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획과 설계가 분명하게 태어난 존재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존재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비록 생명이 없는 물건도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의미와 동기를 부여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도 각기 그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는 인생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지 3주 만에 교회를 세우고는 핍박으로 인해 인근 도시 베뢰아 지방으로 선교의 무대를 옮겼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좀 더 세심히 살피기 위하여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그러자 디모데가 그곳 교회의 형편을 잘 살피고 돌아와서 바울에게 선교 보고를 하는데 뜻밖의 좋은 소식을 들려줍니다. 잠 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디모데의 선교 보고가 오늘 말씀 속에 다 들어 들어있는데 어떤 보고를 하고 있는지, 선교 보고를 받은 바울은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떻게 후속 조치를 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데살로니가교회를 다녀 온 디모데가 선교 보고를 합니다. |
0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 자신은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지 못한다고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였습니다(살전 02:17,18).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교회를 다녀온 디모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울에게 전하는 중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마음처럼 꼭 같이 바울을 그리워한다고 전합니다. 디모데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교회 역사(歷史)는 좀 짧지만 어느 교회들보다 안정이 되어 은혜롭게 성장을 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의 보고입니다. 그러면 든든하고 은혜로운 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 은혜로운 교회의 기초라면 살전01:08절 말씀처럼 먼저 교회와 성도를 향한 외부적인 좋은 평판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내부적으로 성도들 간에 화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헬라의 북부지역인 마게도냐의 전 지역과 또 남부지역인 아가야와 그 수도(首都)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소문, 은혜로운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살전 01:0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또 살전 01:03절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뒷받침되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인생 최대의 소망으로 여기는 신앙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살전 01:0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성경의 원리를 따르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에는 좋은 결과가 따릅니다.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것과(벧전 01:09), 믿음에서 나는 행위(마 05:16)말입니다. 마치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마 07:17). 디모데의 이런 보고를 들은 바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보겠습니다.
2. 바울은 디모데의 보고를 듣고는 이제 한 시름을 놓습니다. |
0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라는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 살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행여나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흔들리거나 혹 실족하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라는 염려를 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오늘 보고를 통하여서 어디까지나 한갓 기우에 지나는 일이었음을 알고는 이제는 더 이상 염려 안 하겠다. 마음이 놓인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0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궁핍(窮乏)은 극심한 물질적 어려움을 말하며, 환난은 압박하는 것, 꽉 죄는 것으로서 당시의 바울이 이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현장을 만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에서 본 서신을 쓸 때의 상황이 이와 같이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줄기차게 훼방하였으며(행 18:06), 총독 갈리오에게 끌고 가서 고소까지 하였습니다(행 18:12~17). 행 18:0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바울은 이로 인해 많은 궁핍과 환난을 당하였지만 능히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바울이 예견한 것처럼 많은 고난과 궁핍을 당했는데(04,05), 이런 고난과 궁핍 앞에 안 무너질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우리가 흔히 보는 일이지만 권력이나 다수 민중의 물리적 힘으로 특정한 사람을 계속 괴롭힌다면 견뎌 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처럼 로마 정부의 공인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집중으로 핍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은 각오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기도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각오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 때문에 성도들이 당시 사회생활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 생활이 궁핍해 질 수 밖에 없었지만 능히 믿음으로 이런 궁핍과 환난을 극복하였다는 소식을 바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경우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로부터도 역시 같은 위로를 받고 이와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고후 07:03~07).
3.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적 지식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이웃 교회의 모범이 될 만큼 열성적인 믿음을 보였으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올바른 신앙 지식이 다소 모자람으로 혼란과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교회생활 역시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눔의 사랑과 중보의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하여 4가지 제목으로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①첫째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데살로니가교회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데살로니가교회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지만, 믿음의 사람은 가고 싶어도 먼저 하나님의 뜻부터 생각해서 가든지 오든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이 있을 때 움직여야지 그렇지 않고 분별이 없이 막 가다보면 사고를 당하기 알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로 가는 길이 열려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특별히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만나서 야 반갑다. 잘 지냈어? 모처럼 만났잖아. 한판 놀자고. 이런 식으로 세상적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만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놓고 자신에게 있어서는 영광이요 기쁨이라는(살전 02:20) 표현을 한 것을 보아 만남의 목적이 세상적인 것을 나누려 함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를 나누고 위로를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믿었고 적잖은 귀부인들도 믿음의 자리로 나왔는데(행 18:02,03) 그들도 역시 보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지금은 믿음으로 잘 자랐으며, 이제 디모데를 통하여 바울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한다고 할 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만남의 길을 꼭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②둘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이전보다 더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좋은 교회는 사랑이 살아서 넘치고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천국은 사랑이 넘치는 곳 아닙니까? 교회도 사랑이 넘치면 천국과 같아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나 자신부터 사랑이 넘쳐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혹 죄를 짓고 패역한 사람이라도, 미운 사람이이라도 사랑으로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사랑은 곧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혹자는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두 개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서로 나뉘어져 있어서 교회의 화합을 때로는 해치기도 했는데 그래서 바울은 피차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랑은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적인 사랑으로서 자신을 희생함으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자리 잡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처럼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이런 사랑을 이루기를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혹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여러 인간관계에서도 미운 마음이 생기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산상보훈의 강조점도 바로 이런 사랑과 용서입니다. 마 0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③셋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굳건하기를 기도합니다.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가 잘 흔들립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러려면 굳건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환난과 궁핍까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바로 이런 용기의 사람입니다. 단 01:08절을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라고 했습니다. 군주시대에서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죽음을 각오하고서 굳건한 마음을 정해서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우상의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역시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세워 놓고 절을 하라고 할 때 끝까지 절을 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 0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④넷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13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흠 없는 성도로 세워지기를 기도하면서 특별히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세월을 안일하게 보낼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성화를 이루기를 기도하는 이런 중보의 기도야말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 자가 아니라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도 제목을 나누면서 중보를 요청 할 때가 있는데 위하여 기도할 때는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보다 신령한 편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재림이라는 소망에 불탄 나머지 세상일을 등한히 하는 일이 있었고, 일부에서는 주님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믿음생활을 팽개치고서 질서가 없는 생활을 함으로 믿음의 금이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아는 바울은 종말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더욱 믿음이 성숙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란 조각을 더러 보셨지요? 한 남자가 벌거벗고, 주먹은 턱에 대고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상은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 문 앞에서의 심각하게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원래 제목은 지옥 문 앞에 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들어가기 전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성숙한 성도의 믿음생활 키가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는 곳에 있습니다. 바울처럼 중보적인 기도의 삶이 우리가 사모해야 할 자리입니다. 바울의 중보의 기도가 데살로니가교회를 살리고 모든 성도를 살렸습니다.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 나의 중보 기도가 필요한지를 턱에 주먹을 대고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과 각오가 따를 때 능력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중보의 기도 자리를 사모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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