 없이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무너져 가는 몸을 가누면서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해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했을까요? 죽는 짧은 한 순간에 나올 수 있는 기도입니까?

한 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스데반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내 몸에 병이 찾아올 때도, 누가 나를 저주할 때도 기도하는 모습이 체질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서도 평소의 관례를 따라 기도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생활 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기도하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 봉사를 하다가 부름을 받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에 이어 한 가지 더 기도를 덧붙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런 스데반의 기도를 주님께서 보시고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신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오늘 만일 이 예배당 문을 나서자마자 여러분의 영혼이 마지막 임종을 맞이한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스데반처럼 늘 기도하는 스타일, 사무엘 선지자의 기도하는 스타일로 되어있습니까? 지금이라도 기도의 스타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천국 입구에 도착하자 세상에서 넉넉하게 살다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와서 입국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차례를 기다리는데 베드로가 대기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먼저 온 부자를 그렇게도 열렬히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로 구성된 합창대가 웅장한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부자의 입성을 환호한 후 베드로가 짤막한 환영사를 합니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잠시 후에 베드로가 대기실로 돌아와 가난한 농부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농부는 베드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그 부자가 들어갈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호할 것이라 기대하며 얼굴이 상기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고작 몇몇 사람들이 나와 정답게 인사할 뿐 천사 합창대도 거대한 군중의 환호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도입니다마음이 상한 농부는 베드로에게 항의를 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평등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그러자 베드로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가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오. 앞으로 보면 알게 되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란 것을 이해하시오. 가난한 농부는 매일같이 천국에 들어오지만 부자가 천국에 들어온 것은 80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웃으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정말 하늘나라를 쉽게 볼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훈련된 자들만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벌떡 일어나서 스데반처럼 우리를 환영을 해 주실까요?

이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좀 고생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땅에 것 보다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고 충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내 집처럼 돌아보면서 충성하며 살고,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면서 기도의 생활에 전념하며 살다가 마지막 그 날에 주님께서 일어나서 환영해 주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