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자기 공명심을 극복합시다(행 14:08~1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10. 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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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창시자 스티브 잡스(1955.2.24.~2011.10.5.)가 죽은 지 3주가 지났는데도 세계 곳곳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인류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세계사에 빛나는 위대한 인물 반열에 올랐습니다. 컴퓨터 혁명, 3D 애니메이션 혁명, 모바일 혁명 등 그의 업적이 과히 대단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생전 일찍 교회에 대하여 실망하고 떠나 법당에서 염불을 외우며 불경에 심취하였다는 글을 읽으면서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했으나 생명 세계에 대하여는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1983년 펩시콜라 미주 본사 사장인 존 스털리를 영입하며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을 팔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정말 좋은 말입니다. 또 미션라이프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가 아니라 목회자였다면 아마 교회를 바꿨을 것이고 교회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을 것이다. 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복음의 열정과 권위야말로 세상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내 영혼을 살리고 우리 김해삼일교회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말씀을 되돌려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성공적인 복음의 열매를 거둡니다만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과 관원들까지 가담하여 강력하게 대응하는 박해로 인해 그 이웃 지역 루스드라(38km)로 피난하였습니다(14:05~07).

 

바울 선교팀은 루스드라에서 육신의 휴식을 뒤로 미룬 채 일절 복음 전파에만 힘을 쏟아붓습니다. 중단 없는 복음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진정한 전도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남은 인생을 설탕물을 파는 것과 같은 세상의 삶보다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 선교팀은 전도의 결과로 최고 예우받는 일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예우가 주님은 사라지고 자기 공명심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자기 공명심을 극복합시다.로 정했습니다.

 

 

1. 복음의 현장에는 능력이 나타날 사람도 있습니다.

 

0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 이 장면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바울도 그 사람을 눈여겨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는 이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비치는 겁니다. 이 앉은뱅이의 믿음은 엡 02:08 절의 구원을 위한 신학적 믿음이 아닌 치료를 받을 만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바울이 생명의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내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할 때 우선으로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진지하게 듣는 것 이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신령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불행한 사람이지요. 그러고 보면 잘 들을 수 있는 자세가 가장 귀합니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자세를 보고도 믿음의 상태를 짐작합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헤매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지 말입니다. 농아(聾啞)들은 말을 듣지 못하므로 언어장애인이 됩니다. 그들은 대화를 주로 수화(手話)로 합니다. 이들의 약 90%는 말을 할 수 있는 신체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혀나 입의 구조도 완전한데 다만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었습니다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 언어장애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잠재력이 있어도 듣는 기능이 망가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들어야 하고, 들을 것을 들어야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사람은 대부분 예배의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미지근한 사람은 거의 뒤편에 자리를 잡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김삼일 가족이 교회에 오는 이유를 설명할 때 믿음 때문이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특별히 기도할 때마다 소리를 막질러가며 왁자지껄하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꼭 그렇게 해야 후련하고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행위가 진정한 믿음의 기도입니까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셔야 기도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야 기도입니다. 물론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셔도 괜찮지만, 스트레스 푸는 형으로 하는 일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성도 예배 30분 전부터 나타납니다. 앞에서부터 앉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수준이 여기서 나타나고 평가됩니다.

가까이 오는 것, 그리고 듣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똑바로 바라보고 들어야 은혜가 임합니다바울의 설교에 앉은뱅이가 열심히 쳐다보며 듣습니다. 얼마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쳐다보는 그 중심을 보니 치료받을 만한 믿음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손을 잡고 외칩니다.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지라.

 

 

2. 무리가 바울 선교팀을 왜 신으로 섬기려 합니까?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가 바울의 큰 소리를 따라 일어나서 뛰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이 매우 놀라워합니다.

즉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반응합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신이 감동하면 사람의 형상으로 온다고 여겼습니다.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제우스(Ζεύς)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의 우두머리이고 헤르메스(Ἑρμῆς)는 제우스의 대변자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을 지녔기에 제우스로 불려 졌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기에 언어를 지배하는 신 헤르메스로 인식된 것 같습니다.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헬라 지역 외의 신전은 대체로 성 밖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기 성 밖 신당의 제사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제사가 계속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가져온 소와 화환들을 보십시오.
제사장이 신을 섬기기 위해 가져온 황소와 꽃다발입니다. 당시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에 해당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로 올리려고 가지고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 오래전에 제우스와 헤르메스 두 신이 루스드라에 강림하였습니다. 그때 마을의 농부 빌레온과 아내 바시우스는 두 신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두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만 배척하였습니다진노한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빌레온과 아내 바시우스는 살려두고 나머지 마을 사람은 모두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후 빌레온의 집은 신전이 되었고 부부가 함께 제사장이 되어 신전을 섬겼습니다

 

제사장 부부는 오래 살면서 자식을 낳아 그 마을을 지켜나갔습니다그들이 죽은 후에 마을에 두 개의 나무가 커서 고목이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여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두 고목을 보고 신화를 들으면서 옛날 자기 조상들이 신들을 잘못 대접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화의 배경 아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등장하여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분들이 과거 신화의 주인공인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서 이번에 우리 마을에 강림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또 대접을 소홀히 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멸망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제사장이 직접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3. 선교지에서는 공명심을 잘 극복하여야 합니다.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제사장이 그 옛날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에게 하지 못한 대접을 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소화 화환을 드리려는 순간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매력있는 장면입니다. 사람은 자기 공명심을 즐기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이 공명심을 물리치지 못하면 자기 우상화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공명심과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여호와, 과연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잘 섬겼습니까? 오히려 우상의 길로 나가다 결국 멸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를 우상 사이에서 방황한 역사라고 합니다.

 

시 115:0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사람이 우상을 끊임없이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보이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각화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인간 우상화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안내합니다.

 

바울은 앉은뱅이를 고치는 장면에서 그 절대 권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사람 안에 있는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인간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제사장이 자기들을 사람의 형상을 입은 신으로 착각하고 제사를 지내려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ὁμοιοπαθής)을 가진 사람이라. 성정은 헬라어에서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연약한 인간이며 무능한 죄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이야기가 행 1026절에도 나옵니다.

 

행 10: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오늘날에도 더러는 사람이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적이나 권능만큼 완벽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기적을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임을 조금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순수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자기 우상화의 공명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야 뭐 별로 내세울 존재도 아니니 무슨 우상화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좀 높임을 받지 못하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직접 이야기 안 했다고 왜 기분 나빠합니까?
연락이야 누가 해 주던지 들으면 됩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아직도 죽지 못한 자존심 때문에 남의 마음 상하게 하는 일 이제 깨뜨립시다.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점쟁이가 점을 보러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터줏대감 심술이 대단한데 점괘가 안나와. 집안에 예수쟁이 있지?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점을 보러 온 사람이 없는데요. 분명히 있어. 사촌까지 잘 훑어봐. 그러자 점보러 온 사람이 깊이 생각하다 말합니다. 사촌 중에는 없고 팔촌 형님뻘 되는 분이 교회 집사에요. 요즘 한국 사람치고 사촌 팔촌까지 뒤져서 기독교인 없는 사람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점쟁이가 강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터줏대감이 섭섭하데. 복채 더 얹고 죄송하다고 빌어. 아니, 팔촌인데요? 그러니까 빌어야지.

자네 터줏대감의 마음이 넓으셔서 팔촌까지 굽어살피시니 어찌 모른 체 하겠나? 좀 더 신경 써 봐결국 복채가 몇만 원 더 얹히자 점괘가 안 나온다고 연신 괴로운 표정을 짓던 점쟁이의 얼굴이 곧 펴지면서 점괘를 내놓았습니다. 초년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천년만년 장수로다.


사람들 교회를 다니면서도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말을 한 번 잘못 들으면 그 말이 계속 맴돌아 그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점쟁이의 말은 아예 듣지 말아야 하겠지요? 귀가 얇으면 이런 사이비 점쟁이에게 놀아나서 사기당하는 일이 막 일어납니다.

혹 신유와 예언, 투시의 종이라 자처하며 특별한 은사를 받게 해 준다는 식의 말을 듣거든 그 호기심을 바로 버리십시오. 쫓아다니다 보면 미혹의 영에게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딤후 04:0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0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그 귀를 긁어 줄 신기한 소리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허탄한 이야기란 귀를 즐겁게 하는 이상한 소리를 말합니다.

오늘 이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 역사함으로써 치료의 역사가 바로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우상화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믿음으로 물리쳤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하였으니 얼마나 낮은데 처하는 자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