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행 19:11~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6. 11. 13:49
728x90

한 병원에 입원하여 있던 부인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즉시 하늘나라로 인도되어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은 저는 쿠퍼의 시장 부인입니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누구의 아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고 묻고 있다. 그러자 부인은 다시 대답하기를 아이의 이름을 대면서 저는 네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하고 답을 했습니다.

누가 어머니냐고 물었느냐?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다. 다시 부인은 저는 교사입니다. 너의 직업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이렇게 문답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떻게 대답해도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에 만족할만한 답변을 하지 못하다가 다시 이 부인이 답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너의 종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이 부인은 당황해하면서 이렇게 다시 답을 합니다. 저는 매일 교회에 나가고, 항상 가난한 사람과 약한 자를 돕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크게 소리가 들립니다무엇을 했느냐? 를 묻는 것이 아니다. 너는 누구냐?

 

결국 이 부인은 하늘 심판대에서 행하여진 시험에 낙방하여 지상으로 되돌아왔고 그 순간 이 부인이 깨어났습니다이 일로 인해 자기의 병이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인이 자기가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중에 생활과 인격과 가치관이 믿음으로 정립되었다고 합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은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고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누구의 아들딸, 누구의 부모, 또 하는 일 등을 빼놓고 무슨 명답으로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을 멈추게 할 것 같습니까?

질문은 아주 쉽지만 쉽게 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막상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15절을 봅시다. 악귀 들린 자가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너희는 누구냐?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 어떻게 답을 하겠습니까? 믿음의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로 정했습니다.

 

 

1. 사도 바울을 통해 나타난 능력을 마술사들도 모방합니다.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9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여러 이적을 소개하는 장입니다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간 사역하는 동안 성령님의 능력이 바울의 치유 사역에 임하셨습니다. 놀라운 치유 사역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치유의 능력이 얼마나 굉장했는지를 11, 12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 병이 나았습니다. 대단한 일 아닙니까?

 

당시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에는 우상숭배의 신전이 많이 있었습니다특별히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의 전각(殿閣)이 있었습니다자연히 마술하는 사람들, 주문을 외우는 주술가들,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악한 세력들과 능력대결을 벌입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엡 0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악한 영들의 조정을 받는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바울의 복음 현장에서 나타나는 능력이 자기들과는 차원이 다름을 직접 확인합니다바울이 어떤 주문을 외우기에 저렇게 병도 낫고 악귀들도 쫓겨나는가? 하는 궁금증으로 바울의 사역을 주목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라고 외치는 그 주문 때문에 악귀들이 도망가는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그러자 떠돌이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처럼 시험을 해 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냥 유대인이라는 이름만으로 행세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얼마나 멋있는 소리입니까? 고대 세계는 악령을 내쫓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 특정 이름을 주술(呪術)의 의미로 사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에베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사도들 외에 비기독교인도 귀신 축출을 위해 예수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14~16, 9:38, 39).

실제로 파리의 마술 문서 574번 파피루스 3,018행에는 무당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실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엄히 명하노니.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마술사들이 바울처럼 예수님 이름을 부르며 외칩니다. 마술사들이 바울의 행동을 모방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어디 능력이 나타납니까? 시험 삼아 하는 퍼포먼스에 마귀가 놀라 도망가겠습니까? 도망이 아니라 그대로 달라붙어 버립니다.

 

 

2. 악귀가 제사장 아들에게 너희는 누구냐 하며 묻습니다.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3, 14절을 잘 보십시오.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떠돌이 유대인들이 악귀를 쫓아내겠다며 예수님 이름을 감히 들춥니다. 한심한 장면이지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런 마술 수준의 일을 벌였습니다. 제사장 아들이 미신 같은 일을 벌이다니 어디 있을 수나 있는 일입니까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 대제사장이 이방인의 땅에 살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일에 대해 좀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스게와가 유대인의 문헌에 대제사장으로 등재되어 있느냐입니다.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가 이 사실을 모르고 대제사장으로 기록하였습니까? 누가의 의도는 스게와와 그의 일곱 아들이 대제사장의 가문을 빙자(憑藉)한 사람임을 나타내려는 데 있습니다.

진짜 유대의 대제사장이거나 혹 그 가문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이방 도시에서 미신 같은 일을 하며 지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스게와의 일곱 아들 행적을 보아 변질한 한 유대인의 가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이비 유대인입니다. 대제사장 가문을 빙자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미혹하고 이권을 채우려는 자들입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다른 마술사처럼 흉내 내어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귀신이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귀신이 쫓겨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귀신의 역습에 일곱 아들이 당황합니다.

 

분명히 바울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도 했는데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당황한 나머지 온갖 소리를 다 질러 보았을 것입니다. 야 귀신아, 빨리 물러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 하며 외쳤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귀신은 오히려 제사장의 일곱 아들에게 달려들어 공격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지를 16절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같이 읽읍시다.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결국 짝퉁 대제사장, 짝퉁 유대인이 드러났습니다. 스게와와 그 일곱 아들은 대제사장의 권위와 명성을 빙자하여 돈벌이하는 간교한 술책자들입니다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없는 그저 세상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돈벌이를 위하여 그 앞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거짓 고백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치 사마리아인 시몬처럼 말입니다(08:09~24).

 

13 명하노라(ορκιζομεν 호르키조멘). 부탁한다. 애원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떠돌이 마술사들이 귀신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명령형이 아니라 단순 현재 직설법으로서 떠돌이 마술사들처럼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같은 방법으로 귀신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악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단호한 명령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데 좀 나가 줄래. 라는 일종의 애원입니다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교도의 축귀(逐鬼) 관습을 따라 주술을 외우듯 인용합니다

그러니 귀신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고 묻습니다조롱하는 셈입니다. 귀신과 악한 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고 오히려 두려워 떱니다(04:24).

 

 

3.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스게와의 아들 일곱 명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평가하자면 이미테이션 신앙인이라 부릅니다.

모조품 신앙인이 어디 이들 일곱 명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조품 신앙인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딤후 03:0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다 신령한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수모를 당합니다. 이들이 바울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거듭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신령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을 구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 주술(呪術)처럼 외우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결과는 귀신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폭행하자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악귀가 너희는 누구냐? 하고 물을 때 나는 예수님을 믿는 김삼일 가족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다. 또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부르고도 그분이 누구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입지 않고 남이 부르니 그저 이름만 불러 봅니다.

능력을 모르고 능력을 입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이름 바울의 이름을 인용하여 악귀 들린 자에게 명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신이 나가겠습니까? 나가기는커녕 귀신이 오히려 조롱합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귀신은 보통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사람을 먼저 알아봅니다.

그들의 믿음과 능력을 미리 헤아립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다는 말입니다(04:41, 16:17). 그런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이런 신령한 세계를 모르고 또 능력도 없이 함부로 귀신에게 명하다가 그만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막 0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많은 신자가 자기가 누구인지 믿음의 정체성을 모르며 지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혹 내 모습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과 같은 모조품 신앙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 같고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혹시 우리의 속사람이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 숫자로 처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숫자로 기억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음을 던지면 숫자가 말해줍니다.

김해 삼방동 화인@ 102○○○, 010-5526-○○○○, 1929×××, 6011○○-06-000063(우체국) 이 숫자들은 다 저라는 존재를 가볍게 나타냅니다.

그런데 딱딱한 숫자에 너무 얽매이다 보니 중요한 나라는 존재가치를 잃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숫자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주님과의 만남의 자리, 복된 자리, 은혜의 자리, 눈물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25:21).

오늘 내가 사탄으로부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라는 식의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답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주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주님과는 관계없는 불신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이 질문에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구원의 자리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즘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말이 알 게 뭐야 (Who cares?)와 나는 모른다(I don't know). 라고 합니다.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영혼에 관한 관심은 벌써 지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믿음의 내공을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영광된 일에 쓰임 받는 도구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