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시내의 높은 구릉에는 천주교의 교구청이 있고 그 안에는 성직자의 묘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신부나 수녀로 평생을 봉직한 분들이 죽은 후에 묻히는 곳으로서 이 묘지 입구에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습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하는 말로서 오늘은 내가 묻히기에 당신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여기에 왔노라. 그러나 내일은 당신의 차례이니 당신이 여기에 묻히게 되리라.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뒷산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천주교 공동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 놓은 글도 함 읽어 볼만합니다. 사람아 생각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오늘은 네 차례요 내일은 내 차례다. 이런 유의 글들은 세계 곳곳의 묘지에 새겨져 있는데 읽으므로 숙연함을 느끼게 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아니면 짧게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어떻게 그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였느냐를 기준으로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극히 짧은 한 순간이지만 그 시간을 잘 활용하여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고 영생의 세계에 이르는 한 사람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라틴어. 갈보리) 위에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중앙에는 우리의 죄를 위해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요, 좌우편에는 흉악한 강도들이 자신들의 저지른 죗값으로 달린 십자가입니다.
외경인 빌라도의 행전에 의하면 이 두 사람 중 회개하지 않은 강도의 이름은 게스타(Gesta)요, 회개한 강도의 이름은 다이스마스(Disma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성품이 포학하여 강도질을 하다가 체포되어 함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형리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 중에 다이스마스 라는 사람은 동일한 골고다의 사형 터에서 잠간 동안 만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자리에 들어옵니다. 비록 늦은 시간이지만 구원의 자리에 들어 왔다는 것 얼마나 다행이며 축복입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축복을 받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다이스마스는 곧 받게 될 심판을 깨달았습니다. |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다이스마스는 지금까지 향락과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죄를 밑천으로 삼으면서 그 인생의 가치관도, 소망도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악만 끼쳐 왔던 이 사람, 거칠고 악하게만 살아왔던 이 사람이 이제 인생의 막이 내려지는 순간에 심판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다이스마스는 무가치하게 살았던 한 평생보다는 마지막 죽음의 극히 짧은 한 순간에서 죽음과 심판을 생각하였고, 그 심판을 생각하니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욕했던 자 아닙니까?(마 27:44). 그러나 삶의 마지막 한 순간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장차 당할 무서운 심판을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구원의 길은 열리는 법입니다.
히 0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다이스마스 이 사람,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막가는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형까지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흉악한 강도인지는 능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귀중한 인생은 막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아십시오.
삶의 주제는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 입니다. 눅 16:19~31절에 보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다 지옥에 간 부자와 거지로 살다 천국에 간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 부자로서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지냈던 사람이 지옥의 불꽃 속에서 고통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나사로가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다 지옥에 있는 그 사람에게 줄 수도 없을 뿐더러 한 방울의 물을 혀에 댄다 한들 그것이 과연 시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러웠으면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을 요청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No입니다. 아무리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통을 덜어 달라고 부르짖어도 그 부르짖음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25,26). 이때 부자가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 있을 때 장래의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진작 예수님을 믿을 걸, 형제에게 전도할 걸,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탄식하고 후회를 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때는 지나갔고 그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구원의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 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기도도 할 때가 있고, 전도도 할 때가 있고, 말씀도 들을 때가 있고, 그리고 들은 말씀을 순종 할 때도 있는데 이때를 놓치고 지옥에 가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후 06:0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예수님을 오늘 못 믿으면 다음에 믿지, 내일도 모래도 앞으로도 얼마든지 날이 있어 하면서 미루는 분이 주위에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몸은 있지만 아직도 구원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차차, 천천히, 다음, 하면서 계속 미루다 보면 영영 기회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심판의 무서운 현장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예수님을 믿을 걸 하며 통곡을 하기 전 지금 심판의 하나님 앞으로, 회개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2. 다이스마스는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강도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지 어떻게 해서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회개의 현장은 잘 모릅니다. 다이스마스는 먼저 주님을 모욕하는 동료의 죄악성에 대해 아주 강도 높은 책망을 합니다(40). 그리고는 예수님을 옆에 있는 동료와 십자가 아래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언합니다.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이어서 그는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 즉 메시아로 알고 자기를 구원해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42). 다이스마스의 회개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모습, 비록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처럼 훌륭한 회개와 신앙고백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강도가 임종의 순간에 구원을 받았듯이 자신도 그와 같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으로 계속 교회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 보십시오. 나도 마지막 순간에 이 강도처럼 돌아올 겁니다. 그러나 인생살이가 어디 내 마음과 뜻대로 잘되던가요? 이 강도의 처한 환경처럼 우리의 형편이 이 같기만 하다면 야 괜찮겠지만 그렇지를 못하기에 문제입니다.
다이스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겪고 목격하였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위에서 오랜 침묵 끝에 야유하며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심령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다이스마스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심령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요청합니다. 이제는 평범한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죽으시는 구원의 예수님, 그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있는 생명의 세계를 지금 42절에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확신이 있는 소망입니까?
천국이 있을까 없을까? 에 대한 애매한 태도가 아니라 뚜렷한 체험으로 알고 그 세계에 들어가고자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구원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임을 알았기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을 합니다.
다이스마스가 비록 세상의 관점으로는 사형수라는 치욕적인 생애였고 그 죽음조차 십자가형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이제 인생의 새 출발을 합니다. 한편 그 순간에 한 사람은 음부의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의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거리가 이 두 사람 사이에 생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지척에 두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면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마음을 열지 못하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을 거부하는 강도, 그의 살아온 세월을 잘못되었다고 반성하거나 수정하지 않는 이 사람, 주님을 향하여 지금 당장 손만 뻗으면 될 터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함이 심히도 안타깝습니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천국에 이릅니다. |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천국을 요청하는 다이스마스에게 하신 말씀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주권적인 은총이 어떻게 임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행악자 중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달렸는데 이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여섯 시간 동안 외쳤던 일곱 말씀의 설교를 다 들으면서 고통으로 죽어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불신으로 죽었지만 다른 한 사람 다이스마스는 회개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종류의 강도와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신과 완악함 가운데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회개하여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한 사람은 회개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죄 가운데 죽는 이 일이 어찌된 일이며, 왜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한 사람은 회개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회개를 못합니까?
왜 똑같은 복음이 한 사람에게는 나타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숨기어 집니까?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정확하게 이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강도의 구원을 통해 볼 때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그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주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고,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에 자리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님을 만난 다이스마스, 세례도 받지 않았고, 성경공부도 제자훈련도 하지 않았고, 직분을 받지도 않았으나 그의 구원을 우리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직 진실 되게 회개하는 영혼을 받아 주시며 주님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인생은 곧 연습이 없습니다. 만일 인생에 연습이 있다면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번 가보니 그렇게 끔찍한데 누가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또 인생에 있어서는 다시 라는 말도 없습니다.
농사야 실패하면 다시 지을 기회나 있지만 인생살이만은 오직 한 번의 기회인 일방통행입니다. 그러니 성공을 보장한 성경 말씀에만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때문 아니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취미생활, 출세, 성공 등 이런 것이 중요하겠지만 천하보다 더 귀한 내 생명하고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피해보려고 합니다만 그러나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가거나 연장시키지는 못합니다.
또 죽음 건너편 세계에 대하여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알려고 하지만 우리 가운데 죽음을 체험해 본 사람도, 죽음 저편의 세상에 다녀온 사람도, 완전히 아는 사람도 없어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대조적인 두 사람을 오늘 만나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강도가 한 때는 죄를 짓는 일에 행동통일을 함께 한 동료였으며, 고통의 형벌을 받는 일에도 동료였으나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각자의 세계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회개한 다이스마스처럼 우리도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예수님과 등을 지고 살아갑니까? 구원의 길에 관하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 남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구주로 만나야만 합니다. 이후부터 믿음으로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면서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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