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영국의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894~1972)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1894년 영국 왕 조지 5세(George V)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왕실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1936년 1월 42세에 에드워드 8세란 이름으로 영국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마음을 사로잡은 심프슨이란(Simpson, Mrs. 1896.06.19.~1986.04.24.)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자 심프슨 부인과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 내에서 반대가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으로 이미 결혼한 유부녀에다 이혼까지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왕비로 맞이하려 하자 영국 왕실은 물론이고 국회와 영국 국교회까지 나서 반대하였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11개월이 지난 1936년 12월 11일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동생인 조지 6세에게 물려줍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남을 것이냐,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왕위보다는 사랑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후 에드워드 8세라는 존엄한 칭호는 취소되고 대신 윈저 공작이라는 칭호로 불리었습니다. 다음 해인 1937년 6월 3일 윈저는 프랑스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영국 국왕이라는 자리는 온갖 부와 명예를 지닌 자리입니다. 얼마든지 조건이 좋은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 있는 직책입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택했습니다. 부귀영화보다 또 사랑 없는 결혼보다 사랑하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사랑을 나눌 대상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기록한 시인은 그 대상을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라고 고백합니다.
김삼일 가족은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행복한 선택입니다. 그 행복을 잘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목을 「성전 문지기의 복이 귀합니다.」로 정했습니다.
1. 시 84편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오늘 말씀의 표제를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쓰여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기록했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인지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먼저 고라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사촌입니다(민 03:19~27, 민 16:01, 대상 23:12~13). 모세와 아론은 고핫의 아들 아므람의 아들이고 고라는 고핫의 아들 이스할의 아들입니다.
고핫의 아들 중 이스할의 자손들은 성막 봉사와 신앙교육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고라가 일을 좀 하다 보니 교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도 모세와 아론처럼 정치, 종교 등 국가 경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자손에게만 제사장직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날은 고라가 250명 무리를 지어 모세와 아론을 찾아왔습니다.
우리 다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인데 왜 아론의 가문만 제사장 직분을 받을 수 있느냐? 당신은 뭔데 우리 위에 군림하느냐? 이런 도전입니다(민 16:01~03). 고라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의 영적 감각이 매우 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제사장직을 아론과 짜고 자기들끼리 다 해 먹으려고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만이 이어 갈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레 08:01~09).
대상 23:12 그핫(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 네 사람이라 13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이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모세는 고라가 250명 핵심 인물을 선동하여 불평을 제기한 일을 하나님께 처리해 달라고 맡깁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결과가 어떠한지 아시죠? 하나님께서 고라당을 심판하셨습니다.
민 16: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34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35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이기심을 따라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 대신 오직 파멸만 기다립니다(잠 16:18). 고라는 당을 짓고 권위를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역한 상징 인물에 자리매김을 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후 고라 자손들은 자기를 돌아보고 크게 회개한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시편 84편 기자의 고백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조상은 하나님께 심판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자손들은 거기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성전을 몸이 쇠약해지도록까지 사랑합니다. |
0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편 84편 저자인 고라 자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저미는 사랑을 느낍니다. 이 성전을 01절에 주의 장막, 02절에 여호와의 궁정, 03절에 주의 제단, 04절에 주의 집, 10절에 주의 성전 등은 모두 신령한 면에서 성소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주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이 장막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텐트 형태입니다. 솔로몬 왕 때에 지은 화려한 그 성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장막의 겉은 하얀 천이 둘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막이 처져 있습니다. 이 장막이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맞으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사실 외모로 보면 전혀 영광스럽거나 사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이 장막을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하고 표현합니다. 84편의 저자인 시인은 다윗 시대에 살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거하는 왕궁이나 여러 부자의 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건축물들에 비하면 이 장막은 외형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성막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참으로 놀라운 구절을 보게 됩니다. 02절 말씀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모했으면 몸이 쇠약해졌다는 표현을 합니까? 같이 읽겠습니다.
0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이건 분명 상사병과 같은 증세입니다. 궁정 즉 성소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애타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의욕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쇠약해졌다(כָּלָה 칼라)는 말은 끝이 났다, 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상사병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생명이 끊어질 것만 같은 지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03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0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제단에서(מִזבֵַּח 미즈베아흐). 원문에는 복수 형태의 제단들입니다. 제단들이란 성막의 번제단(출 27:01~08)과 분향단(출 30:01~06)입니다. 각각 하나님의 성소 앞뜰(출 40:06, 29)과 지성소의 맞은편 성소 안에 차려져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제단에 어떻게 하찮은 참새나 제비가 날아 들어와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문자 자체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03절은 시의 운율 형태입니다. 성막이 근접한 구역에 보금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라 자손이 왜 하찮은 참새나 제비도 주의 제단에서 집을 짓는다는 비유를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자기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시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요단 동편으로 피난을 갈 때 같이 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피난살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무엇보다 성막이 곁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제사 올리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날아서 성막 가까이에도 가고 성막 주변에도 집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참새나 제비가 부럽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3. 고라 자손은 성전 문지기의 복을 사모합니다. |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04절을 보면 주의 집에서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나옵니다. 10절에는 중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성전 문지기로 지내면 더욱 좋다고 고백합니다. 지금은 문지기 즉 아파트 경비원이나 회사의 도어맨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성전 문지기를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 때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찬양대로 봉사하였습니다.
성막의 기구들을 옮기기도 하였고 성막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도 하였습니다. 대상 26:01, 19절을 보면 고라 자손들은 숙식을 받으며 성전 내부의 일과 성전 문지기의 일을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성소에 사명감으로 출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와 같은 신령한 일을 하던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지금 고라 자손은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할 일은 그만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으로 10절을 고백하는 겁니다.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 하나님의 성전 입구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는 고라 자손이 성전의 일을 위해 성소 입구에서 들어가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냥 구경삼아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성전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런 신령한 일을 사모하여 성소 입구까지 왔다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성전에서의 이런 신령한 일을 하는 하루야말로 복된 일입니까?
세상일로 시기와 질투와 다툼을 벌이는 천날보다 분명히 값진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 올리는 일은 세상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매우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 전의 문지기는 신령한 면에서 교회의 직분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신령한 일을 사모합니까?
어떤 직분을 맡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어떤 직분이든지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사모하면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일은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도 교회의 직분은 소홀하게 여기고 충성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전도자로, 식당 봉사자로, 차량 봉사자로, 교사와 목장으로, 또는 찬양하는 일로 수고하는 분들이 바로 충성스러운 일꾼입니다.
성전 문지기의 일을 맡은 사명자는 돋보이지 않아도 개의치 않습니다. 문지기 역할은 어차피 하나님만이 알아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이미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기도로 성전을 지키던 안나라는 여 선지자가 있었습니다(눅 02:36~38). 이 안나가 결혼한 후 칠 년쯤 지나서 그만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나는 그때부터 세상에 속한 일을 내려놓고 기도 생활로 삶을 전환합니다. 그 기도의 삶이 과부가 되고 나서부터 84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의 결혼 나이를 14세로 보면 14+7+84=105세 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과 기도의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대단한 기도의 인물입니다.
이 무렵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다가 안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간증합니다.
눅 0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 하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성전의 문지기의 복된 삶을 누리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을 받고 형통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우리 가운데 바쁘다 핑계 대고 교회에 오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일 바쁘다며 주일날 자주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 122:0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본문의 저자 고라 자손은 참새나 제비가 성전 주변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사는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로운 삶, 신령한 복은 성전을 가까이할 때부터 옵니다. 우리는 세상 조건이 잘 갖추어진 사람을 부러워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것 보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부러워할 일은 신령한 일을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시간을 쪼개어 뛰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을 부러워하십시오. 내 삶을 그런 분과 비교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기록한 고라 자손처럼 성전을 몸이 쇠약해 질만큼 사랑합시다. 문지기의 삶을 사모합시다. 신령한 은혜의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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