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도미니(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기독교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로마 제국의 유명한 폭군으로 불렸던 네로 황제(37,12,13~68,6,9)가 자신의 총애를 받는 신하 페트로니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눈물 병을 가지고 오너라. 내 눈물은 귀하다. 가족들에게 내 눈물을 갖다 주어라. 그리고 네로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라. 하면서 자신의 눈물을 눈물 병에 받아 보관합니다.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옛날 왕들이 사용하던 눈물 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대 중동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슬픔에 젖은 온 가족들의 눈물을 병에 받아서 무덤 안에 시신과 같이 묻어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성 프랜시스(아시시)는 길을 가면서 자주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왜 우느냐고 물으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한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고 말했습니다.
성경 가운데 많이 울고 눈물이 마르지 아니한 세 분이 있는데 여러분 아십니까? 다윗과 예레미야와 사도 바울입니다. 이 세 사람의 눈물은 분명히 주님의 병에 담긴 눈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오시다가 산중턱쯤에서 갑자기 통곡을 하십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왜 주님께서 울고 있습니까? 평화를 상실한 이스라엘이 장차 겪게 될 참담한 미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울었던 그 자리에는 지금 눈물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탑을 마치 눈물처럼 만들고 눈물 항아리 조각까지 해 놓았습니다.
눈물은 진실 아닙니까? 억지로도 웃을 수 있고, 일부러도 화를 낼 수 있으나 진정한 눈물은 일부러 낼 수는 없습니다. 눈물은 진실한 감정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통곡을 하셨는데 어떤 의미에서 통곡을 하셨는지 그 의미를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장래를 내다보고 울었습니다. |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예수님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전능자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장차 원수들에게 짓밟힐 것을 예지 하셨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로마 제국입니다. 이 원수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거대한 성전을 박살 날 것을 예수님은 미리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장차 될 일을 전혀 감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긴 아직 닥쳐 온 일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깨어 있어 예루살렘의 흑암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장차 일어날 불행 정도는 능히 짐작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주후 70년 7월 9일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의 장군 디도(Titus)가 10개의 군단 97,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성곽과 성전까지 완전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전의 금과 은을 로마로 가져가기 위해 가루로 만들었는데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내다보고 우신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으로 미래를 보고 염려하는 사람은 언제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의인 한 명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멸망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만이 이런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눈물로 인해 상하였다고 말합니다.
렘 05:0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애 0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독립운동가 유관순(천안 1902,12,16~1920,9,28 충남 천안)이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우는 것을 스크랜톤(미국, 1832~1909) 선교사가 보고 물었습니다. 관순아, 왜 그렇게 밤잠을 자지 않고 우느냐? 유관순이 대답합니다. 이 나라 이 국가를 보고 울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유관순은 1919년 고향에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다 잡혀 1920년 10월 20일 17세 나이로 6토막이 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가인 도산 안창호(1878,11,9~1938,3,10일) 하면 우리 귀에 많이 들린 이름입니다. 이 분이 일본 검찰의 조사를 받을 때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일본의 실력을 모르는가?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원한다.
그건 무슨 뜻인가?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웃인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2천만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것보다 우정을 가진 2천만을 이웃으로 두는 것이 일본에게 득이 될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한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도산 안창호를 취조하던 일본인 검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민족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현실을 보며 우리도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내다보고 울었습니다. |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 예언은 성곽(城郭)과 성전 두 가지가 다 완전 파괴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우선으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평화의 길을 걷지 않고 주님의 길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모든 도시의 최후를 말해주는 종말적 심판의 성격도 띠고 있습니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주님은 성과 성전이 완전 파멸을 맞게 되는 근본 이유를 보살핌 받는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보살핌이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와서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그들이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오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인 지를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눅 21:0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06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루살렘 성전을 역사적으로 구분 할 때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제 1 성전과(왕상 06:01~08:11, B. C. 959-586), 스룹바벨에 의한 제 2성전(포로기 이후 B. C. 520년경에 재건), 그리고 헤롯 왕에 의해 시작된(B. C. 19년) 제 3성전이 있습니다.
제 3성전은 주후 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의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예수님 사역 당시 성전 공사가 사십육 년 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요 02:20).
예루살렘 성전은 8개의 문이 있었고 성전 벽을 이룬 돌 하나의 길이가 11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으니 그 웅장함은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진 성전 벽과 또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장식을 하여 나름대로는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로마의 디도 장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불타고 말았습니다. 옛날 고대 전쟁은 성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공격을 하여 이겼다는 표시로서 상대의 재기를 차단하기 위해 성벽과 성내 기물을 완전히 불태우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이렇게 성곽과 성전을 완전히 불태웠는데 뒤 늦게 불타 버린 성전 안에 금이 가득하고 성전 벽 사이에 금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보니 불탄 성전 돌에 금이 녹아서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또 벽과 벽 사이에도 금이 숨겨져 있다 하니 금을 얻기 위해 성전을 계속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이 일로 인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은 길이 50m, 높이 18m가량의 파괴된 일부 성벽이 서쪽에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듭니다. 왜 이런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이 철저하게 완전히 파괴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우상 때문입니까? 형식과 위선과 교만의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어도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를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후일 성전이 파괴 된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마지막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3. 예루살렘의 자녀들의 비극을 내다보고 울었습니다. |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녀를 위한 눈물입니다. 장차 적들이 쳐들어 와서 자식들을 땅에 메칠 것을 내다보시고 우셨다는 말입니다. 로마 디도(Titus) 장군이 10개의 군단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을 때 약 110만 명 정도의 성민을 죽이고 10만 명 정도는 포로로 잡아 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끌려가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겠으며, 또 로마 군인들은 반항하는 부모나 그 어린 아이들을 창칼로 찌르면서 땅에 메어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이런 현장이 바로 지옥이며 다시는 일어나서 안 될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북한에 의해 적화통일을 당한다면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들의 믿음을 위하여 눈물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 자녀들만이라도 말씀과 믿음으로 잘 자라면 이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 각 종 죄악이 탈선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인터넷은 청소년들의 온갖 죄악의 소굴이 되고 있는 상황이고 음란 사이트만 10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곳이 바로 우리 자녀들 옆에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녀를 위하여 계속 울면서 바로 길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즘 젊은 겁 없는 청소년들 묻지 마, 하면서 찌르고 죽이고 폭행하는 사건을 자주 일으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알고 보면 자녀들을 위한 우리의 눈물이 메말라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세 가지 액체입니다. 땀은 노동이요, 피는 생명이라면, 눈물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눈물은 가슴 아픈 자를 위로하며, 병든 자를 치료하며,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눈에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 흘린 기억이 언제입니까? 주님 앞에서 나의 허물을 바라보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 앞에서 기쁨으로 찬양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내 눈에 눈물이 말랐다면 이는 그만큼 내 영성의 샘이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눈물에는 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감동의 눈물, 감사의 눈물, 슬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 참회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등. 이런 눈물들 보다는 주님, 내게 눈물을 주시옵소서. 자녀들을 위하여 펑펑 울 수 있는 눈물샘이 터지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려야만 자녀들이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시 56:0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이 기록한 이 기도문은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 응답을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의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아야 합니다.
첫째, 회개의 눈물을 담아야 합니다.
둘째,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담아야 합니다.
셋째, 남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눈물을 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래를 내다보고 우신 주님,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내다보고 우신 주님, 예루살렘의 자녀들의 비극을 내다보고 우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 내 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물을 주시옵소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눈물샘이 터지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의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은혜의 강단 > 2012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들리지 않는 소망으로 삽시다(시 62:05~08). (0) | 2012.09.08 |
---|---|
나도 이슬 같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호 14:04~08) (0) | 2012.09.01 |
성전 문지기의 복이 귀합니다(시 84:01~04, 10). (0) | 2012.08.18 |
우리 모두 열등감을 극복합시다(삼상 18:06~16). (0) | 2012.08.11 |
나는 어떤 복을 구합니까?(시 128:01~06) (0) | 2012.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