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11년) 12월 17일 고 3년생 진 모군이 서울 시내 소재 국립대학에 응시하여 대학 측으로부터 수시 합격이라는 소식을 통보받았습니다. 대학 총장이 직접 축하하는 영상 메시지와 함께 말입니다.
진군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합격증까지 출력하고는 가족들과 함께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간이 지나자 학교 측으로부터 다시 불합격이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전산 시스템에서 평가 과목을 잘못 입력하여 순위가 뒤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합격이 취소된 학생은 모두 9명, 대신 새로운 9명이 합격되었지만 불합격을 통보받은 학생들과 그 부모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전산오류로 인해 합격 처리 되었다가 합격이 취소된다면 그 순간 얼마나 실망스러울까요? 2010년에는 무려 1만 4천 명이 이런 일을 겪었다 합니다.
세상 즐거움의 한 단면입니다만 세상의 즐거움은 이런 식으로 가변차선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원망과 탄식 등 일그러진 모습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십니다.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사도 바울도 인생의 즐거운 삶에 대해 말하기를,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권하면서 세상의 물질에서 즐거움이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은 어디에서 무엇으로 즐거움을 삼고 누릴 수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이 즐거움입니다. |
0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구약시대의 대속죄일과 연관시켜 보아야만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일 년 중 대속죄일인 유대력 7월 10일에(레 23:27,28)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민족 전체의 속죄를 위한 거룩한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지성소 안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인해 구름이 충만하여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증표인 구름 속에서 서서 제사를 마치고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제사는 완전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그림자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면에서의 예전 아닙니까?
이제 그림자의 실체인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심으로 인해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는 그 임무를 마쳤고 율법도 완성이 되어 끝이 났습니다(롬 10:04). 이런 진리를 따라 우리는 지성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세계에 각자가 믿음으로 직접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그런 은혜의 나라 말입니다. 02절은 이런 은혜의 자리에 내가 서 있음이 진정한 즐거움이란 말입니다.
신령한 즐거움이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그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 비로로 이루어지며 그런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에는 물건을 재대로 담을 수 없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관계가 무너지고 심령에 금이 간다면 신령한 즐거움이 유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죄로 인하여 고통의 길에 들어섰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충분히 즐거워 할 이유가 있으며, 또 그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생활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①하나는 구원을 받은 정도로만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이고, ②또 하나는 그 받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지만 그 물질의 속성은 행복의 요소를 내포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공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소유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에서 나오며,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은혜의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즐겁게 산다는 것은 세상적인 쾌락을 누리는 동물적인 본능과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영적인 복락입니다. 진정한 즐거움, 가치가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①바르게 살아가는 삶과 ②의미가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즐겁다 할지라도 바르지 못한 삶이라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또한 의미가 없는 인생이라면 그것 역시도 가치 있는 삶이 아닐 것입니다.
어거스틴.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의 뜻이 맞아야 하듯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즐거운 삶을 찾아가는 것은 셀프입니다.
내가 수고하는 행동이 선행되어야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런 눈먼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냥 피어있는 꽃이 없고, 마지못해 피어있는 꽃도 없듯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은혜의 자리에 내가 셀프로 가야만 합니다.
2. 즐거움을 누리는 인생은 환난도 능히 극복합니다. |
0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0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이 수반되는 고난의 현장입니다. 이런 정도의 눈물과 고통이라면 그 자체를 누가 즐거워하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환난 자체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맺어주실 축복의 결과를 미리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롬 0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요즘은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자살의 동기는 대부분 경제적 파탄, 사랑의 실연, 약물중독, 알코올, 가정불화, 정신 이상 등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런 것들이 직접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면 자살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좌절입니다. 감당 할 수 없는 환난이 닥쳐서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마음 때문에 살아갈 의미마저 없어진 상태의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삶에 대한 의욕만 강하게 심어주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혹 주위에 삶에 찌들려 정말 환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시면 용기와 희망을, 그리고 격려를 할 수 있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 주십시오. 대개 사람이 허무함과 좌절을 느끼는 이유는 인생의 목표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좀 어려움은 겪지만 소망이 있음으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실 영광을 내다보면서 즐거움을 잘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컨트롤 하여 마침내 웃음을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의 당하는 환난을 내일의 영광으로 전환하는 바울의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이 너무 큽니까? 삶의 의미를 알면 사는 게 힘들고 고달파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격투기나 복싱 선수들이 몇 끼씩 굶으면서 체중 조절을 하고 또 링에서 때로는 엄청난 충격의 매를 맞으면서도 버티는 것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왜 그러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고, 그 이유를 알면, 견딜 수 있고 거기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는 일이 퍽 쉽지 않지요? 사는 게 고달프고 힘들기도 하지만, 당장 내일에 대한 기대를 걸기가 쉽지 않아서 더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힘들지만, 내일은 좀 나아질 거라는 보장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디겠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실 줄 믿고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본문에는 말미암아 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0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02절 그로 말미암아, 05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09절 그의 피로 말미암아, 10절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1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등 7회나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보혈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왜 보혈이라고 합니까?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0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우리가 언제 의인되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때부터입니다. 죄인을 그냥 의롭다고 할 수 없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감기에 걸려 링거를 여러 번 맞고 약도 계속 먹었습니다. 며칠은 걸려야 낫지 금방은 안 되더라고요.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에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의인이 됩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맛보는 사람은 즐거워합니다.
영국 시인 가일스 플래처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길 잃은 자에게 그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이며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이며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이고 병든 자에게 강건함이며, 눈먼 자에게 광명이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다시는 잃지 않는 즐거움이며 도둑맞지 않는 보물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인생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문제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전보다 더 심한 문제가 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 기쁨, 참 소망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의 특징입니다.
시118:0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샤르니(Charny)라는 사람이 나폴레옹 황제 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친구들도, 가족들도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홀로 버려진 느낌에 하도 쓸쓸해서 돌조각으로 벽에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나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주는 물을 매일 조금씩 남겨서 푸른 싹에 부어주곤 했는데 그 싹에서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먼저 썼던 글,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라는 글을 지우고는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조세핀 황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조세핀은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일 수 없다고 황제에게 사면을 건의하여 석방되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소망도 감옥 안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이 우리 인생을 풍성하고 향기 나게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앞으로도 잘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걱정거리가 해결되고, 행하는 일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직장이 잘 되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신령한 즐거움을 회복하면서 미래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우찌무라 간조.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으며, 장식품은 살 수 있으나 美는 살 수 없으며,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으며,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으며,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은 살 수 없으며,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으며,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불가능하며, 교회는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조금은 힘들고 아프다 할지라도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 즐거움 안에는 잠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건강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정말 소중한 것 아닙니까? 찌든 인생, 슬픔과 고통에 눌린 인생이 아닌 즐거운 인생, 행복한 인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시다.
스티브 잡스 남긴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정말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기회는 고작 두세 번에 불과하다. 종착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여행 도중에 얼마나 즐거운 일을 이루어냈느냐다.
벧전 0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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