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2년 말씀

김해삼일교회를 재건합시다.(느 06:01~19 )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2. 1. 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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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B. C 722년 경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 멸망과, B. C 586년 경 바벨론에 의한 남 왕국 유다의 멸망은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 70년에 관한 일은 감이 잘 안 옵니다.

유다 민족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성경에 나오지만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과정도 세 차례가 되는데 그때의 기간이 약 70년이기 때문에 70년 포로기 라고 합니다. 그때의 일을 좀 더 잘 하기 위해 제가 도표로 설명하겠으니 참조하십시오.


 

 ①1차포로. B. C. 605년(왕하 24:02) 유다 제 18대

 여호야김 왕 4년. 왕 자신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갔고 이때 다니엘도 끌려감.

 ①1차 포로귀환. B. C. 538년(스 01장~06장)―스룹바벨이

 인도함. 목적. 성전건축

 ②2차 포로귀환. B. C. 458년(스 07장-10장)―에스라가

 인도함. 목적. 신앙부흥

 ②2차포로. B. C. 597년(왕하 24:08~16) 유다 제 19대

 여호야김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이 왕이 되었으나 100일

 천하로 끝남. 중산층 10,000명, 지도급, 군인 7천, 기능공 1천

 등이 끌려갔고 이때 에스겔도 끌려감.

 ③3차 포로귀환. B. C. 432년(느 02장)―느헤미야가 인도함.

 목적. 성벽재건.

 ③3차포로. B. C. 586년(렘 52:09~11) 유다 제 20대 시드기

 야 왕 11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아들들 죽음을 보면서

 두 눈이 뽑혀 끌려감. 하층민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끌고가면서 예루살렘성, 솔로몬성전이 파괴 됨.

 1차 포로기간(B. C. 605년)으로부터 1차 포로귀환.

 (B. C. 538년) 사이의 기간이 대략 70년이 됨.

 

 

렘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수많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그들은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바사) 제국이 건설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끌러간 사람 가운데는 그곳에서 관리로서 높은 벼슬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다니엘, 스룹바벨, 느헤미야 같은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의 직책에 오른 느헤미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로 작정합니다.


02:0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전쟁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잡혀 간 사람입니다만 바벨론은 새롭게 등장한 신훙제국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치하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직책에 오릅니다.
상당한 권
세자입니다. 이 느헤미야가 B. C 445년 12월 경 예루살렘에서 온 자기의 동생 하나니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벽은 훼파되고 성문은 불에 탔다는 말을 듣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굳은 각오를 합니다.
즉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분은 궁중의 술과 음료를 책임 맡은 고위 관리 아닙니까? 자기 마음대로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그렇다고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쉽게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위하여 하나님께 먼저 금식 기도로서 메어 달리는데 여기서 성경구절 2곳을 찾아 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 01:0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느 02:0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언뜻 보면 별것 아닌
내용처럼 보입니다. 느 01장 01절의 기슬르월은 12월이고, 니산월은 4월에 해당하는데 01장과 02장의 날짜를 보면 약 4개월의 차이가 남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을 들은 시점과 그것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간 시점의 시간적 차이입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느 0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기도 후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얻은 것은 4개월 후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장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넉 달이라는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기도에서 언제나 중요한 것이 기다림입니다.
기도가 기다림이라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거래는 주고받는 것이고 주고받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신뢰와 인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응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실 때 25년이 걸린 것은 아브라함의 관심은 아들이었으나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과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에 금방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응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침내 느헤미야가 기도한 지 4개월 후 공적인 일로 왕을 만났을 때 근심에 잠긴 느헤미야에게 왕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느 02:0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1장,2장에서
기도하면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문구로서 3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01:04, 02:04, 02:20).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을 줄 믿고 전적으로 메어 달렸더니 왕이 감동을 받고 장시간의 기간을 허락해 줍니다. 그리고 호의병과 함께 각종 편의를 제공해 주는 한편 주변의 모든 관리들이 느헤미야의 길을 막지 못하도록 조서도 내려주고 거기에다 유다의 총독 직책까지도 하사합니다(느 05:14).


 

 2.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방해꾼도 있습니다.


0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공히 따르는 어려움이지만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대적들의 방해도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성벽을 쌓는 공사가 결국은 다 끝나고 이제 성문만 달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됩니다. 이 막바지의 성문을 다는 순간이 중요한 것은 막바지에서 시험을 당하여 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0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적을 경계하면서 또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일하다 보니 성문 외에는 거의 공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04:16~18). 그러자 주변의 방해꾼들은 이렇게 빨리 공사가 진행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근한 방법으로 방해의 걸림돌을 놓고 있습니다. 음모와(01~04), 모함(05~09)과, 공갈 협박(10~14)을 하는데 그럼에도 느헤미야가 전혀 요동을 앉자 마지막에는 암살까지 하려고 합니다.
이 방해꾼들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으로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그의 참모 도비야 그리고 요단 동부 지역 게달의 왕 게셈입니다. 그 중에 사마리아의 산발랏과 참모 도비야가 찾아와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느 04:0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사기를 꺾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좌절시키려는 공갈입니다. 02절을 보시시오. 산발랏과 게셈이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느헤미야를 만나자고 제안을 하는데 오노(계곡)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 32.4km 지점에 위치하며 사마리아와 아스돗 사이의 중립 지대로서 완전한 이스라엘 영역이 아닙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산발랏 일당이 느헤미야와의 면담 장소로 오노 평지의 한 시골 마을을 택한 것은 느헤미야를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꾀어내어 살해하려는 음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해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에 성문을 달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펼치고 암살의 음모를 꾸미면서도 겉으로는 평화회담을 하자는 겁니다. 이제는 과거는 잊고 앞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삽시다. 라는 회담인데 위장평화 회담이지요.
 느헤미야가 누구입니까? 영적인 분별력을 지닌 사람으로서 산발랏의 제안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초청이 아니라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 정도는 능히 간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대적자들은 느헤미야에게 악의를 품고 교활한 음모를 가지고 이렇게 흔들어보고 저렇게 흔들어보면서 방해를 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성벽재건 공사가 두세 번 중단되기도 했는데 이제 성벽 공사가 완성 되려고 하니 느헤미야를 한 방에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간단히 거절합니다.

03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04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느헤미야는 4번이나
끈질기게 평화를 위장한 회담을 제안 받았으나 단호하게 거절한 것처럼 우리 인생살이에도 때로는 강력한 거부와 거절의 표시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전 재건에 따른 고난과 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데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는데 그 상황에서 부유층과 지도층 사람들이 고리대금을 하는 바람에 서민들의 집과 논밭이 거의 저당 잡혔고, 빚을 내어 세금을 내다보니 나중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아들, 딸들을 노예로 파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성전 재건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함께 나누는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 민족 내부의 분열 조짐까지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느헤미야가 일어나 개혁조치를 단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동족들로부터 이자를 받지 말고, 저당 잡힌 것들을 돌려줄 것을 경고하자 모든 백성들이 동감하고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말씀대로 지켜 행했습니다(느 05:01~13).


 3. 방해꾼들은 이제 헛소문까지 흘립니다.


05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0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 도다.


산발랏 일당의 공갈협박
편지를 보십시오.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느헤미야에게 보내었다고 했습니다(05절). 그 귀중한 편지를 봉하지도 않고 전달하는 이유가 뭡니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읽고 그 입을 통해 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유언비어를 퍼뜨리려는 겁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①너와 유다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이웃나라에 퍼져 있다. ②너는 유다인의 왕이 되려고 성벽을 중수한다는 소문이 있으며 네가 너를 왕으로 선전할 선지자들을 임명하였다. ③페르시아의 황제가 이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니 이제라도 우리가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 하자. 이런 내용입니다.


이런 편지를 읽어 본
사람은 처음에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던걸, 맞아 확실해 하는 과정으로 서서히 변합니다. 약 이런 소식이 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진실유무를 떠나서 느헤미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왕에게로 가야 합니다.

결국 이런 루머에 의해헤미야가 자리를 비우면 중단된 성벽 역사와 더불어 기회만 엿보던 산발랏과 도비야는 감언이설을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휘하에 넣게 되겠지요. 참으로 간교한 방법으로서 마귀의 전략이 성공하는 것과 같은 순간입니다.
중상모략은 본래 약간 삐딱하게 이야기를 흘리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너무나 억울해서 사람을 만나 직접 해명하고 싶지만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럴 때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물음에 당신들이 지어낸 것이지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대답한 후 기도로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중상모략에 대비하여 세워놓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①첫째 원칙은 이것이 사실인가? ②둘째 원칙은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③셋째 원칙은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퍼졌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 형제에게도 유익한 것인가?


산발랏과 도비야는 또다시
종교적인 문제로 느헤미야를 회유와 협박을 하는데(10~14) 어떤 방법일까요?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는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10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당시 예루살렘에 산발랏에
동조하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 중에 스마야라고 하는 제사장 겸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가 산발랏의 사주를 받고는 자기 집에 은거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처럼 위장을 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제사장에게 무슨 변고가 있는가보다 하고 그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스마야가 이렇게 거짓 예언을 합니다. 총독님 오늘 밤 산발랏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공격을 당할 것 같습니다. 성전으로 피하세요. 내가 친히 동행할 터이니 성전에서 문을 잠그고 함께 지냅시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11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하나님의 성전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제사장들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법칙을 어긴 10대 왕 웃시야가 함부로 성소에 들어갔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스마야에게 대답하기를, 유다의 총독으로 백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데 어찌 그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자기 신변안전을 위해 도망갈 수가 있겠느냐? 또한 나는 정치 지도자이지 제사장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서 성소에 들어가 숨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어긋나는 모순 된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받았다는 계시도 율법에 어긋남으로 거짓된 예언을 한다는 것을 이내 간파하였습니다. 성벽 건축에 있어서 밖으로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중심으로 한 공격과 안으로는 귀족들의 부패로 인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 모든 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권모술수로 인하여 느헤미야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영적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삶에 원치 않는 고통의 현장이 있지만 하나님의 프로그램에서 보면 다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 축복 된 일을 우리를 통하여서 능히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주위의 끊임없는 음모와
중상모략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52일 만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완성을 볼 수 있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내가 이 일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어떤 큰일을 이루게 되면 내가 했다라고 자기가 행한 일을 자랑하면서 교만하기를 잘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한 일에 들러리로 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랑하였고 그 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